복싱을 잘하는 것과 잘 가르치는 것은 별 상관이 없다.
“운동을 잘해야 잘 가르칠 수 있다” 세상 사람들이 흔히 하는 생각이다. 나는 이것이 얼마나 허황된 생각인지 알고 있다. 긴 시간 복싱을 해오면서 종종 복싱을 가르쳐야 할 때가 있었다. 그때마다 복싱을 ‘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은 전혀 다른 영역의 일이라는 것을 느꼈다. 물론 복싱을 전혀 할 줄 모르면 복싱을 가르칠 수 없다. 이는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데 이 분명한 사실만큼 분명한 사실이 있다. 복싱을 잘한다고 해서 항상 복싱을 잘 가르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선수 시절에 준수한 성적을 내었던 관장을 알고 있다. 그는 체육관 소속 선수들과 회원들에게 복싱을 열심히 가르쳤지만, 선수와 회원들의 실력은 좀처럼 늘지 않았다. 관장은 실력이 없는 것도 아니고, 열심히 가르치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그러니 관장은 선수들과 회원들의 향상되지 않는 실력의 원인을 제자들과 회원들에게서 찾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시간들이 반복될수록 관장은 선수와 회원들에 향한 화와 짜증만 늘어갔다.
무엇이 문제였던 걸까? 운동을 ‘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그 차이는 무엇일까? 관심의 대상 차이다. 운동을 ‘하는’ 이의 관심의 대상은 ‘자신’이다. 운동을 할 때는 모든 관심이 온통 ‘자신’에게 쏠려 있을 수밖에 없다. ‘나’의 체력과 기술이 향상되고 있는 건지, 지금 배우고 있는 기술이 ‘나’에게 맞는 건지, 지금 훈련법이 ‘나’에게 적합한지 등등. 운동을 잘하려면 온 마음이 ‘나’를 향해 있을 수밖에 없고, 또 그래야 한다.
꼭 복서가 아니더라도, 성공한 운동 선수들 중에 나르시시스트가 많은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어떤 운동을 잘하는데 나르시시즘(자기도취증)은 도움이 된다. 자신을 가장 사랑하기에 자신을 중심에 두고 생활하는 이들은 해당 분야의 운동을 잘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나르시시즘에 빠져 있는 복서들은 내가 가장 강하다는 자신감을 갖기 쉬울 뿐만 아니라, 체력이나 기술에 관련된 자신에 대한 이해도 역시 높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가르침은 타인에게 관심을 갖는다는 것
운동을 가르친다는 것은 정반대의 일이다. 관심의 대상이 ‘자신’이 아니라 ‘타인’을 향해야 한다. 사람은 저마다 기질과 체형이 다 다르다. 어떤 운동이든, 자신의 기질과 체형에 어울리는 방식으로 훈련해야 기량이 향상된다. 하지만 배우려는 이는 자신의 기질과 체형에 대한 이해도 낮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설사 배우려는 이가 자신의 기질과 체형에 대한 이해도가 어느 정도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바탕으로 어떻게 훈련해야 하는지 알 수는 없다. 바로 여기에 가르침의 중요성이 있다.
복싱을 잘 가르치려면 우선 ‘나’에 대한 관심을 줄이고, 배우려는 이에게 관심을 쏟아야 한다. 배우려는 이가 소극적인지 공격적인지, 팔이 짧은 긴지, 순발력이 좋은지 지구력이 좋은지 등등을 잘 살필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타인’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가르칠 때 비로소 좋은 가르침이 가능하다. 그뿐인가? 잘 가르치려면 단순히 배우려는 ‘타인’에게만 관심을 가지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왜냐하면 가르치려는 이 역시 배워야 하기 때문이다.
무엇인가를 가르치려면, 가르침에 대해서 배워야 한다. 아무리 배우려는 이에게 관심을 가지려고 한들, 결국 가르치는 이는 배우려는 이가 아니다. 지도자는 자신이 운동했던 방법에 대해서 알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자신과 다른 기질과 체형을 가진 사람을 가르치려고 할 때 공부할 수밖에 없다. 자신은 키가 크고 공격적이지만, 키가 작고 소극적인 이들은 어떻게 훈련하는지 관심을 갖고 살펴야 한다. 잘 가르치려면 배우려는 ‘타인’뿐만 아니라 그 타인을 가르치기 위해서 또 다른 ‘타인’에게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챔피언 출신 관장이 지도하는 체육관에서 한두 명의 실력자 밖에 나오지 않는 경우가 있다. 이는 그 관장의 가르침이 자신과 유사한 기질과 체형을 가진 이들에게만 효과적이었기 때문이다. 여전히 ‘자신’에게만 관심이 있을 뿐, ‘타인’에게 관심이 없는 관장은 자신의 스타일과 훈련법을 고집할 뿐이다. 자신의 성공방정식을 제자들에게 일방적으로 강요할 뿐인 셈이다. 당연히 이러한 관장은 선수들을 가르치기 위해 타인들에게 ‘관심’을 갖고 공부할 필요도 느끼지 못한다. 자신이 가르침이 가장 훌륭하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관장은 좋은 선수였을 순 있어도, 좋은 스승이 될 수는 없다.
가르침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신뢰다.
‘타인’에 대한 관심은 가르침의 기초일 뿐이다. 이 기초가 있어야 가르침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형성된다. 바로 신뢰다. 가르침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가르치려는 이와 배우려는 이 사이의 신뢰다. ‘스승’과 ‘제자’의 성립은 어디서 오는가? 바로 믿음이다. 배우려는 이는 가르치려는 이가 진정으로 자신의 성장을 위해 애쓰고 있다는 믿음이 있어야 하고, 가르치려는 이는 배우려는 이가 자신의 가르침을 오해하지 않을 것이란 믿음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믿음 아래서 단순히 무엇인가를 가르치려는 이와 배우려는 이가 ‘스승’과 ‘제자’라는 관계 아래 놓이게 된다.
복싱은 지독한 ‘땀’과 ‘피’의 스포츠다. 그만큼 고되고 위험하다. 때로 가르치려는 이는 배우려는 이에게 지독한 ‘땀’을 요구할 수밖에 없다. “매일 10km를 뛰고, 샌드백 10라운드 쳐라!” 이는 배우려는 이가 가르치려는 이에 대한 신뢰가 없다면 짜증만 나는 고된 훈련일 뿐이다. 때로 가르치려는 이는 배우려는 이에게 지독한 ‘피’를 요구할 수밖에 없다. “오늘 두 체급 위 선수랑 스파링해라!” 이는 배우려는 이가 가르치려는 이에 대한 신뢰가 없다면 두려움만 쌓이는 위험한 훈련일 뿐이다.
관장과 선수들 사이에 많은 불화가 있다. 이는 모두 근본적으로 서로에 대한 신뢰가 없어서 벌어지는 일이다. 신뢰가 없기에 각자의 소중한 ‘땀’과 ‘피’가 짜증과 위험으로 연결될 뿐이다. 흔한 관장과 선수가 ‘스승’과 ‘제자’의 관계로 진입했을 때만 비로소 그 ‘피’와 ‘땀’이 성장의 밑거름이 된다. 긴 시간 복싱을 하면서, 이러한 ‘링’의 진실이 ‘삶’에서도 유효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삶’에서의 가르침
누구나 살아가면서 무엇인가를 가르쳐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직장에서 후배에게 업무를 가르쳐야 할 때일 수도 있고, 아이를 낳아 삶에 대해서 가르쳐야 할 때일 수도 있다. 우리는 이러한 상황에서 크고 작은 곤란을 겪고 한다. 매번 똑같은 것을 가르쳐주어도 매번 실수하는 후배를 볼 때 짜증이 나지 않았던가? 스마트폰을 너무 많이 보지 말고, 아이스크림을 너무 많이 먹지 말라는 말을 수도 없이 했지만 늘 제멋대로인 아이를 보며 울화통이 터지지 않았던가?
이런 일은 왜 발생했을까? 물론 그 모든 일은 후배와 아이의 게으름과 부주의 때문일 수 있다. 하지만 혹시 그 모든 일은 우리가 그들에게 관심을 갖지 않아서 일어난 일인 것은 아닐까? 매번 후배에게 똑같은 것을 알려주었지만, 그것은 자신이 업무를 배웠던 방식이지 후배에게 적합한 방식은 아니었던 것 아닐까? 그래서 후배가 매번 같은 실수를 반복했던 것 아닐까? 아이에게 매번 훈육을 했지만, 그것은 아이의 입장에서 한 번도 서보지 않은 채로 했던 잔소리였던 것은 아닐까? 그래서 아이는 여전히 스마트폰과 아이스크림에 빠져 있었던 걸 아닐까?
후배에게 관심을 갖고 그에게 어울리는 방식으로 업무를 가르쳐주면 후배는 더 이상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아이에게 관심을 갖고 아이와 긴 시간을 보내면 아이는 더 이상 스마트폰이나 아이스크림에 빠져 있지 않을지도 모를 일이다. 좋은 가르침은 언제나 한 사람을 변화시키는 법이다. 그러한 좋은 가르침은 ‘링’에서나 ‘삶’에서나 ‘너’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시작된다.
진정한 가르침은 오직 ‘사랑’ 아래서만 완성된다.
가르침의 시작은 ‘나’에게 관심을 줄이고 ‘너’에게 관심을 갖는 일이다. ‘너’의 대한 관심이 쌓이고 쌓여서 서로에 대한 믿음이 형성되었을 때, 비로소 가르침은 완성된다. 이제 우리는 진정한 가르침에 대한 비밀을 알 수 있다. ‘너’에 대한 관심이 쌓이고 쌓여서 생긴 믿음이 무엇인가? 그것은 ‘사랑’이다. 누군가에게 무엇인가를 잘 가르치고 싶다면, 먼저 상대를 ‘사랑’하려고 애를 써야 한다. 이것이 누구도 말하지 않은 진정한 가르침의 비밀이다.
‘사랑’이 선행될 때만 진정한 가르침이 가능하다. 놀랍게도, 진정한 가르침이 완성되면, ‘스승’과 ‘제자’라는 이분법적 도식은 사라진다. 진정으로 잘 가르치고 잘 배우는 관계는 결국 ‘연인’ 관계로 수렴된다. 서로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연인’을 생각해 보라. 그들은 딱히 서로를 가르칠 생각도 배울 생각도 없다. 하지만 그들은 서로의 존재 자체로 누구에게도 배울 수 없었던 것을 온몸으로 배운다. 오직 사랑만이 한 사람을 성숙하게 한다는 말은 결코 과언이 아니다.
부모에게 무엇인가를 잘 배우는 아이를 세심히 살펴본 적이 있을까? 그들의 관계는 ‘스승-제자’라는 위계적 관계라기보다 깊은 애정을 바탕으로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연인’ 관계에 가깝다. 때로는 아이의 부모는 때로 스승처럼 단호하지만, 때로 친구처럼 편안하다. 이는 ‘링’에서도 마찬가지다. 한국에서 가장 유능하다고 평가받는 격투기 감독을 알고 있다. 그가 제자들과 맺는 관계의 방식은 위계적인 ‘스승-제자’가 아니다. 그들의 관계는 때로 부모처럼, 때로 친구처럼, 깊은 애정을 나누며 삶을 함께하는 ‘연인’ 관계에 가깝다.
링에서든, 삶에서든 진정한 가르침의 정의는 동일하다. “진정한 가르침은 오직 ‘사랑’ 아래서만 완성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