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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불행한 밥벌이, 나를 부정하고 사랑받은 대가

밥벌이가 '생존' 혹은 '질식'의 문제인 시대

밥벌이는 ‘생존’이거나 ‘질식’의 문제일 수밖에 없는 걸까? 


소설가 김훈이 언젠가 ‘밥벌이의 지겨움’에 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직장생활에 지쳐갈 때 쯤 왠지 이 말에 끌렸었다. ‘그래, 밥벌이는 원래 지겨운 거야’라고 되 뇌이면서 말이다. 맞다. 김훈의 말처럼 밥벌이는 원래 지겨운 것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네 삶에서 이 말은 가끔 사치스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지금 우리가 살아내고 있는 시대에 밥벌이가 지겹기만 하면 정말 다행스러운 것일지도 모르겠다.      


 1997년 IMF 외환위기 이후 지금까지 직장인들은 연말이 되면, 아니 이제 상시로 서슬 퍼런 정리해고의 칼날 앞에 불안에 떨어야 했다. 그뿐인가? 대기업의 무차별적인 골목시장 진입으로 정을 나누던 동네 상점은 하나 둘 문을 닫아야만 했다. 그렇게 서민들은 대자본의 무차별 공세 앞에 어쩔 수 없이 자신의 밥벌이를 내려놓아야만 했다. 이런 상황에서 밥벌이의 지겨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그나마 먹고 살만한 사람들의 투덜거림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생존이라는 절체절명의 문제 앞에서 지겨움이란 감정을 느낄 수는 없는 법이니까.


 우리 시대 대다수의 밥벌이는 척박하기 그지없다. 많은 사람들이 생존을 위해 일하고 있다. 그나마 성실하고 유능해서 생존의 걱정 없이 밥벌이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해도 밥벌이가 만족스럽지 못한 것은 마찬가지다. 그들 역시 매일 반복되는 일상에 질식해가고 있다. 김훈의 말처럼 ‘밥벌이의 지겨움’에 찌들어 가고 있는 게다. 우리 시대의 밥벌이는 ‘생존’이거나 ‘질식’이거나 둘 중 하나다.


 이쯤 되면 의구심이 든다. ‘생존을 위한 밥벌이’ 혹은 ‘질식할 수밖에 없는 밥벌이’ 이외 다른 형태의 밥벌이는 가능하지 않은 걸까? 밥벌이를 하면서 행복할 수는 있는, ‘행복한 밥벌이’는 정말 가능하지 않은 걸까? 우선 행복한 밥벌이가 가능한지 아닌지를 묻기 전에 우선 행복한 밥벌이가 무엇인지부터 생각해보는 것이 순서겠다. 대체로 밥벌이를 생존의 문제 혹은 지겨움의 문제 이상으로 고민해본 적이 없으니까.


행복한 밥벌이란?     


행복한 밥벌이는 간단하다. ‘내가 원하는 일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행복한 밥벌이’가 쉽지가 않다. 엄존하는 삶의 조건 속에서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하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이던가? 그러니 조금 더 현실적인 관점에서 행복한 밥벌이를 다시 정의해야 할 필요가 있다. 복잡 미묘한 현실적 문제를 감안한다면, 행복한 밥벌이는 이렇게 정의할 수 있다. ‘자아실현의 욕망과 사랑받고 싶다는 욕망 사이의 균형을 잡으면서 할 수 있는 일’ 생경하게 들릴 수 있으니 조금 쉽게 설명해보자.


 자아실현이란 것은 말 그대로 자아를 실현하는 것이다. 자신이 생겨 먹은 모습을 있는 그대로를 긍정하면서 사는 것이 자아실현이다. 그러니까 일을 하면서 자아실현을 한다는 말은 자신이 원하는 일을, 원하는 방식으로 할 수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바로 여기에 우리가 행복한 밥벌이를 할 수 없는 심각한 문제가 하나 도사리고 있다. 그것은 내가 원하는 일을 원하는 방식으로 할 때, 그러니까 일을 하면서 자아실현을 할 때 사람들에게 사랑받기가 매우 힘들어진다는 사실이다.


 누군가 원하는 일을 원하는 방식으로 하려고 했을 때, 세상 사람들은 그에게 뭐라고 말할까? 대체로 “넌 왜 네 멋대로 야!”라고 말한다. 세상은 자신을 긍정하며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삶에서 관철하려고 하는 사람을 사랑해주지 않는다. 직장을 그만두고 영화감독이 되겠다는 직장인을 응원하고 격려해주는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있을까? 잘나가는 IT업체 CEO가 귀농을 하겠다고 했을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를 응원하고 격려해줄까? 모를 일이다. 


 영화감독이 되기 위해 사표를 던진 직장인, 억대 연봉을 뿌리치고 귀농을 한 CEO는 분명 자아실현을 했다. 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표현할 수 있는 밥벌이를 찾은 셈이다. 하지만 행복한 밥벌이의 정의에 비춰보자면, 누구도 그들을 사랑해주지 않는다면 그들에게 영화감독과 농사는 결코 행복한 밥벌이가 아닌 셈이다. 자아실현만으로 행복한 밥벌이는 요원하다. 영화감독과 귀농이 행복한 밥벌이가 되려면 그 일로 누군가에게 사랑받을 수 있어야 한다.     


사랑이 밥 먹여 준다!


불쑥 짜증스러운 질문이 올라온다. “사랑이 밥 먹여 주냐?” 행복한 밥벌이는 결국 원하는 일을 하며 생계를 유지하는 일 아닌가? 자아실현도 좋고, 사랑받고 싶은 것도 다 좋다. 그런데 생계의 문제에 답할 수 없다면, 그저 뜬구름 잡는 소리일 뿐이다. 그렇다. 원하는 일을 하면서 자아실현이야 되겠지만, 생계를 유지할 수 없 수도 있다. 직장을 때려 친 영화감독, CEO를 그만둔 귀농인은 자아실현은 했겠지만, 심각한 생계의 문제에 봉착할 수도 있다. 누군가에게 사랑받는다고 해서 밥이 나오거나 쌀이 나오지는 않는 것 아닌가?


 하지만 놀랍게도 자신이 하는 일로 누군가에게 사랑받을 수 있다면, 돈 뿐만 아니라 심지어 명예, 권력까지도 얻을 수 있게 된다. 정말이다. 생각해보자. 동료, 상사, 사장에게 사랑받는 사람이 직장에서 잘려서 돈을 못 버는 경우가 발생할까?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소방관이 직위 해제되어 명예가 실추되는 경우가 있을까? 국민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대통령이 권력을 잃게 되는 경우가 있을까? 그런 결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무슨 일을 하던지 사람들에게 사랑받을 수만 있다면, 돈, 명예, 권력을 다 가질 수 있다. 그러니 당연히 생계를 유지하는 밥벌이 문제쯤은 누군가에게 사랑받을 수 있다면 우습게 해결된다.


 우리는 얼마든지 사랑받을 수 있다. 자신의 진짜 모습을 숨기거나 부정하면서 살아가면 손쉽게 세상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을 수 있다. 그 사랑으로 돈도, 명예도, 권력도 가질 수 있다. 물론 그 돈, 명예, 권력의 크기는 각자의 선‧후천적 능력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말이다. 어쨌든 자신이 원하는 삶이 아니라 철저하게 타인이 원하는 삶을 살게 될 때, 비교적 손쉽게 사랑받는 존재가 될 수 있다. 그리고 그 사랑의 대가로 일정 정도의 돈, 명예, 권력을 가질 수 있게 된다. 


 직장인이라면 하고 싶지 않은 업무지만 매번 꼼꼼하게 처리하고, 꼴도 보기 싫은 상사에게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살갑게 안부를 물으면 된다. 그럼 상사와 사장에게 사랑받을 수 있다. 틀에 박힌 삶이 싫은 소방관이 있다고 해보자. 자신을 숨기거나 부정하면서 충실하게 정복을 입고 3교대를 하며 업무를 수행했을 때, 그 소방관은 사람들에게 사랑받을 수 있다. 대통령도 마찬가지다. 약자에 대한 감수성과 국민들에 대한 애정이 전혀 없는 사람일지라도 그런 모습을 억지스럽게 꾸밀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사랑받는 대통령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 사랑의 대가로 그들은 돈, 명예, 권력을 얻은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진짜 모습을 숨기거나 부정하면서 돈도 벌고, 명예도 얻고, 권력도 가지게 된 게다. 그들은 행복할까? 그들은 행복한 밥벌이를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아닐 게다. 행복한 밥벌이는 고사하고 그 직장인, 소방관, 대통령의 삶은 불행하기 짝이 없을 것이다. 직장인은 가슴 속에 담아둔 꿈을 이루지 못해 늘 우울할 것이고, 소방관은 불편하게 짝이 없는 정복 때문에 답답할 것이고, 대통령은 관심도 없는 국민을 걱정하는 척하기 위해 악어의 눈물마저 흘리느라, 자괴감을 느낄지도 모를 일이다.     


내가 ‘나’로 살 수 없을 때, 행복한 밥벌이는 없다.     


이쯤 되면, 행복한 밥벌이가 왜 그리도 드물고 힘든 것인지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행복한 밥벌이가 드물고 힘든 이유는 있는 그대로의 자신의 모습을 내 보이면서 세상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어느 직장인에게 하고 싶지 않은 업무가 주어졌을 때, ‘그 일은 하기 싫어요!’라고 말하면 어떻게 될까? 또 꼴도 보기 싫은 팀장을 아침마다 무시할 때 그 직장은 어떻게 될까? 그 직장인은 상사와 사장에게 더 이상 사랑받을 수 없는 존재가 되고 만다.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자유로운 삶을 살고 싶은 소방관이 반바지를 입고 출근을 하고 3교대를 거부할 때, 그는 더 이상 사랑받는 소방관이 될 수 없다. 마찬가지로 ‘너희들 힘든 것은 알겠는데, 나도 힘드니까 이제 좀 그만 징징대!’라고 국민에게 말하는 대통령은 더 이상 국민들의 사랑을 받을 수 없게 된다. 그리고 그 사랑받지 못함의 대가는 결국 내 밥벌이의 치명적 위협이다. 어찌 보면, 밥벌이를 진짜 자신의 모습을 내 보인다는 건, 그러니까 일을 하며 자아실현을 원한다는 건, 자기 발로 자신의 밥그릇을 차버리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게다.


 행복한 밥벌이가 어려운 이유는 명확하다. 그것은 세상 사람들에게 더 많은 사랑을 받지 못해서가 아니다. 평범한 직장인도, 평범한 소방관도, 평범한 대통령도 모두 자신의 역할 안에서 사랑받을 만한 행동하며 밥벌이를 하고 있으니까. 행복한 밥벌이를 하지 못하는 진짜 이유는 ‘자아실현의 욕망’을 등한시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내면에 있는 순수한 욕망을 긍정하지 못한 채, 세상 사람에게 사랑받으려고 했기 때문에 밥벌이는 늘 고되고 치사스러운, 그래서 가능하면 하고 싶지 않은 일이 되어버린 게다. 우리는 그런 시대와 장소에서 밥벌이를 하며 살고 있다. 돌아보면 참 서글픈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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