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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행복한 밥벌이는 가능할까?

'자아실현의 욕망'이 스타일이 될 때까지.

행복한 밥벌이는 가능할까?     


누군가 ‘행복한 밥벌이는 가능한가?’라고 묻는다면, 이런저런 여러 가지 현실적인 문제에도 불구하고 나는 단호히 대답하겠다. ‘가능, 하다’라고. 단, 돈, 명예, 권력을 통해 ‘사랑받고 싶다는 욕망’을 적절히 통제할 수 있다는 전제 하에서. 다른 누구와도 구별되는 자신만의 욕망을 얼마나 긍정하고 또 얼마나 그 욕망에 부합한, 자신의 삶을 살아 낼 수 있다면, 행복한 밥벌이는 가능하다. 물론 적절한 균형은 필요하다. ‘자아실현의 욕망’에만 너무 집중하면 ‘사랑받고 싶다는 욕망’이 과하게 결핍될 수 있기 때문이다. 거칠게 말하자면 ‘내 꼴리는 대로만 살다가는 세상 사람들에게 왕따를 당할 수 있다’는 말이다.


 평소 쓰레기 같은 인간이라고 생각했던 사장에게 아침 인사로 ‘당신은 정말 쓰레기 같아요, 그렇게 살지 마세요!’라는 말로 아침 인사를 대신하면 어찌 될까? 산티아고 길을 걷는 것이 꿈인 소방관이 긴급 출동 명령을 거부하고 다음 날 스페인으로 여행을 떠나버린다면 어찌 될까? 국민들에 대한 아픔보다 자신에 대한 아픔이 더 절절한 대통령이 어느 날 담화를 통해 ‘먹고살기 힘들다고 징징대지 말고 각자 먹고살건 알아서들 좀 해!’라고 말하면 어찌 될까?


 그 직장인은 최악의 경우 하루아침에 직장에서 쫓겨날지도 모른다. 그 소방관은 십중팔구 스페인에서 돌아보면 다른 일자리를 알아봐야 할 것이다. 그 대통령은 다음 날 끝도 없이 곤두박질치는 지지율을 지켜보아야 할 것이고 최악의 경우 어느 불운했던 대통령처럼 탄핵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이처럼 ‘자아실현의 욕망’에 과도하게 집중하면 ‘사랑받고자 하는 욕망’을 전혀 채울 수 없게 된다. 달리 말해 기본적인 밥벌이마저 치명적 위협을 당할 수 있다는 의미다. 그래서 행복한 밥벌이는 ‘자아실현의 욕망과 사랑받고 싶다는 욕망 사이의 균형점에 있는 일’인 게다.


 물론 ‘자아실현의 욕망’과 ‘사랑받고자 하는 욕망’ 사이의 균형을 일괄적으로 규정할 수는 없다. 그 균형점은 각자가 처한 현실적 상황에 따라 다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직장인을 예를 들어보자. 어떤 직장인은 심하게 자기 꼴리는 데로 살다가 직장에서도 잘리고 인관관계에도 많은 문제가 생기기도 한다. 또 어떤 사람은 늘 다른 사람이 요구하고 기대하는 삶을 산 대가로 직장도 오래 다니고 원만한 인관관계를 유지한다. 우리는 이 양극단의 삶에서 각자가 처한 상황에 알맞은 균형을 잡아야 한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행복한 밥벌이는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면서, 사랑을 받을 수 있을 때 가능하다는 사실이다. 어떤 사람은 그런 삶은 애초에 불가능하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들은 사랑받는 것은 모르겠고, 밥벌이이라도 제대로 하려면 언제나 자신의 욕망을 철저히 숨기며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자기가 원하는 삶을 살면서 사랑받는 삶이 불가능할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도 않다.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으려는 유아적인 태도만 극복하면 얼마든지 가능하다. 구체적인 사례로 한 번 말해보자.


 지금 당장 서점으로 가보시라. 서점 구석 한편에는 이름도 듣지도 보지도 못한 소설책을 쓰는 작가들이 많다. 그 작가의 이름이나 책의 이름을 당장 포털 사이트에서 검색해보자. 어딘가에는 그 소설을, 그 작가를 사랑해주는 사람들이 있다. 자기가 원하는 삶을 오랜 시간 유지하면 만들어지는 게 있다. 세상 사람들은 그걸 ‘개성’, ‘독창성’ 혹은 ‘스타일’라고 말한다. 그리고 운이 좋으면 많은 사람이, 운이 없다면 안목 있는 소수의 사람이 그 개성, 스타일에 관심을 보이게 된다. 소위 말하는 팬이 생기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사랑해주는 팬 말이다. 그렇게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면서 사람들의 사랑을 받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행복한 밥벌이인 셈이다.


 노골적으로 말하자. 나는 행복한 밥벌이가 ‘자기 꼴리는 대로 살 수 있는 용기’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는 부류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할 때 행복을 느끼는 존재다. 그러니 행복한 밥벌이의 출발점은 ‘사랑받고 싶은 욕망’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아낼 용기’ 일 수밖에 없다. 나도 안다. 그런 삶이 쉽지 않다는 거. 그래서 그 자기답게 살 수 있는 용기에 ‘자기 꼴리는 대로 살 수 있는’이라는 펄떡거리는 수식어를 붙이고 싶은 게다.


그놈의 돈은 어쩔 건데?


하지만 마지막까지 하나가 걸린다. “돈? 돈은 어떻게 할 건데!”라는 질문을 우회할 수 없다. 더럽고 치사해도 말 한마디 못하며 살 수밖에 없는 이유도, 가슴속에 푸른 꿈 하나를 꺼내놓지 못하는 이유도 모두 돈이 없어서다. 최소한의 생계에 위협을 받으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 때문이다. 그래, 맞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 우리가 언제나 타인의 기대를 맞추며 살 수밖에 없는 것은 그놈의 돈 때문인 것이다. 명예나 권력은 없어도 살지만 돈이 없는 것은 정말 생존을 위협할 문제니까.


 정말 잘 알고 있다. 나 역시 돈이 없기 때문이다. 일 년에 한두 권 책을 써서 버는 인세는 기껏 해봐야 한 달 생활비면 끝이고, 강연은 언제 들어올지 모르니 불안정하기 짝이 없다. 내 경험에 비춰 봐도 자신이 꼴리는 데로 살면 생활이 곤경에 처할 수 있다. ‘자아실현의 욕망’과 ‘사랑받고자 하는 욕망’ 사이에 균형은 여기에서도 중요하다. 그림을 그리는 것으로 밥벌이를 하고 싶어 하는 직장인이 있다. 그가 당장 직장을 그만두고 그림을 그려서 밥벌이를 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힘들다. 게다가 그에게는 건사해야 할 가족까지 있다면 더욱 그럴 것이다.

  

 나는 그에게 무작정 “‘자아실현의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 직장을 때려치워!”라고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현실은 현실이니까. 하지만 현실의 벽이 높다고 해서 지금의 자리에 영원히 머물러야 하는 것은 아니다. 또 그 현실의 벽이 지금의 불행한 밥벌이에 계속 머물러도 되는 면죄부가 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당장 그림만 그리며 밥벌이를 할 수는 없다. 하지만 꿈꾸는 그 삶을 위한 변화는 당장 시작할 수 있다. 직장을 옮기던지, 아니면 그림을 그리면서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라도 찾아야 한다. 그도 안 되면 그림 그리는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최소한 칼 퇴근이라도 해야 한다. 그저 ‘현실은 그런 게 아니야’라며 주저앉아만 있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다.      

 돈, 돈, 돈 거리는 사회에서 살아오느라 쉽지 않겠지만, 돈에 너무 주눅들 필요 없다. 돈은 생계에 필요한 만큼이면 된다. 그 돈으로 버티면 된다. 언제까지? 우리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우리가 원하는 삶이 하나의 독창성, 개성, 스타일이 될 때까지. 그때가 되면 우리는 부자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생계 걱정은 하지 않으면서 우리가 원하는 일을 원하는 방식으로 하면서 밥벌이를 할 수 있게 된다. 자신이 원하는 삶을 마지막까지 밀어붙여서 그것이 하나의 독창성, 개성, 스타일로 완성되면 자연스럽게 행복한 밥벌이를 하게 된다. 정말이다. 직장을 떠나 4년 동안 글쟁이로 버티면서 알게 된 삶의 진실이니 믿어도 좋다.


자아실현의 욕망이 스타일이 될 때까지.     


우리는 대부분 지금 일자리에서 생계에 필요한 돈은 벌고 있다. 하지만 얼마 뒤 그곳에서 버려지거나 혹은 그곳을 떠나면, 다시 생계의 위협이 닥친다는 사실을 너무 잘 안다. 왜 이렇게 살게 된 걸까? 그건 우리에게 아무런 독창성, 개성 혹은 스타일이 없어서일 게다. 평범한 직장인이 직장을 떠나 지금까지 하던 일 말고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전형적인 경찰관이 경찰서를 떠나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먹고사는 일이 걱정되고 불안해, 부모·선생·사장·사회의 ‘튀지 말라!’는 말을 받아들였지만, 바로 그 때문에 우리는 다시 먹고사는 일을 걱정하고 불안해야 하는 악순환에 빠진 것이다. 우리 시대의 서글픈 역설이다.      


 이런 질문을 해보자. 세상은 어떤 사람에게 관심을 보일까? 세상 사람들과 다른 관점으로 세상을 보고, 세상 사람들과 다른 삶을 살아내는 사람에게 관심을 보인다. 그러니 우리가 돈·명예·권력을 원한다면, 우선 자아실현부터 해야 한다. 밥벌이의 측면에서도 각자의 삶을 색깔을 찾고 그것을 삶에서 관철시켜나가는 것이 훌륭한 전략 아닐까? 자신만의 색깔을 삶에서 관철시킬 때 만들어지는 독창적이고 개성 넘치는 스타일을 세상은 사랑해줄 테니까 말이다.


 각자의 개성과 스타일이 완성되면 생계 걱정은 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의구심이 든다면 생각해보자. 세상 사람들이 그리도 좋아하는 아이폰, 아이패드, 맥북은 언제나 자기 꼴리는 데로 살려고 했던 스티브 잡스라는 똘아이가 만들어낸 것 아니던가? 시, 소설, 그림 같은 예술품은 물론이고 옷, 전화기, 자동차 같은 모든 상품들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에게 사랑받을 만한 어떤 것을 만들어 냈던 사람들은 공통점이 있다. 그들은 항상 자기 꼴리는 대로 살고 싶다는 ‘자아실현의 욕망’에 정직했고, 그것을 자신의 삶에서 끝끝내 관철시켰던 부류들이다.


 자신만의 개성과 스타일이 생겼을 때 비로소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을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사랑은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돈으로 환원할 수 있다. 자본주의는 결국 사랑 역시 일정 정도 돈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는 체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자신의 욕망을 긍정하고 그것을 마지막까지 밀어붙이게 되면 결국 행복한 밥벌이를 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그랬듯 여러분도 이 사실을 믿어야 한다. 이 사실을 진심으로 믿고 한 걸음씩 실천해낸다면 행복한 밥벌이는 정말 가능, 하다.


우리 시대의 평범함은 불행의 다른 이름이다.      


노파심으로 덧붙일 말이 있다. 간혹 ‘모든 사람이 다 스티브 잡스처럼 유명해지고 부자가 될 순 없잖아. 나는 평범한 삶이 좋아’라고 강변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물론 알고 있다. 자신의 욕망을 긍정하고 마지막까지 그것을 밀어붙인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스티브 잡스처럼 유명해지고 부자가 될 수 없다는 걸. 그걸 모를 만큼 순진하지 않다. 하지만 자신만의 삶을 끈덕지게 밀어붙일 수 있다면, 아주 유명해지거나 큰 부자는 될 수 없을지라도 소박하지만 행복한 밥벌이는 하며 살 수는 있다.


 제발 평범함에 현혹되지 말자. 지금 시대의 ‘평범함’은 불행의 다른 이름이다. 이제 ‘평범한 직장인’은 여지없이 ‘불행한 직장인’이 된 것처럼 말이다. 또 흔히 말하는 ‘평범함’은 ‘불행함’을 덮기 위한 기만적인 체면술이다. 자신의 불행을 덮기 위해 “나는 평범하다, 평범하다!”라고 스스로에게 거는 체면술 말이다. 이 사실은 주위에 평범한 사람들이 넘쳐나지만, 그들 중 행복한 사람이 별로 없다는 사실을 보면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러니 이제 이렇게 생각하는 건 어떨까? 자신답게 살아내며 행복한 밥벌이를 하는 것이야 말로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지극히 평범한 일이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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