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주먹은 왜 약한가?
“샌드백, 맨주먹으로 쳐라” 어린 시절 관장이 종종 했던 말이다. 그 말이 그리도 듣기 싫었다. 맨주먹으로 샌드백을 치면 주먹이 다 까져서 하얀 핸드랩이 벌겋게 보일 만큼 피가 배어 나온다. 그뿐인가? 스파링을 할 때도, 시합을 할 때도 글러브를 끼고 싸우는데, 왜 매번 손이 다 까질 때까지 맨주먹으로 샌드백을 쳐야 하는지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맨주먹으로 샌드백을 치는 훈련을 그저 늙은 꼰대의 무식한 훈련 방법이라고 여겼다.
그 관장의 말이 다시 기억난 건 펀치력에 대한 고민 때문이었다. 강한 주먹에도 두 가지 결이 있다. 뭉툭한 주먹이 있고, 날카로운 주먹이 있다. 전자는 맞았을 때 아프긴 하지만 기세가 꺾일 만큼 위협적이지 않은 주먹이다. 후자는 맞았을 때 단순히 아프다는 느낌을 넘어 온몸이 감전되는 것 같은 충격을 주는 주먹이 있다. 자세 연습과 근력 운동을 아무리 많이 해도, 그 날카로운 주먹을 낼 수가 없었다.
도저히 답을 찾을 수 없어서 물리 법칙을 생각해 보았다. 힘은 질량과 가속도의 함수이다. 이를 복싱적으로 해석해 보면, 몸무게(질량)가 많이 나가거나 주먹을 순간적으로 빠르게(가속도) 낼 수 있으면 강한 주먹을 갖게 된다는 의미다. 이는 근력 운동을 하거나 정확한 자세를 연습하는 것으로 얻을 수 있다.
그런데 복싱에 적용할 수 있는 중요한 물리 법칙이 하나 더 있다. 충격량은 단면적에 반비례한다는 것이다. 즉 같은 운동량이더라도, 단면적이 작으면 충격량은 커진다는 것이다. 연필과 송곳을 같은 힘을 가해 나무 바닥을 눌렀을 때, 연필로는 나무 바닥을 뚫을 수 없지만 송곳으로는 뚫을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면 된다. 이를 복싱적으로 해석하면, 같은 몸무게를 가진 사람이 같은 동작으로 펀치를 내더라도 그 펀치가 마치 송곳처럼 상대에 닿은 단면적이 적으면 위력이 세진다는 의미다.
복싱을 잘하려면, 맨주먹의 감각이 필요하다.
생각이 여기까지 닿자, 어린 시절 관장의 무식한 훈련법이 생각났다. 날카로운 주먹의 비밀은 정권에 있다. 스트레이트이든, 훅이든, 어퍼컷이든, 주먹의 ‘면’이 아니라 ‘점’(정권)에 맞으면 위력이 더해진다. 감전되는 것 같은 위력적인 주먹의 비밀은 바로 여기에 있다. 체중을 실어서 만든 힘을 최소 단면적(정권)에 응집하여 때릴 수 있을 때, 송곳처럼 날카로운 주먹이 완성된다. 맨주먹으로 샌드백을 치는 것은 바로 상대를 항상 정확한 타점(정권)에 맞추는 연습인 거였다.
사실, 복싱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모든 주먹은 정권으로 쳐야 한다는 사실 즈음은 다 안다. 하지만 이것이 잘 안된다. 나도 상대도 모두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상황 속에서 매번 정확한 타점으로 상대를 가격한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스파링이나 시합을 하다 보면, 정권으로 정확히 맞추는 경우만큼 주먹의 면이나 손바닥 쪽에 맞게 되는 경우도 많다.
왜 그럴까? 복싱은 감각적인 운동이다. 평소에 정권으로 때리는 연습을 통해 주먹의 감각을 익혀놓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실전에서는 좀처럼 정확히 정권으로 상대를 가격하는 주먹이 나오지 않는다. 초심자 때부터 두꺼운 글러브를 끼고 샌드백이나 미트를 칠 경우 이 정권 감각을 익히기 어렵다. 관장의 훈련법은 옳았다. 제대로 된, 날카로운 주먹을 갖고 싶다면, 주먹이 까지더라도 맨주먹으로 샌드백을 치는 연습이 필요하다.
‘잘 산다’는 건, ‘잘 만진다’는 것이다.
제대로 된 주먹의 비밀을 알게 되었을 때, 제대로 된 삶을 생각해 보게 되었다. 삶을 잘 산다는 건 뭘까? 감각적으로 사는 것이다. 삶은 감각적인 것이다. 옳음과 그름, 좋음과 싫음이 종잡을 수 없이 흔들리는 것이 우리네 삶 아닌가? 어떨 때는 돈을 버는 일이 옳고 좋은 일처럼 여겨지지만, 또 어떤 경우에는 꿈을 좇는 일이 옳고 좋은 일처럼 여겨지는 것이 삶이다. 이처럼 삶은 링보다 더 복잡다단하고 변화무쌍하다.
이런 혼란스러운 삶을 잘 살려면 감각이 필요하다. 역동적인 움직임이 난무하는 링 위에서 어떤 순간에도 송곳처럼 날카로운 주먹을 낼 수 있는 맨주먹의 감각이 필요하듯, 삶도 그렇다. 지독히도 역동적인, 그래서 혼란스러운 삶에서 어떤 순간에도 송곳처럼 날카롭게 세상을 포착할 수 있는 맨몸의 감각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 역시 거저 되는 일이 아니다. 많은 연습이 필요하다. 삶에서도 맨주먹으로 샌드백을 때리는 연습이 필요하다.
삶의 중요한 문제인, 사랑을 생각해 보자. 무엇인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만진다는 것이다. 꽃을 사랑하는 이들은 꽃을 만지려고 하고, 개를 사랑하는 이들은 개를 만지려 하는 것처럼 말이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누군가를 만지고 싶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이제 ‘잘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도 알 수 있다. 그것은 ‘잘 만진다’는 것이다.
‘잘 만진다’는 것은 무엇일까? 복싱을 잘하려면 맨주먹으로 샌드백 때려야 봐야 하는 것처럼, 사랑을 잘하려면 맨몸으로 상대에게 가닿아 보아야 한다. 하지만 이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네 삶은 어떤가? 주먹이 까질 것이 두려워 두꺼운 글러브를 끼고 샌드백을 때리려 했던 나의 모습과 비슷하지 않을까. 상처받을 것이 두려워 맨몸으로 상대를 껴안기보다 ‘이성’이라는 두꺼운 글러브를 끼고 상대를 만지려 하지는 않았을까.
삶을 잘 살려면, 맨몸의 감각이 필요하다.
링에서 ‘잘 때린다’는 것과 삶에서 ‘잘 만진다’는 것은 같다. ‘글러브’와 ‘이성’이라는 우리의 감각을 가로막는 두꺼운 보호막을 벗고 상대에게 다가설 수 있어야 한다. 그때 비로소 복싱을 잘할 수 있는 맨주먹의 감각과 삶을 잘살 수 있는 맨몸의 감각을 익힐 수 있다.
물론 항상 ‘이성’을 내려놓고 맨몸으로 삶을 살아갈 수는 없다. 복서는 글러브를 끼고 샌드백을 쳐야 한다. 늘 맨주먹으로만 샌드백을 치는 복서는 주먹이 손상되어 복싱을 영영 할 수 없게 될지도 모르니까. 삶 역시 마찬가지다. 매번 ‘이성’을 내려놓고 상대를 사랑하려 했을 때, 너무 큰 상처를 입어서 다시는 사랑 영영 할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삶 역시 마찬가지다. 삶도 ‘이성’적으로 살아갈 필요가 있다. 하지만 주먹의 감각을 익힐 때까지 맨주먹으로 샌드백을 쳐야 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삶도 그렇다. 복잡다단하고 변화무쌍한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삶의 감각을 익힐 때까지는 맨몸으로 세상을 만져보려 애써야 한다.
인생에서 한 번쯤은 맨몸으로 세상을 만져보는 경험이 필요하다. ‘이성’적으로 조건을 보고 사랑을 시작하기보다, 먼저 심장의 끌림에 따라 사랑을 시작해 보는 경험이 필요하다. ‘이성’적으로 판단해 돈을 많이 주는 직업을 선택하기보다, 먼저 몸이 즐거운 느낌에 따라 이런저런 일을 시작해 보는 경험이 필요하다. ‘이성’적으로 생각해 효율적인 운동을 시작하기보다, 몸이 원하는 운동을 찾아보는 경험이 필요하다.
우리에게 이런 삶의 감각이 필요하다. 이런 감각이 생긴 뒤에 ‘이성’적으로 살아갈 때 비로소 진정으로 삶을 잘살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테다. 마치 주먹의 감각을 익히는 복서들이 ‘생각’하며 싸울 때 진정으로 복싱을 잘하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복싱도, 삶도 감각적인 것이다. 우리에게는 맨몸의 감각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