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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증을 치유할 묘약, 연애

나의 우울증 탈출기

우울증에 걸린 그녀

철학 수업을 하고 있다. 학문으로서의 철학보다는 생활로서의 철학을 가르치다보니, 수업 중에 개인적인 고민을 듣게 될 때가 있다. 한때 비슷한 고민을 했던 사람으로서 그네들의 고민 토로를 마다하지 않는다. 어느 여성이 내게 다가와 이야기를 시작했다.


“선생님, 전 몇 년 전부터 우울증을 앓고 있어요.”
“네. 병원 다니고 계세요?”
“아뇨. 병원 다니다 별 차이가 없어서 지금은 개인적으로 상담을 받고 있어요.”
“병원가거나 상담 받고 괜찮아 지신 것 같아요?”
“병원 다닐 때는 의사가 형식적인 질문하고 약을 처방해주곤 했는데 그때는 별다른 차이를 못 느꼈어요.”
“지금은 괜찮고요?”
“음... 상담하면서는, 일단 상담할 때만큼은 좀 괜찮아요. 저도 제 이야기를 진솔하게 하고 상담사분도 잘 들어주시거든요”
“이제 상담 그만하시고, 연애하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네?”     



 ‘연애하라’는 뜬금없는 내 처방에 그 여자는 당황해하고 있었다. 원인이 무엇이 되었든 우울증을 겪는 사람들의 공통점이 있다. 자신의 진짜 모습을 잘 내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해도 된다. 내면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어둡고 부정적인 감정과 욕망을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가 두려운 것이다. 그래서 우울증에 걸린 사람은 외롭다. 우울증이 삶을 파괴하는 이유 중 하나는 누구에게도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없어서 느끼게 되는 외로움 때문이다.


 그녀가 병원을 찾았던 이유는 자신의 내밀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였다. 진짜 자신의 모습을 내보이기 위해서. 그래서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누군가에게 이해받고 싶은 것이다. ‘당신은 이상한 사람이 아니에요’라는 말을 듣고 싶은 것이다. 누군가에게 ‘이해받고 싶다’는 말은 ‘사랑받고 싶다’는 말과 같다. 그래서 우울증은 질병이 아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든 애정결핍증세를 갖고 있으니까. 그 애정결핍이 완화되면, 그러니까 누군가로부터 사랑받게 되면 우울증도 완화된다.


 사랑받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을 내보여야 하는데, 우울증에 걸리면 그게 잘 안 된다. 우울증은 어떤 이유에서건 자신을 내보이는 것이 힘든 사람의 증상이다. 그 여성은 왜 병원에서 상담으로 치유의 수단을 바꾼 것일까? 진짜 자신의 모습을 내보이고 이해받고 싶은데, 병원은 그저 차가운 업무적 질문 몇 개를 던진 후 약을 처방해준 것이다. 그것은 그녀가 원했던 것이 아니었다. ‘당신은 이상한 사람이 아니에요’라는 대답을 원했던 곳에서 오히려 ‘당신은 약을 먹어야 할 정도로 이상한 사람이에요’라는 말만 듣고 온 셈이었다.



우울증을 치유할 묘약은 연애다.


상담을 받는 곳은 달랐다. 진심이었든 아니었든 상담사는 그녀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었다. 그저 들어주는 것만으로 훌륭한 상담이 될 때가 있다. 때로 가슴 속에 있는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하는 것만으로 상처가 치유되기도 하니까. 그런 측면에서 그 상담은 훌륭했다. 하지만 그 상담도 본질적으로 그녀의 우울증을 치유하지 못할 게다. 내 이야기를 한다는 건, 누구에게 말하지 못한 내 모습을 이해받고 싶다는 것이고, 이건 결국 본질적으로 진심 어린 사랑의 영역에서만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울증을 치유할 묘약은 연애다.


 꽤 심각한 허리 부상으로 우울증에 빠졌던 적이 있다. 그때 나를 구원해준 건 의사가 아니라 여자 친구였다. 건강했을 때는 세상에 못할 게 없다고 느꼈다. 하지만 고장 난 허리 때문에 제대로 걷을 수조차 없게 되었을 때 세상은 너무나 커보였고, 그럴수록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처럼 작아졌다. 그런 초라한 나를 누구에게 내비칠 용기가 없었다. 그렇게 우울증은 깊어갔다. 여자 친구도 만나지 않았다. 약해진 그래서 초라한 모습을 보일 용기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정직하게 말해, 그런 모습에 여자 친구마저 떠날까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2주가 넘게 연락이 되지 않는 남자 친구를 둔 여자는 남자의 집 앞으로 찾아왔다. 남자는 절뚝거리지 않으려 최대한 노력하면서 집 앞으로 나갔다. 여자 친구는 말없이 남자를 안아주었다. 그리고 아주 작게 흐느끼며 말해주었다. “괜찮아. 다 괜찮아 질 거야” 그리곤 봉투를 하나 쥐어주며 돌아갔다. 여자가 쥐어준 봉투에는 “허리 다친 데는 수영이 좋데, 오빠 운동 좋아하니까 수영하면 금방 나을 거야”라는 마지막 말이 담긴 편지와 근처 수영장 등록증이 들어있었다. 남자는 무엇이 그리 서러웠는지 참고 참았던 눈물이 터져 나와 아이처럼 울어버렸다.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은 누구에게도 내비칠 수 없는 내 모습을 누군가는 이해해준다는 확신이다. 사랑받고 있는 사람은 우울증에 걸리지 않는다. 걸렸더라도 금세 치유된다. 연애는 그런 것이고, 사랑은 그런 것이다. 내게 고민을 토로했던 그 여자가 진짜 사랑을 하고 있었다면, 병원이나 상담사를 찾지는 않았을 테다. 잔인한 이야기라 그녀에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사실 그녀는 돈을 주고 상담사와 연애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잠시라도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을 갖기 위해서. 생각해보면, 연애를 하지 않다는 것은 참 서글픈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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