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상담사·직장상사·사이비 교주보다 연인이 낫다
연애하지 못해 일어나는 일들
인간은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싶은 존재다. 인간은 끊임없이 타인의 사랑을 갈구한다. 때로 그 사랑은 관심, 인정, 칭찬이라는 형태로 모습을 바꾸기도 한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의 본질은 사랑이다. 사랑받고 싶은 것이다. 직장을 다닐 때였다. 아끼던 후배가 업무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눈치 보며 칼퇴근하는 것을 직장생활의 낙으로 삼던 후배였기에 무슨 일이 생겼다는 걸 직감했다.
후배와 소주 한잔을 하던 날, 이유를 알게 되었다. 6년 사귄 여자 친구와 헤어졌단다. “왜 그렇게 일에 빠져 있냐?”는 내 질문에 그는 “여자 친구가 생각날 틈을 주지 않기 위해서요”라고 답했다. 그건 피상적인 이유였다. 6년 동안 그 후배의 애정결핍증은 드러날 일이 없었다. 언제나 관심과 애정을 보여주던 여자 친구가 있었으니까. 그런데 이제 상황이 다르다. 자신이 충분히 사랑받고 있지 못하다는 느낌 때문에 애정결핍증세가 드러나고 있는 중이었다. 여자 친구가 주었던 사랑을 동료와 상사의 관심·인정·칭찬으로 메우고자 했던 것이다.
직장에서 동료, 상사에게 관심·인정·칭찬 받을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가? 당연히 일이다. 그래서 그는이별 후 업무에 빠져 살았던 것이다. 직장에서 노총각, 노처녀들이 업무에 목숨을 거는 경우를 보게 된다. 이 경우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남들처럼 연애하기에는 이미 나이가 너무 많아져버렸고, 결혼은 더욱 힘들어져 버렸다는 걸 직감하는 순간, 직장에 모든 것을 걸 수밖에 없다. 그 곳에서라도 사랑받을만한 존재가 되고 싶은 것이다. 인간이라면 그렇게 피할 길 없는 애정결핍을 채우고 싶은 것이다.
연애하지 못해 일어나는 일들의 결말
사이비 종교에 빠진 엄마를 원망하는 딸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사이비 종교는 어떤 사람들에게 마수를 뻗칠까? 외로운 사람들이다. 사랑받고 싶지만 누구에게도 사랑받고 있지 못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에게 사이비 종교는 구원이다. 적어도 그곳에서 만큼은 사랑받는다는 느낌을 충분히 얻을 수 있으니까. 그래서 나는 딸의 하소연보다 ‘그 엄마는 얼마나 외로운 삶을 살아내었을까?’에 더 마음이 쓰였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도 된다고, 사랑받을 수만 있으면 좋은 것 아닌가? 어차피 인간이 애정결핍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라면, 사랑을 주는 대상이 꼭 연인일 필요도 없지 않은가? 어차피 연애도 끝나게 마련이고, 사랑이 끝나면 또 힘든 시간이 도사리고 있을 테니까. 그러니 사랑을 주는 대상이 의사면 어떻고, 상담사면 어떻고, 직장 상사면 어떤가? 심지어 사이비 교주면 또 어떤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을까? 사이비 종교에 빠진 사람은 정작 얼마나 행복한지. 힘든 건, 주변에 있는 사람이다.
그렇다고 해도 의사, 상담사, 상사, 사이비 교주에게 사랑받는 것을 추천하고 싶지 않다. 연인에게 사랑받는 것이 훨씬 낫기 때문이다. 왜 그런가?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의사·상담사·직장 상사·사이비 교주가 주는 사랑은 진짜 사랑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랑을 하면 관심·인정·칭찬을 받을 수 있지만, 관심·인정·칭찬을 받는다고 해서 그것이 사랑인 것은 아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 관심·인정·칭찬을 줄 수 있다. 물론 그런 관심·인정·칭찬을 전부 거짓이라고 치부할 순 없겠지만, 분명한 건 그 관심·인정·칭찬은 특정한 이해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제스처일 뿐이란 것이다.
이해관계로 파생된 관심·인정·칭찬에서 사랑이 주는 황홀한 감정을 잠시 느낄 수도 있겠지만, 오래가지 못한다. 오래가지 못할 뿐만 아니라 더 큰 허무감과 공허감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다. 직장에서 아무리 인정받고 칭찬받는 사람일지라도 언젠가는 알게 된다. 직장에서의 관계가 얼마나 허무하고 공허한 것인지. 사실 이미 다 알고 있지 않을까? 이해관계로 점철된 관계는 그 관계가 얼마나 친밀 하느냐와 별개로 결국 서로를 더 외롭게 만든다는 사실을. 그래서 사랑받고 싶다면, 의사·상담사·직장상사·사이비 교주보다 연인이 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