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살이의 가장 큰 괴로움, 인간관계
“온 세계가 불타는 집火宅이요, 삶은 고통의 바다苦海다.” 불교는 세계와 삶에 대해 이렇게 진단한다. 이는 결코 과장된 부정적 전망이 아니다. 세상살이는 그만큼이나 괴롭다. 살아가며 우리가 느끼게 되는 괴로움의 종류는 수도 없이 많다. 그 괴로움 중 단연 깊고 큰 괴로움이 있다. ‘관계’의 괴로움이다. 즉, 타인과 함께 살아가야 하기에 겪을 수밖에 없는 마찰과 갈등이 가장 큰 괴로움이다.
직장이 이를 잘 보여주지 않는가? 직장에는 많은 괴로움이 있다. 많은 업무, 낮은 급여, 점점 지루해지는 삶 등등. 하지만 그 모든 괴로움들은 직장 내의 인간관계 때문에 겪는 괴로움에 비하면 그리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사장‧상사와 관계가 안 좋거나, 동료와 갈등을 겪거나 혹은 직장 내 왕따를 당할 때의 고통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알길 이 없다. 그만큼이나 인간관계에서 오는 괴로움은 깊고 크다.
인간이 피할 수 없는 괴로움, 관계의 고통
모든 관계는 고통을 수반한다. 비단 직장만 그런가? 친구모임도, 동호회도, 가족도 마찬가지다. 특정한 이해관계를 벗어난 친구 사이지만 우리는 때로 그 관계에서 괴로움을 느낀다. 심지어 좋아하는 일을 함께 즐기기 위해 모인 동호회, 더 나아가 혈육으로 이어진 가족 관계에서조차 우리는 때로 마찰과 갈등으로 인한 괴로움을 느끼게 되지 않던가. 이는 모두 누군가와 함께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발생한 괴로움이다.
이 관계의 괴로움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모든 관계를 끊고 어두컴컴한 방안에 홀로 사는 외톨이가 되어야만 하는 걸까? 타인과 함께 살아가면서 조금 덜 아파하고 조금 더 기쁠 수는 없는 걸까? 관계 때문에 고통받고 있는 이들에게 중요한 문제가 있다. 어떻게 함께 살아야 기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구해보자.
아리스토텔레스 ‘폴리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제자였다. 그는 생물학, 윤리학, 물리학, 형이상학뿐만 아니라 정치politics학까지 능통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함께 사는 법에 대해 깊이 고민한 철학자 중 한 명이다. 그에게 ‘어떻게 함께 살아야 기쁠 수 있을까?’라고 묻는다면 어떤 답을 해줄까? 아리스토텔레스라면 ‘폴리스polis’에서 살아가야 한다고 답해줄 테다. 이 ‘폴리스polis’는 무엇일까?
폴리스는 일종의 공동체이며, 모든 공동체는 어떤 좋음을 실현하기 위해 구성된다. 『정치학』 아리스토텔레스
그리스어 ‘폴리스polis’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 사는 공동체를 의미한다. 고대 그리스에는 지금과 같은 거대한 국가는 없고, 작은 도시국가들이 모여 있었다. 높은 곳에 올라서면 멀리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작은 도시국가 공동체를 ‘폴리스’라고 했다. “폴리스는 어떤 좋음을 실현하기 위해 구성된다.”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인간은 ‘폴리스’ 덕분에 먹고 사는 문제뿐만 아니라 더 좋은 삶을 영위할 수 있다고 보았다. 더 나아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라는 동물 자체가 바로 이 ‘폴리스’를 구성하려는 존재라고 본다.
폴리스는 자연의 산물이며, 인간은 본성적으로 폴리스적 동물zόion politikon이다. 『정치학』 아리스토텔레스
‘폴리스polis’라는 단어에서 ‘정치적politics’이라는 의미가 파생되었다. 우리가 너무 잘 알고 있는 “인간은 사회(정치)적 동물이다”라는 구절은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이 말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니 이는 엄밀 말해, “인간은 공동체적 동물이다”라고 번역해야 옳다.") 인간이 ‘폴리스’, 즉 공동체를 구성하려는 존재라면, 이는 인간이 타인과 함께 살아가려는 ‘정치적‧사회적’ 존재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 이 ‘폴리스’에서 살아갈 때만 타인과 함께 살아가며 기쁨을 누릴 수 있다고 말한다. 이 ‘폴리스’에 대해 조금 더 구체적으로 알아보자.
아리스토텔레스 ‘아리스토크라시aristocracy’
아리스토텔레스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폴리스는 ‘아리스토크라시aristocracy’를 따르는 공동체다. ‘아리스토크라시’는 무엇일까? 이는 흔히 ‘귀족정치(지배)’로 번역되곤 하는데 이는 정확한 번역이 아니다. ‘아리스토크라시’는 고대 그리스어 ‘aristo’(최선最善)와 ‘cracy’(지배‧규칙)가 합쳐진 단어다. 즉, 이는 최고最로 선善한(훌륭한) 사람에 의해 공동체가 운영되는 체제를 뜻한다. (현대에 와서는 이는 ‘엘리트 정치’라는 의미로 쓰인다)
‘아리스토크라시’가 ‘귀족(엘리트)정치’로 번역된 이유 역시 이제 알 수 있다. 고대 그리스에서 가장 잘 교육받은 엘리트 계층인 귀족이 가장 선하다(훌륭하다)고도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크라시’는 잘 교육받아 가장 선하며 훌륭한(고결한) 사람이 지배하는 체제다. 그러니 이를 굳이 번역을 하자면, ‘최선자最善者 정치’가 그 원뜻을 잘 반영하는 번역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은 그의 스승인 플라톤의 영향 아래 있다.
누가 ‘다스리고’ 누가 ‘다스림을 받을’ 것인가? … 통치자들은 … 그들 중에서도 ‘가장 훌륭한 사람最善者·hoi aristoi들’이어야만 한다. 『국가』 플라톤
플라톤에 따르면, 이상적인 폴리스(공동체)는 ‘철인哲人정치’로 가능하다. 이는 다수의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는 ‘철인’이 이끌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기쁘게 함께 모여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철인’이란 폭정을 일삼는 나쁜 권력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철인哲人’은 지혜로운 철학자哲學者를 의미한다. 즉, ‘철인’은 학문과 지혜를 사랑해서 끊임없는 배움과 성찰을 통해 최고의 이데아인 ‘선의 이데아’에 도달한 사람이다. 기본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아리스토크라시’는 이런 플라톤의 관점을 이어받고 있다.
‘철인’이 지배하면 기쁘게 함께 살 수 있을까?
‘아리스토크라시’에 따르면 우리는 기쁘게 함께 살아갈 수 있을까? 이를 우리 시대의 이야기로 바꿔 말해보자. 즉, 선하고 훌륭하며 지혜로운 동호회장‧아버지‧사장(상사)‧대통령을 만나면 동호회‧가정‧직장‧국가 안의 다양한 인간관계에서 발생하는 괴로움이 모두 사라질까? 우리의 희망과 달리,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아리스토크라시’를 실현할 ‘철인’이 있다고 해도, 그것이 타인과 기쁘게 함께 살아갈 수 있는 필요충분조건은 아니다.
왜 그런가? 우리네 인간관계의 고통은 ‘지배자(아버지‧사장‧대통령)-피지배자(자녀‧직원‧국민)’ 사이에서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철인’이 있다면 그 철인(지배자)과 그 철인이 지배하는 사람(피지배자)들 사이의 관계는 좋을 수 있다. 하지만 관계의 진짜 괴로움은 ‘피지배자-피지배자’ 사이의 마찰과 갈등에서 온다.
‘연산군’(폭군)보다 ‘세종대왕’(성군)이 지배할 때 관리와 백성이 더 살기 좋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세종대왕’의 시절이라도 해서 관리-관리, 혹은 백성-백성 사이의 마찰과 갈등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당연하지 않은가? ‘지배(왕)-피지배(관리‧백성)’의 논리가 남아 있다면, 피지배자 사이에서 다시 피지배자가 되지 않기 위한, 혹은 작은 지배자가 되기 위한 마찰과 갈등은 불가피할 테니까 말이다. 이것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한계다.
‘지배자가 누구냐?’가 아니라 ‘지배-피지배’의 구조 자체가 문제다.
인간사에서 아주 오래된 편견이 있다. 그것은 바로 공동체가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결합이라고 보는 관점이다. 이러한 편견은 어디서 온 것일까?
가장 단순하고 자연적인 공동체는 … 자기보존을 위한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결합이다. … 한 사람, 소수자 또는 다수자가 공동의 이익을 위하여 통치하는 정부는 올바른 정부다. 『정치학』 아리스토텔레스
아리스토텔레스는 폴리스뿐만 아니라 모든 공동체가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결합이라고 본다. 그에게 올바른 정부는 “공동의 이익을 위하여 통치하는 정부”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공동의 이익’이 아니라 ‘통치’(지배)다. 그에게 ‘공동의 이익’은 ‘통치(지배)’의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플라톤도 아리스토텔레스도 누가 지배할 것인지를 문제 삼을 뿐, 지배하고 지배받는 체제 그 자체는 결코 문제 삼지 않는다.
‘지배자-피지배자’ 구조 그 자체가 근본적인 문제다. 함께 살아가는 것이 괴로움인 근본적인 이유는 ‘지배자-피지배자’ 구조 그 자체 때문이다. 가정, 학교, 동호회, 직장 등등 인간관계의 마찰과 갈등은 어디서 오는가? 두려움과 야심에서 온다. 무시당하고 비난받는 ‘피지배자’가 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과 타인을 자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지배자’가 되고 싶다는 야심. 인간관계의 마찰과 갈등의 대부분은 그 두려움과 야심에서 기인한다. 누군가는 지배하고 누군가는 지배당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고 여길 때 관계의 고통에서 벗어날 길은 요원하다.
무력한 권력자, 힘없는 우두머리, 추장!
‘어떻게 함께 살아야 기쁠 수 있을까?’ 이 질문은 이제 이렇게 바꿔야 한다. ‘어떻게 지배-피지배의 이분법을 넘어설 것인가?’ 여기에는 두 가지 대안이 있다. 가장 쉬운 답은 지배(권력)자를 제거하는 방법일 것이다. 하지만 이는 유효한 방법이 아니다. 역사는 이 쉬운 방법이 얼마나 많은 실패를 거듭했는지 여실히 증명하고 있다. 지배자를 제거하려는 수많은 혁명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지배자는 존재하고 있지 않은가?
노예제의 ‘주인’, 봉건제의 ‘영주’, 군주제의 ‘왕’, 공화제의 ‘당선자’, 공산제의 ‘당’, 자본제의 ‘자본가’로 형식만 달리할 뿐 지배자가 제거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어쩌면, 지배자를 찾으려는 마음은 인간의 본성인지도 모르겠다. ‘지배-피지배’의 논리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역사 이면의 역사로 눈을 돌릴 수밖에 없다.
여기서 인디언 사회를 온몸으로 겪으며 함께 사는 법에 관해 연구한 정치 인류학자 ‘피에르 클라스트르’의 도움을 받을 필요가 있다. 그의 연구에 따르면, 인디언 사회는 지배자가 없는 사회가 아니다. 하지만 그네들은 구성원들끼리 함께 어울리며 기쁘게 살아갔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비밀의 열쇠는 원주민 사회의 지배자라 할 수 있는 ‘추장’에게 있다. 클라스트르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자.
추장은 자기의 재화에 대해 집착해서는 안 된다. ‘피지배자’들의 끊임없는 요구를 거절할 수 없다. 거절하는 것은 곧 스스로를 부정하는 것과 같다. … 추장은 형을 언도하는 재판관이라기보다 타협점을 찾는 중재자이다.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 피에르 클라스트르
‘무력한 지배자’를 위하여!
추장은 지배자이지만 무력한 지배자다. 추장은 명예나 권위만 있을 뿐, 부족원들에게 어떤 일을 강제할 아무런 힘이 없다. 오히려 피지배자(부족원)들이 재화를 요구하면 거절할 수 없다. 만약 거절하면 그것은 스스로 추장이기를 포기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인디언 사회는 피지배자들이 요구하고, 지배자가 그 요구에 부응(복종!)해야 하는 체제인 셈이다. 남미 어느 인디언 부족의 추장은 피지배자들의 반복되는 요구에 지쳐 화가나 이렇게 말했을 정도다.
전부 바닥났어! 더 이상 줄 것이 없어! 누구든 나 대신 추장을 해봐라!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 피에르 클라스트르
추장은 일종의 명예직인 셈이다. 즉 아무런 힘(권력)이 없기에 부족원들에게 어떤 명령도 내릴 수가 없다. 그래서 그는 피지배자들에게 판결을 내리는 재판관이 아니라 피지배자들 사이에 분쟁이 있을 때 타협점을 찾는 중재자에 가깝다. 인디언 사회의 추장제는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어쩌면 인간 사회에서 지배자(권력자‧대표자)는 불가피한 것인지도 모른다. 다양한 이들이 함께 살아가려면 누군가는 반드시 각자의 이해관계를 조정해야 하니까 말이다.
만약 이것이 인간이라는 존재가 벗어날 수 없는 조건이라면, ‘지배자-피지배자’의 논리를 넘어서는 방법은 ‘추장’, 즉 ‘무력한 지배자’를 만드는 방법뿐이다. ‘무력한 지배자’가 가능하다면, 함께 살아가며 겪을 수밖에 없는 마찰과 갈등은 상당 부분 사라지게 된다. 관계의 마찰과 갈등은 ‘피지배자’가 되지 않기 위한, ‘지배자’가 되기 위한 모종의 다툼에서 온다.
이런 다툼은 왜 발생할까?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위상의 격차 때문이다. 쉽게 말해, 지배자는 뭐든 제 멋대로 요구할 수 있는 사람이고, 피지배자는 눈치 보며 복종해야만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All(전부) or Nothing(전무)의 싸움에서 어찌 사람들이 다투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인디언 사회의 추장처럼, ‘무력한 지배자’가 있다면 어떨까? 즉 ‘무력한 지배자-요구하는 피지배자’로 공동체가 구성된다면 어떨까?
사람들은 피지배자가 될까 봐 두려워하지도 않을 테고, 지배자가 되려는 야심도 크지 않을 테다. 추장과 부족원들 사이의 권익의 격차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둘 다 나름의 장단점이 있으니까 말이다. 그런 공동체를 구성할 수 있다면, 우리는 서로에게 조금 덜 상처 주며 조금 더 기쁘게 함께 살아갈 수 있다. 긴 시간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이어진 ‘문명의 역사’를 바깥을 탐구해야 할 시간이라는 의미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