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역사 속 아리스토텔레스 I>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두 가지 개념이 있다. ‘가능태dynamis’와 ‘현실태energeia’다. ‘가능태’는 가능성‧능력dynamic이고, ‘현실태’는 그 가능성 혹은 능력이 현실화되어 특정한 활동성energy을 갖도록 만드는 원리(본질)라고 말할 수 있다. 이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말한다.


현실태란 사람들이 가능적으로 있다고 말하는 것(가능태)이 아니라, 사물이 현실 상태에서 존재한다는 사실 안에 있는 것이다. 『형이상학』 아리스토텔레스

갓난아이가 농구선수가 되는 과정을 생각해 보자. 이 갓난아이의 뼈와 살이 (그 아이가 농구선수가 될) ‘가능태’다. 그리고 그 ‘가능태’를 통해 농구선수가 되도록 만드는 본질(원리)이 ‘현실태’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그 아이의 뼈와 살(가능태)은 농구선수가 될 가능성dynamic일 뿐이고, 그 가능성을 활동성energy 가진 농구선수로 만드는 것은 농구선수가 될 수 있는 본질(원리)인 ‘현실태’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능태’는 ‘질료’이고 ‘현실태’는 ‘형상’(이데아)이다. 바로 여기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차이점이 드러난다. 플라톤의 ‘형상’(이데아)과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이데아)은 다르다. 그 차이는 다음 질문으로 명확하게 드러난다. ‘형상은 어디에 있는가?’ 플라톤의 ‘형상’은 세상 너머에 있다. ‘그 아이는 왜 농구선수가 되었습니까?’ 이 질문에 플라톤은 세상 너머에 있는 ‘이데아’의 세계에 있는 ‘형상(본질‧원리)’을 따랐기 때문이라고 답할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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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답은 다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 즉 ‘현실태’는 세상 너머에 있는 것이 아니다. 말 그대로 ‘현실’에 있다. ‘현실태’는 “사물이 현실 상태에서 존재한다는 사실 안에” 있다. 즉 그 아이가 농구선수가 된 이유는 그 아이 안에 있는 ‘형상’(본질‧원리)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은 개체들이 갖고 있는 ‘질료’들의 조직원리라고 말할 수 있다. 씨앗이 꽃이 되는 이유는 씨앗 안에 꽃의 ‘형상’이 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즉 그 씨앗 안의 ‘형상’(본질‧원리)이 ‘질료’(물‧토양‧햇볕)들을 꽃으로 조직해 낸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분명 플라톤보다 건강하다. 플라톤을 따르면 우리는 우울해진다.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될지는 세상 너머에 있는 ‘형상’(본질‧원리, 즉 신!)에 달려 있으니까. 우리는 그저 ‘이데아’(형상)의 그림자일 뿐이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다르다.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될지는 우리 안에 있는 ‘형상’(본질‧원리)에 달려 있다. 플라톤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이 우리 자신을 조금 더 긍정하게 만든다. 이처럼, 둘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하지만 그 결정적 차이보다 더 중요한 사실이 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모두 ‘형상(본질)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견해에서 한 걸음도 벗어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즉 어떤 개체이든 미리 정해진 ‘형상’(본질‧원리)을 벗어날 수 없다는 인식은 둘 모두 마찬가지다. 둘의 차이는 그 ‘형상’이 우리 외부에 있느냐 우리 내부에 있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어느 아이가 농구선수가 된 이유가 외부 ‘형상’을 따랐기 때문인지 내부의 ‘형상’을 따랐기 때문인지는 (철학사적으로는 매우 중요하겠지만) 우리에게 전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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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어떻게 되었건 그 아이는 농구가 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이다. 결국 플라톤이든 아리스토텔레스이건 끝내는 우리를 수동적인 삶으로 내몰아 우울하게 만들 뿐이다. 결국 그 아이는 농구선수가 될 ‘형상’(본질‧원리)에서 벗어날 수 없으니까. 니체는 이런 관점이 삶의 진실을 왜곡하는 것이라 단호하게 말한다.


그 자체는 무의미하다. : ‘인식 그 자체’가 있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본질 그 자체’도 없다. 관계들이 비로소 본질을 구성하는 것이다. 『유고 : 1883년~1889년 1월』 니체


‘그 자체’는 사물의 본질이자 원리를 의미하는 ‘형상’이다. 즉 니체는 ‘형상’(본질‧원리)은 무의미하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본질 그 자체’는 없기 때문이다. ‘본질 그 자체’가 무엇인가? 결코 변하지 않는 고정적인 본질이다. 그런 것은 없다. 외부이든 내부이든 그런 ‘형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여기서 니체는 ‘본질 그 자체’는 없지만, 본질은 있다고 말한다. 그 본질을 구성하는 것은 바로 관계들이다. 개체의 ‘형상’, 즉 본질은 결코 특정 대상이 어떤 관계들 아래 있느냐에 따라 다르게 구성된다.


아이의 살과 뼈(큰 키‧운동능력‧영리함‧교감능력)가 농구와 관계 맺을 때 농구선수의 ‘형상’(본질)으로 보이는 것일 뿐이다. 아이의 어떤 관계(배구‧축구‧음악‧영화‧철학)들 속에 있느냐에 따라, 그 아이에게서 배구선수, 축구선수, 음악가, 영화감독, 철학자의 ‘형상’(본질)을 보게 될 것이다.


세상 너머에도, 세상 안에도 우리를 미리 규정하는 ‘형상’(본질‧원리) 같은 것은 없다. 우리에게는 우연적인 마주침만이 있을 뿐이다. 그 우연한 마주침으로 인해 더 해진 하나의 항(친구‧선생‧책‧영화‧연애‧여행…)이 모든 것을 바꿀 수 있다. 진정으로 유쾌하고 기쁜 삶을 원한다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훌쩍 넘어 니체의 세계로 나아가야 한다.

수,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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