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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역사 속 디오게네스>

디오게네스는 개처럼 살았지만, 개처럼 죽은 것은 아니다. 디오게네스를 따르며 ‘시니시즘’을 표방했던 일군의 철학자들을 ‘키니코스’kynikos(견유)학파라고 한다. ‘견유’는 ‘개犬 같은 선비(학자)儒’라는 뜻이다. 이는 시니시즘의 ‘시닉’cynic의 어원이 고대 그리스어 ‘키니코스kynikos’(개와 같은)이기 때문이다. 개처럼 살았던 철학자 디오게네스의 사상이 시니시즘이었으니, 이를 ‘견유’(개 같은 선비)로 번역한 것은 동양과 서양의 문화 차이를 절묘하게 이은 번역인 셈이다.


‘견유학파’를 통해 디오게네스의 ‘시니시즘’은 후대로 이어지게 된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시니시즘cynicism’은 치명적 오해를 받게 된다. 그 오해는 바로 ‘냉소주의’이다. ‘시니시즘’은 쌀쌀맞은 시선이나 비웃음을 의미하는 부정적 의미의 ‘냉소주의’라는 오해를 받게 되었다. 흔히, ‘냉소주의’를 ‘cynicism’이라고 번역하는 데, 이는 잘못된 번역이다. ‘냉소주의’는 모든 지식을 ‘시니컬cynical’하게 대하는 일종의 회의주의적 관점을 취하게 된다. 이는 “세상에 확실한 지식은 없으니 공부할 필요 없어”라고 말하는 게으른 헛똑똑이들의 태도라고 생각하면 된다. 디오게네스는 이런 ‘냉소주의’를 말한 적이 없다.


디오게네스는 오늘날 말하는 냉소주의를 결코 가르치지 않았으며 정반대 학설을 설파했다. 그는 ‘지혜’를 성취하려는 열정으로 불탔으며, 지혜에 비하면 현세의 좋다는 것들은 가치 없다고 주장했다. 『러셀의 서양 철학사』 버드런트 러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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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오게네스는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지혜를 알기 위해 애를 썼던 철학자이다. 그러니 그의 ‘시니시즘’을 냉소주의나 회의주의 관점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더 나아가 ‘무엇인가를 알려고 하는 노력 자체가 의미 없다’는 식의 태도를 정당화하는 데 사용하는 것은 전혀 ‘디오게네스’적이지 않다. 디오게네스는 많은 오해를 받는 철학자다. 아니, 오해는 고사하고 기억조차 되지 않는 철학자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은 알아도, 디오게네스가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은 너무 흔하지 않은가.


그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은 ‘아카데미’의 주류 철학자의 상징이었고, 디오게네스는 ‘길거리’의 비주류 철학자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주류 철학과 비주류 철학을 갈랐던 걸까? 단순히 ‘아카데미’와 ‘길거리’라는 공간의 차이였을까? 그것은 너무 피상적인 답이다. 근본적 차이는 ‘인정욕구’에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 때문에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은 기억되고, 디오게네스는 잊혔던 것 아닐까?


소크라테스는 내란죄 명목으로 감옥에 갇혔을 때,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스스로 독배를 마시고 생을 마감했다. 물론 이는 위대하고 고결했던 한 철학자가 삶의 마지막조차 자신의 철학으로 관철했던 것일 테다. 하지만 정말 그뿐이었을까? 악법조차도 지키며 생을 마감했던 소크라테스의 마음 깊은 곳에서는 어떤 경우에도 법을 지키기를 바라는 대중의 욕망에 영합하려는 마음이 있었던 것 아닐까? 이에 대해 니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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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군중 법률에 순종했다. 군중을 무시하기보다는 독을 마셨다. 디오게네스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전통과 인습을 경멸하고 조롱했다! 『니체 자서전 : 나의 여동생과 나』 프리드리히 니체


니체는 소크라테스의 선택이 군중을 무시하지 못해, 즉, 그들에게 인정받기 위한 선택이었다고 진단하고 있다. 언제나 군중은 그런 극적인 삶을 기억하게 마련이니까. 하지만 디오게네스였다면 그 독배를 마시지 않았을 테다. 그는 권력자든, 군중이든, 그 누구의 인정도 필요하지 않았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에 누구보다 디오게네스를 잘 이해했던 니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 디오게네스여, 당신은 저 소크라테스라는 언어 행상꾼이 판매하는 언어들의 내실 없는 공허함을 어찌 그리도 잘 알았는가! 『니체 자서전 : 나의 여동생과 나』 프리드리히 니체


두 가지 철학이 있다. 기억(기록)되는 철학과 기억(기록)되지 않는 철학.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기억되는 철학의 상징이라면, 디오게네스는 기억되지 않는 철학의 상징이다. 그런 측면에서 소크라테스‧플라톤만큼 디오게네스도 중요하다. 반쪽짜리 철학으로 우리네 삶을 살아가기에는 역부족일 테니까. 플라톤이 디오게네스를 ‘미친 소크라테스’라고 했다면, 누군가는 소크라테스를 ‘인정욕구를 벗어나지 못한 디오게네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닐까? 그것이 진정한 철학적 자세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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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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