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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역사 속 플라톤 II>


플라톤 철학의 중심에는 ‘이데아’가 있다. 플라톤에 따르면, 세상 만물에는 저마다의 이데아가 있다. 현실에는 책상‧꽃‧새‧인간‧사랑이 있다면, 세상 너머에 있는 이데아(형상)의 세계에는 책상‧꽃‧새‧인간‧사랑 각각에 해당하는 ‘이데아’가 있다. 플라톤은 이런 개별적인 이데아들을 모두 아우르는 이데아 중의 이데아가 있다고 말한다. 이를 ‘좋음善,to agathon의 이데아’라고 한다. 이에 대해 플라톤은 이렇게 말한다.


인식할 수 있는 영역에 있어서 최종적으로 그리고 각고 끝에 보게 되는 것이 ‘좋음to agathon의 이데아’이네. … 이것이 모든 것에 있어서 모든 옳고 아름다운(훌륭한) 것의 원인이라고, … 또 장차 사적으로나 공적으로나 슬기롭게 행하고자 하는 자는 이 이데아를 보아야만 한다고 결론을 내려야만 하네. 『국가』 플라톤


‘좋음의 이데아’는 궁극의 이데아다. 그래서 “인식할 수 있는 최종적”인 것이고, “각고 끝에 보게 되는 것”이다. 플라톤은 이것이 모든 “아름다운(훌륭한) 것의 원인”이라고 말한다.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과 사랑이 있다. 이때 가장 아름답고 훌륭한 사람 ‘a’와 사랑 ‘α’이 있다고 해보자. 이때 그 ‘a’와 ‘α’은 왜 가장 아름답고 훌륭한 것이 되었을까? ‘a’와 ‘α’는 ‘사람의 이데아’와 ‘사랑의 이데아’라는 개별적 ‘이데아’를 넘어 그 모든 ‘이데아’가 수렴되는 궁극의 이데아, 즉 ‘좋음의 이데아’를 원인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우리가 가장 아름답고 참되다고 느끼는 것은 모두 ‘좋음의 이데아’에서 왔다는 것이다. 이를 도식화하면, 가장 상단에 ‘좋은 이데아’가 있고, 이 ‘좋음의 이데아’를 나누어 갖는 개별적(사람·사랑·꽃·나무…) ‘이데아’가 있고, 그 ‘이데아’를 현실적인 존재(사람·사랑·꽃·나무…)가 나누어 갖게 되는 모습이다. 이때 가장 아름답고 참된 현실적 존재(사람·사랑·꽃·나무…)는 궁극적인 이데아, 즉 ‘좋음의 이데아’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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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좋음의 이데아’가 함의하는 바는 무엇인가? ‘좋음의 이데아’에서 ‘좋음to agathon’은 ‘선善(착함)’이다. 이는 플라톤이 ‘진眞’(참됨), ‘선善’(착함), ‘미美’(아름다움)라는 세 가지 가치를 ‘선’ 중심으로 통일했음을 의미한다. 플라톤에 따르면, ‘참된 것’(진)과 ‘아름다운 것’(미)과 ‘착한 것’(선)은 모두 같은 것이고, 이 세 가지의 중심에 착함(선)이 있다. 쉽게 말해, 선한 것이 아름답고 참된 것이라는 의미다.


아주 ‘선善’한 사람을 만났다고 해보자. 즉 타인에게 해로운 말이나 행동은 전혀 하지 않고 항상 타인에 대한 배려가 몸에 밴 사람을 만났다고 해보자. 그때 그가 ‘참된(진실된)眞’ 사람인 동시에 ‘아름다운美’ 사람처럼 보인다면, 우리 역시 플라톤적 가치 체계로 세계를 보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플라톤적 가치 체계는 1700년대에 이르러 칸트에 의해 해체되게 된다.


만약 누군가 자신의 취향이 뭔가 특별하다고 자부하는 사람이 그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이 대상(건물, 옷, 협주곡, 시)은 나에게 아름답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우스운 일이다. … 그는 단지 자기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대신해서 판단하고, 아름다움에 대해서 그것이 마치 사물의 속성인 것처럼 말하는 것이다. 『판단력 비판』 임마누엘 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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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이 ‘격식에 맞춰 입은 정장은 아름답다’고 판단했다고 해보자. 이때 그 사람은 그 정장의 아름다움이 자신뿐만 아니라 모든 타인에게도 적용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는 흔한 일이다. 자신에게 아름답게 보이는 것이 타인에게도 그렇게 보일 것이라 믿는 일은 얼마나 흔히 벌어지는가. 하지만 이는 칸트의 말처럼,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그것은 정장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그것이 마치 사물의 속성인 것처럼 말하는 것”이니까 말이다. 칸트는 “모든 사람은 각자의 고유한 취향을 갖고 있다”고 말하며 아름다움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취향은 어떤 대상이나 표상 방식을 일체의 관심 없이 만족이나 불만족에 의해 판단하는 능력이다. 그러한 만족의 대상은 아름답다고 일컫는다. 『판단력 비판』 임마누엘 칸트


칸트에 따르면 취향(미-추의 구분)은 어떤 대상 자체와 아무 상관이 없다. 그것은 개인의 만족(쾌적함)과 불만(불쾌함)에 의해 판단된다.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어떤 대상에 대해 느끼는 만족(쾌적함)이다. 철학사에서 칸트의 위대한 업적은 바로 여기에 있다. 칸트는 플라톤 이래, ‘선善’ 중심으로 통합되어 있던 ‘진眞-선善-미美’ 삼위일체 체계를 해체했다. ‘참됨-선함-아름다움’이 서로 독립된 가치라는 사실을 입증했다. 칸트 이래로 ‘미’는 개인의 만족과 불만족의 의해 판단되는 것이지, ‘진(참됨)’과 ‘선’(착함)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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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칸트 이후 200년이 흘렀지만 우리는 여전히 플라톤의 자장에서 온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쓰레기를 줍거나 노약자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선’한 사람이 참(진실)되고 아름다워(만족‧쾌적)보이지 않는가. 반대로, 아무 데서나 방귀를 뀌고 욕설을 해대는 ‘선’하지 못한 이들은 참(진실)되지 않고 추해 보이지(불만족‧불쾌함) 않는가? 하지만 삶의 진실은 이와 다를 수 있다. 노약자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선한 이가 위선과 거짓말을 일삼을 수 있으며, 누군가에게는 전혀 아름다워 보이지 않을 수 있다. 마찬가지로 방귀를 뀌고 욕설을 내뱉는 이가 참(진실)되게 사람을 대하며, 누군가에게 아름다워 보일 수 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선(착함)은 우리가 결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선善(착함)은 사회가 결정한다. 바로 여기에 플라톤의 위험성이 있다. 플라톤의 가치 체계를 따를 때, 아름다움美과 참됨眞을 느끼는 감성마저 우리의 주체적 결정에서 벗어나게 된다. 이는 얼마나 우울한 일인가? 사회가 지정한 ‘선’(착함)에 의해 우리의 ‘미’(아름다움)적 감수성과 진실에 관한 감수성마저 강제되는 것이니까 말이다. 칸트가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가? 칸트 덕분에 적어도 사회로부터 아름다움과 참됨의 가치는 지켜낼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사회가 어떤 사람을 ‘선’한 사람으로, 어떤 사랑을 ‘선’한 사랑으로 지정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어떤 사람과 사랑을 진실 된 것으로 또 아름다운 것으로 느끼는지는 오롯이 우리의 것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오직 ‘나’이기에 아름답고 진실되게 보이는 ‘너’와 오직 ‘우리’이기에 아름답고 진실 된 사랑을 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진정한 ‘선’에 이르게 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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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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