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은 서양철학뿐만 아니라 우리네 일상에도 여전히 크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사랑에 관한 생각이다. 흔히, 사랑을 두 가지로 나눈다. 육체적인 사랑과 정신적인 사랑. 여기서 후자의 사랑을 ‘플라토닉platonic’ 사랑이라고 한다. 이 ‘플라토닉’ 사랑은 플라톤의 사랑이라는 의미다. 이는 플라톤이 신체보다 정신(이데아)의 중요성을 더 강조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우리 역시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육체적인 사랑보다 플라토닉(정신적인) 사랑이 더 훌륭하고 고결하다는 인식이 있다는 사실이다. 연인과 함께 음악을 듣고 편지를 주고받고 대화를 나누는 것은 쉽게 이야기하지만, 어젯밤 연인과 뜨거운 섹스를 나누며 몇 차례나 황홀경에 빠졌던 것에 대해서는 쉽게 이야기하지 못한다.
진보적인 사람이건, 보수적인 사람이건, 정신적인 사랑이 육체적인 사랑보다 더 수준 높은 사랑이라는 인식을 어느 정도 공유하고 있다. '플라토닉 사랑=수준 높은 사랑'이라는 도식은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어느 정도의 보편성을 확보하고 있다. 이런 사랑에 관한 인식은 플라톤이 남긴 영향이다. 이에 대해 플라톤은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의 영혼은 육체를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다. 『파이돈』 플라톤
플라톤은 지혜로운 자는 영혼(정신)을 중히 여기고 육체를 하찮게 여긴다고 말한다. 이런 인식은 플라톤에게는 당연한 귀결이다. 플라톤에게 지혜로움(진리를 보는 것)은 육체를 벗어나 영혼만이 도달할 수 있는 ‘이데아’의 세계로 돌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플라톤에게 육체는 (진리를 볼 수 없게 만드는) 감옥 같은 것이다. 모든 인간의 영혼(정신)은 ‘이데아(진리)’를 안다. 하지만 인간이 태어나면서(몸을 갖게 되면서) 이 진리를 더 이상 보지 못하게 된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레테lethe의 강’(망각의 강)을 건네게 되기 때문이다. 이 강을 건너면서 인간은 ‘이데아’를 잊게 된다. 즉 인간은 몸을 가졌기에 ‘이데아’를 잊게 된 셈이다.
플라톤은 잊었던 그 ‘이데아’를 기억해 내는 것이 진리에 도달하는 길이라도 보았다. (이것을 ‘상기이론theory of recollection’이라고 한다) 플라톤은 진리를 ‘알레테이아aletheia’라고 표현했는데, 그 이유도 이제 알 수 있다. ‘알레테이아’는 부정을 의미하는 접두사 ‘아a’와 망각을 뜻하는 ‘레테lethe’가 합쳐진 말이기 때문이다. 플라톤은 ‘망각의 강’을 거슬러 올라가 ‘이데아’의 세계에 도달해야 진리를 볼 수 있다고 여겼다. 그러니 육체를 천한 것으로, 정신을 고결한 것으로 보는 관점은 플라톤에게는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런 플라톤의 이런 관점은 틀렸다. 육체와 신체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하다는 논의를 떠나, 이 둘을 구분해서 보려는 관점(이원론) 자체가 이미 틀렸기 때문이다. 인간을 육체와 정신을 분리된 존재로 파악하는 관점 자체가 오류다. 근대 속에서 이미 근대를 넘어버린 철학자, 스피노자가 이를 잘 설명해 준다.
정신과 신체는 동일한 것이며, 그러한 것이 때로는 사유의 속성 아래서, 때로는 연장의 속성 아래서 파악된다. (중략) 우리 신체의 능동 및 수동의 질서는, 본성상, 정신의 능동 및 수동의 질서와 동시적이다. 『에티카』 스피노자
분명 인간은 정신과 신체로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스피노자에 따르면 정신과 육체는 별도의 영역에서 분리되어 있지 않다. 스피노자는 정신과 육체는 동일하며 동시적이라고 말한다. 말하자면, ‘정신-육체’는 어떤 경우에도 평행을 유지하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 앞면(신체)이 움직일 때 뒷면(정신)도 같이 따라 움직이고, 그 반대 역시 마찬가지다. 정신과 신체는 지속적으로 서로 평행을 유지하는 상태다. (이를 ‘심신평행론’이라고 한다) 이것이 삶의 진실이다.
이 삶의 진실을 깨닫게 되면 플라토닉 사랑이 얼마나 허구적이며 유해한지 깨닫게 된다. 우리네 삶에서 경험하게 되는 '있는 그대로'의 사랑을 생각해보라. 정말 육체적인 사랑과 정신적인 사랑이 따로 있는가? 그런 일은 없다. 황홀경에 빠지는 섹스를 선사해 주는 사람에게 정신적인 사랑을 느끼게 되고, 정신적으로 깊이 교감하는 상대와 섹스는 좋을 수밖에 없다. 또 반대로 육체적 기쁨이 없는 상대에게서 정신적 기쁨도 느끼기 어렵고, 정신적 교감이 없는 상대에게 육체적 기쁨을 느끼기도 어렵다. 이것이 더할 것도 뺄것도 없는 사랑의 진실이다.
‘플라토닉 사랑’은 얼마나 유해한가? 존재하지도 않는 고결한 정신적 사랑에 빠져 삶에 기쁨을 줄 육체적 사랑을 멀리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동시에 육체적인 사랑을 부정함으로써 정신적인 사랑마저 어렵게 만들기 때문이다. 플라톤의 사랑을 믿고 있다면, 진정한 사랑에서 점점 멀어질 수밖에 없다. 진정한 사랑은 무엇인가? 온몸으로 사랑하기 온 마음으로 사랑하게 되는 사랑이며, 온 마음으로 사랑하기에 온몸으로 사랑하게 되는 사랑이다. ‘플라톤의 사랑’은 없다. ‘스피노자의 사랑’이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