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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I:강박을 어떻게 할 것인가?

강박적인 마음

“5분마다 손을 씻지 않으면 불안해요”
“매일 샤워를 한 시간 이상 안하면 잠이 안 와요.”
“제 물건들이 정확한 위치에 정확한 순서로 있지 않는 걸 못 견디겠어요.”
“다이어리에 하루 일정을 모두 기록해두지 않으면 불안해요.”


크고 작은 결벽증이나 정리벽에 시달리는 사람은 흔하다. 이런 결벽증이나 정리벽은 강박적인 마음에서 온다. ‘강박’은 무엇일까? 어떤 생각에 사로잡혀 심하게 압박을 느끼는 마음이다. 달리 말해, 특정한 행동(손 씻기‧샤워‧정리정돈‧기록)을 하지 않으면 불안해서 견딜 수 없는 마음 상태다. 과도한 손 씻기와 샤워, 집착적인 정리정돈과 기록은 모두 강박적인 마음의 결과이다.


강박은 우리네 삶을 반드시 슬픔으로 몰고 간다. 강박적인 이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강박적인 행동을 해야만 불안을 멈출 수 있기 때문이다. 결벽증이 있는 이는 아무리 피곤해도 반드시 씻어야 하고, 정리벽은 있는 이들은 아무리 바빠도 반드시 정리해야 한다. 그래야 불안을 멈출 수 있기 때문이다. 강박은 우리네 몸과 마음을 모두 피폐하게 한다. 지금은 이런 강박적인 마음이 도처를 배회하는 시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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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너’를 모두 괴롭게 하는 강박


강박은 ‘나’와 ‘너’ 모두를 괴롭게 만든다. 결벽증과 정리벽 있는 ‘나’를 생각해 보라. 그런 강박은 ‘나’를 끊임없이 괴롭힐 테다. 그런데 그 괴로움은 ‘나’의 문제로 끝이 날까? 혼자 사는 사람은 없다. 누구나 타인들과 어느 정도 생활을 공유하며 살 수밖에 없다. 바로 그 때문에 강박적인 ‘나’는 필연적으로 ‘너’에게 괴로움을 주게 된다. 결벽증이 있는 ‘나’(부모‧남편)는 ‘너’(자녀‧부인)가 씻지 않는 것을 견딜 수 없다. 정리벽이 있는 ‘나’(사장‧선배)는 ‘너’(직원‧후배)가 정리정돈하지 않는 것을 견딜 수가 없다.


이는 강박적인 ‘나’에게는 당연한 일이다. ‘너’와 함께 살 수밖에 없는 인간사에서, ‘나’의 강박적인 마음(결벽증‧정리벽)은 ‘나’의 노력(씻기‧정리정돈)만으로 결코 만족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은근히든 윽박지르든, 강박적인 ‘나’는 ‘너’에게 씻기‧정리정돈을 강요할 수밖에 없다. 강박적인 마음은 ‘나’와 ‘너’ 나아가 ‘우리’까지 괴롭히게 된다. 그러니 조금 더 유쾌하고 기쁜 삶을 원한다면 강박적인 마음을 잘 극복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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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의 ‘이데아’


그렇다면 이런 강박적인 마음은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플라톤을 통해 알아보자.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제자이며 최초의 고등교육기관이라 할 수 있는 ‘아카데미아’의 설립자였다. 플라톤은 단순히 고대 그리스 철학자 중 한 명이라고 치부하기 어렵다.


서양철학은 플라톤 이후 이어졌던 플라톤에 관해 풀이하거나 보충한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과정과 실재』 앨프리드 노스 화이트헤드


서양철학에서 플라톤의 위상은 여느 철학자와 다르다. 화이트헤드의 말처럼, ‘서양철학 전체가 플라톤에 대해 보충하거나 풀이’한 것이라고 정의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화이트헤드의 말이 과장이라고 하더라도, 서양 철학사 전체가 어느 정도 플라톤의 자장 아래 있다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만큼이나 서양철학에서 플라톤이 가지는 영향력은 크고 깊다. 플라톤의 핵심 개념인 ‘이데아’를 살펴보자.


지금부터 내가 말하는 것이 맞는지 틀렸는지를 잘 생각해 보게. 우리는 ‘같음’이라는 것이 존재한다고 말하는가? 내가 지금 ‘같음’이라고 했을 때, 그것은 이 통나무가 저 통나무와 같고, 이 돌이 저 돌과 같다고 말할 때의 그런 ‘같음’이 아니다. 여기서는 그런 것들과는 완전히 다른 것, 즉 ‘같음’ 그 자체를 가리키는 것이라네. 『파이돈』 플라톤


플라톤은 ‘같음’이란 것이 무엇인지를 묻는 것으로 ‘이데아’를 설명하려 한다. 비슷하게 생긴 두 개의 통나무 A, B가 있다. 그때 우리는 그 둘이 같다고 말한다. A와 B의 특성이 유사하기 때문이다. 즉 같은 종류의 통나무이고, 모양도 비슷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플라톤의 ‘같음’은 그런 것이 아니다. 플라톤에게 이 두 통나무가 같은 이유는 A 혹은 B와 아무 상관이 없는 ‘통나무 그 자체’ 때문이다.


‘통나무 그 자체’가 무엇일까?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지만, 누구나 머릿속에 떠올릴 수 있는 완벽한 ‘통나무’다. 그것이 ‘통나무 그 자체’다. 이 ‘통나무 그 자체’의 성질을 현실적인 존재인 A와 B가 나누어 가지기 때문에 사람들이 A와 B는 같은 통나무로 인식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을 플라톤의 ‘분유分有이론’이라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 그 자체(본질)’가 바로 플라톤의 ‘이데아’를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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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존재들의 모상模像, 이데아


하나의 예를 더 들어보자. 종이에 크고 작은 삼각형을 몇 개 그려보자. 그것들 정말 삼각형일까? 그렇지 않다. 지구상에서 그려진 어떠한 삼각형도 완벽한 삼각형일 수 없다. 지구는 곡선이기 때문에 그 위에 그려진 어떤 삼각형도 내각 합이 정확히 180도일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종이에 그려진 불완전한 그 모든 삼각형을 보며 그것이 모두 삼각형이라고 파악할 수 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 걸까? 플라톤은 ‘삼각형 그 자체’ 덕분이라고 말한다. 플라톤에 따르면, (현실에서는 결코 구현할 수 없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내각의 합이 180도가 되는 완벽한 ‘삼각형 그 자체’가 있다. 바로 그 ‘삼각형 그 자체’를 누구나 머릿속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현실 세계의 불완전한 삼각형들을 보고서도 삼각형이라고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삼각형 그 자체’가 바로 삼각형의 ‘이데아’다.


쉽게 말해, ‘이데아’(삼각형 그 자체)는 원본이고, ‘현실적 존재’(그릴 수 있는 삼각형)는 복사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원본(완벽한 삼각형)의 특성을 복사본(불완전한 삼각형)들이 나누어 가지기에 복사본들이 조금 정확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그것이 모두 동일한 삼각형임을 알 수 있다는 것이 플라톤의 주장이다. 이러한 원본으로서 ‘이데아’와 복사본으로서의 ‘현실적 존재’는 각각의 특성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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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한 ‘이데아’, 불완전한 ‘현실적 존재’


‘이데아’는 실제로 보고 만질 수 없지만 어딘가에 존재하며 완벽하며 완전하다. 반면 ‘현실적 존재’는 실제로 보고 만질 수 있지만 결함이 있고 불완전하다. ‘현실적 존재’들은 ‘이데아’의 완벽함과 완전함을 나누어 갖는 복사본이다. 그래서 ‘현실적 존재’들은 결함이 있고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마치 완벽한 원본(이데아)을 계속 복사하다 보면 복사본들이 조금씩 흐릿해지는 것처럼 말이다. 이에 대해 플라톤은 이렇게 말한다.


감각으로 인식되는 모든 것이 이데아에 도달하고자 하지만 그렇게 될 수 없고 항상 여전히 그보다 못한 것으로 남는다는 것은 틀림없네. 『파이돈』 플라톤


플라톤에 따르면, 모든 현실적 존재들은 저마다의 이데아가 있고, 그 이데아로 인해서 현실적으로 존재하게 된다. 이런저런 통나무‧삼각형‧인간‧개‧꽃 등등이 존재할 수 있는 이유는 통나무‧삼각형‧인간‧개‧꽃 ‘그 자체’(이데아)가 있기 때문이다. 이는 물질적인 대상에만 국한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비물질적인 것, 즉 추상적인 대상 역시 이데아의 지배를 받는다.


어느 조각을 보고 아름다움을 느끼고, 어느 철학자를 보고 지혜로움을 보고, 어느 할머니를 보며 인간다움을 느낀다. 이런저런 다양한 아름다움‧지혜로움‧인간다움이 존재할 수 있는 것도 아름다움‧지혜로움‧인간다움 ‘그 자체’(이데아)가 있기 때문이다. 플라톤은 물질적이든 추상적이든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 존재의 이데아가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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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강박은 완벽(완전)에 대한 강박이다.


이제 우리의 질문으로 돌아가자. 어떻게 강박적인 마음을 극복할 수 있을까? 강박은 어떤 생각에 사로잡혀 심하게 압박을 느끼는 마음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어떤 생각’이다. 그 ‘어떤 생각’은 무엇일까? 바로 완벽(완전)함이다. 모든 강박은 완벽(완전)함에 대한 강박이다. 다종다양한 강박이 있지만, 이는 모두 근본적으로 완벽(완전)함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시작된다.


결벽증이나 정리벽을 생각해 보자. 그런 강박적인 마음은 어디서 오는가? 이는 근본적으로 완벽(완전)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온다. 한 시간씩 샤워하고 5분마다 손을 씻지 않으면 불안한 이유가 무엇인가? ‘완벽한(완전한)’ 청결에 대한 집착 때문이다. 정확한 장소에 정확한 순서로 모든 물건이 정리되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완벽(완전)한’ 정돈에 집착 때문이다. 강박적 난독증이 발생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완벽(완전)한’ 이해에 대한 집착 때문이다.


강박적인 이들은 모든 것이 자신의 생각대로 되지 않으면 불안하다. 그 불안은 깊은 무의식 속에 자리 잡은 완벽(완전)함에 대한 집착에서 온다. 강박적인 마음에서 쉬이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도 이제 알 수 있다. 강박적인 이들은 강박으로 인한 불안만 응시할 뿐, 그 강박을 불러일으키는 원인, 즉 완벽(완전)에 대한 집착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역시 당연한 일이다. 완벽(완전)함에 대한 집착은 무의식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강박은 이렇게 정의하는 것이 더 적확할지도 모르겠다. 완벽(완전)함에 대해 집착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로 집착하고 있는 마음 상태!


플라톤 이후 2000년이 훌쩍 넘었지만 우리는 여전히 플라톤의 세계가 산다. 강박적인 마음에 시달리는 사람은 더욱 그렇다. 강박은 완벽(완전)함에 대한 집착에서 온다. 그 완벽함이 바로 ‘이데아’ 아닌가? 우리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어딘가에는 분명히 존재하는 완벽하고 완전한 ‘이데아’. 강박에 시달리는 이들은 바로 이 이데아의 세계에서 사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들은 청결함의 ‘이데아’, 정리정돈의 ‘이데아’, 이해의 ‘이데아’ 등등 저마다의 ‘이데아’의 세계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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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아’는 어디 있을까?


그러니 강박적인 마음을 극복하려면 ‘이데아’를 극복해야 한다. 이 ‘이데아’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먼저 ‘이데아’가 어디에 있는지부터 알아보자.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플라톤의 ‘이데아’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플라톤은 인간은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이데아’를 알고 있다고 말한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먼저 플라톤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자.


우리가 지금까지 해온 논증은 단지 같음만이 아니라 아름다움 자체, 선함 자체, 옳음 자체에 해당되는 것이라네. 그러니 이 모든 것에 대한 지식을 우리가 태어나기 이전부터 가지고 있었다는 결론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네. 『파이돈』 플라톤


플라톤은 사람들이 “아름답다” “인간답다” “삼각형 같다” “통나무 같다”라고 흔히 말하는 것에 주목한다. 사람들은 누군가에게 배우지 않아도 ‘아름답다’, ‘인간답다’, ‘삼각형 같다’, ‘통나무 같다’는 사실을 말할 수 있다. 이에 대해 플라톤은 사람들이 이미 태어나기 전부터 ‘이데아’(아름다움‧인간‧삼각형‧통나무 그 자체)를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데아’는 ‘이데아’의 세계에 있다. 플라톤에 따르면, ‘이데아’의 세계는 인간의 영혼이 몸으로 들어오기 전의 세계다. (영혼이 몸에 들어오는 것이 태어남이다) 즉 모든 인간은 태어나기 전에 ‘~ 그 자체로’로 가득 찬 ‘이데아’의 세계에 살고 있다. 플라톤의 주장이 옳다면, 모든 인간의 영혼은 이미 ‘이데아’를 알고 있을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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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박적인 마음과 죽음


‘이데아’의 세계는 육체를 가지고 갈 수 없는 세계다. 쉽게 말해, ‘이데아’는 이승이 아닌 저승에 존재하는 것이다. “철학이란 죽음의 연습이다.” 플라톤이 죽음을 찬양하며 했던 말이다. 이는 플라톤에게는 당연한 일이었다. ‘이데아’의 세계는 순수한 영혼만이 되돌아갈 수 있는 세계 아닌가? 이는 죽음을 통해서만 신체를 벗어나야만 가능한 일이다.


강박적인 마음이 심한 이들이 죽음의 냄새가 짙게 밴 우울에 쉽사리 빠지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완벽하고 완전한 세계는 이승에서는 결코 도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타자들이 득실거리는 현실 세계는 아무리 씻어도 아무 정리정돈을 해도, 완전하고 완벽한 청결‧정돈의 세계에는 결코 이를 수 없다. 그러니 강박적인 마음이 심해질수록 자꾸만 죽음에 눈길을 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제 강박적인 마음을 극복할 수 있는 이론적 방법을 알게 되었다. 우리들이 사는 현실 세계에 ‘이데아’는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 된다. 강박 자체가 완벽함(이데아)에 대한 집착에서 오는 것 아닌가? 그러니 그런 이데아가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 강박적인 마음도 사라진다. 때로 이론적인 답은 공허하다. “이데아(완벽함)는 없으니 집착하지 말라!” 강박에 시달리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한다고 그들이 강박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그리 쉽게 벗어날 수 있을 강박이었다면, 애초에 시달리지도 않았을 테다. 조금 더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방법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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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아’는 사후(경험)적이며, 유동적이며, 다수적이다.


분명 ‘이데아’는 없다. 이승과 저승 같은 종교적인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이를 논증할 수 있다. ‘아름다움’의 이데아, 즉 ‘아름다움 그 자체’을 생각해 보자. 아름다운 꽃, 아름다운 그림, 아름다운 여인, 아름다운 노을이 있다. 그 모든 아름다움을 존재하게 하는 고정불변의 단 하나의 원본으로서의 ‘아름다움 그 자체’는 없다. 즉, 플라톤의 ‘이데아’는 없다.


그런데 의아하지 않은가? 우리는 분명 다양한 대상(꽃·그림·바다·여인·노을…)들을 보며 ‘아름다움 그 자체’를 느끼지 않는가? 그래서 꽃도 그림도 바다도 여인도 노을도 모두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아름다움 그 자체’(이데아)는 있다. 하지만 그것은 사후적인 것이다. 즉, 아름다움의 ‘이데아’는 아름다운 꽃·그림·바다·여인·노을을 인식한 후에 형성된 관념이다.


‘이데아’는 있다. 다만 현실에 선행하며, 고정불변의 유일한 ‘이데아’가 없을 뿐이다. ‘이데아’는 사후(경험)적이기 때문에 유동적이며 다수인 상태로 존재한다. ‘아름다움 그 자체’가 상황과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는 사실이 이를 반증하지 않는가? 나에게는 아름다운 꽃이 누군가에게는 전혀 아름답지 않은 것일 수 있다. 또 100년 전의 미인이 지금은 추녀일 수 있다. 이처럼 모든 복사물들을 가능하게 하는 고정불변의 단 하나뿐인 원본으로서 ‘이데아’가 없을 뿐, 각가지 아름다운 대상들에 대해서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는 아름다움의 ‘이데아’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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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나’의 ‘이데아’를 찾아서


이제 강박적인 마음에서 벗어날 수 있는 조금 더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방법에 대해서 말할 수 있다. 완벽(완전)함에 대한 욕망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다. 완벽(완전)을 완벽(완전)하게 금지하는 역설을 생각해 보라! ‘완벽함(이데아)은 없다. 그러니 거기에 집착하지 말라!’ 이런 다그침으로는 결코 강박에서 벗어날 수 없다. 오히려 이런 다그침은 강박을 더 강화할 뿐이다. 인간은 언제나 금지된 것을 더 욕망하게 마련이니까 말이다.


‘이데아’는 없앨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우리에게 유해한 것은 왜곡된 ‘이데아’, 즉 선험적이고 고정적이며 유일한 플라톤의 ‘이데아’일 뿐이다. 진실된 ‘이데아’, 즉 경험(사후)적이고 유동적이며 다수의 ‘이데아’는 분명 존재한다. 그러니 완벽함 자체를 문제 삼기보다 완벽함에 관한 질문을 바꾸는 편이 더 지혜롭다.


“완벽한 청결(혹은 정리정돈)은 무엇인가?” 이것은 플라톤의 ‘이데아’에 갇힌 어리석은 질문이다. 이런 질문으로는 강박으로부터 한 걸음도 벗어날 수 없다. 현실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이데아’(완벽함)을 좇느라 끝도 없는 불안과 우울에 빠져들게 될 테니까. 질문을 바꾸어야 한다. “지금 나에게 완벽한 청결(정리‧이해)은 무엇인가?” 이것이 지혜로운 질문이다. 진실된 ‘이데아’(완벽함)이란 것은 상황과 조건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니까 말이다.


상황과 조건에 따라 완벽한 청결·정리‧이해를 좇는다면, 완벽함을 좇아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완벽한 청결은 무엇인가? 안 피곤할 때는 한 명과 악수하고 손 씻고 샤워는 한 시간이 완벽한 청결일 수 있다. 하지만 피곤할 때는 세 명과 악수하고 손 씻고, 샤워는 20분 하는 것이 완벽한 청결일 수도 있다. 완벽한 정리 역시 마찬가지다. 혼자 있을 때는 물건의 위치와 순서를 모두 맞춰 정리하는 것이 완벽한 정리이지만, 누군가와 함께 있을 때는 물건의 위치만 맞춰 정리하는 것이 완벽한 정리일 수 있다.


강박적 난독증, 즉, 완벽한 이해에 대한 집착 때문에 글을 좀처럼 읽지 못하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완벽한 이해는 무엇인가? 매혹적인 혹은 중요한 글을 읽을 때는 더 이해하려고, 그저 그런 글을 읽을 때는 덜 이해하고 하는 것이다. 그럴 수 있다면, 우리는 이제 조금 덜 강박적인 마음으로 조금 더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다. 완벽함에 집착하는 게 아니라 완벽함을 지향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이데아(완벽함)’을 제거하려 하지 말고, ‘지금, 나’의 ‘이데아(완벽함)’를 찾아나가면 된다. 그때 우리는 강박으로부터 한 걸음씩 벗어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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