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되기를 바라는 마음
“비싼 PT를 왜 몇 년째 받고 있어?”
“헬스장만 끊으면 안가잖아. 근데 PT 끊어놓으면 어떻게든 나가게 되잖아.”
‘퍼스널 트레이너(PT)’라는 직업이 있다. 전문 지식을 활용해서 개별적으로 운동을 지도해주는 일을 한다. 이 PT는 어느 순간 유행처럼 번졌다. 이제는 헬스장에 가서 PT를 만나는 것이 아니라, PT를 만나기 위해 헬스장에 가야 할 만큼 PT는 대중화되었다. PT는 왜 이렇게 유행하게 된 걸까? 건강하게 살고 싶어서? 섹시한 외모를 원해서? 정확한 운동 방법과 식단을 알고 싶어서?
어느 것 하나 틀린 것이 없지만, 이는 모두 피상적인 이유일 뿐이다. 본질적인 이유는 운동하고 싶지 않아서다. PT를 찾는 대부분의 이유는 강제로 운동을 시켜 주기를 바라서다. 운동 방법이나 식단 조절 같은 지식은 부차적인 것일 뿐이다. PT만이 그럴까? 많은 이들에게 강제되기를 바라는 은근한 마음이 있다.
어느 정도 여윳돈을 마련해 놓고 퇴사를 했지만 이내 다시 직장으로 되돌아가는 사람이 있다. 이는 직장이라는 강제성이 없을 때 삶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고 느껴져서다. 혼자 읽어도 되는, 아니 혼자 읽는 것이 더 좋을 수 있는 책을 함께 모여 읽는 모임에 참석하는 이도 많다. 이 역시 마찬가지다. 특정한 강제성을 부여해서 책을 읽으려는 것이다. 이처럼 누구나 마음속 깊은 곳에는 강제되기를 바라는 은근한 마음이 있다.
강제되기를 바라는 것은 무기력 때문이다.
인간은 자유를 원하는 존재 아닌가? 그런데 왜 우리는 종종 자발적으로 강제(부자유)되기를 바라는 걸까? 바로 무기력 때문이다. PT를 받는 이유가 무엇인가? 자신이 너무 쉽게 무기력해진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여윳돈이 있지만 황급히 직장을 돌아가는 이유가 무엇인가? 직장이 없을 때 급격히 무기력해지는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함께 책 읽는 모임도 마찬가지다. 함께 읽는 강제성으로 무기력한 자신을 벗어나려는 것이다.
우리는 종종 무기력해진다. 하지만 그 무기력을 보고만 있을 수 없다. 무기력이 무엇인가? 어떤 일을 할 힘이 없어서 아무것도 하지 않음의 상태에 머무는 것 아닌가. 이런 무기력은 죽음의 냄새를 품고 있다. 무기력의 극한 상태는 죽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떻게든 살아보려는 이들은 이 무기력을 방치할 수 없다. 이것이 많은 이들이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행복인 자유마저 쉽사리 포기하는 이유다.
흔히, 자유에 활력(삶)이 있고, 부자유에 무기력(죽음)이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이는 지혜로운 자들의 도식일 뿐이다. 우리네 삶은 심각한 모순 속에 있다. 자유를 원하지만, 그 자유 뒤에는 무기력(죽음)이 도사리고 있다. 동시에 부자유를 거부하지만, 그 부자유 속에 활력(삶)이 있다. 평범한 이들에게는 자유(강제성 없음)는 곧 무기력이 있고, 부자유(강제성)가 곧 활력이 있다.
그렇다면 평범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무기력을 피하기 위해 부자유(강요‧강제)한 삶을 이어가야 할까? 아니면 무기력한 상태로 죽음의 냄새가 자욱한 자유를 누려야 할까? 섣불리 답할 필요는 없다. 이 모든 문제들이 바로 무기력에서부터 시작된 것 아닌가? 그러니 처음으로 돌아가 질문해 보자. 우리는 왜 무기력해지는 걸까?
플라톤 ‘원인론aitiology’
이 질문에 대한 답은 플라톤의 ‘원인론’에서 찾을 수 있다. ‘원인론’이 무엇일까? 사물이나 세계를 존재하게 하는 원인을 찾으려는 이론이다. ‘컵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눈은 어떻게 내리게 되는가?’ ‘고양이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더 나아가 ‘지구와 우주는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이와 같은 질문에 답하는 이론이 ‘원인론’이다. 고대 그리스의 많은 철학자들이 저마다의 ‘원인론’을 주장했고, 이는 플라톤에 이르러 본격적인 체계를 갖추게 된다. 플라톤의 ‘원인론’은 무엇일까?
생성되는 모든 것은 또한 필연적으로 원인이 되는 어떤 것에 의해 생성된다. 어떤 경우에도 원인이 없이는 생성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무엇을 ‘만드는 이demiourgos’이건 간에, 그가 ‘언제나 같은 상태로 있는 것’을 바라보며, 이런 것을 본本, paradeigma으로 삼고서, 자기가 만든 것이 그 형태idea와 성능dynamis을 갖추게 할 경우에라야 또한 이렇게 완성되어야만 모든 것이 필연적으로 아름다운 것이 된다. 『티마이오스』 플라톤
플라톤의 말처럼, “생성되는 모든 것은 필연적으로 원인이 되는 어떤 것에 의해 생성”되게 마련이다. 플라톤은 어떤 대상이든 그것이 발생하려면 세 가지 원인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제작자demiourgos’, ‘형상eidos’, ‘질료hyle’가 바로 그것이다. 집을 만든다고 해보자. 거기에는 세 가지 원인이 필요하다. 먼저 집을 제작할 ‘건축가’ 그리고 어떤 집을 지을 것인지에 대한 ‘설계도’가 필요하다. 또 설계도에 맞춰 집을 지을 ‘재료’(시멘트, 흙, 나무 등등)도 필요하다.
여기서 건축가는 ‘제작자’, 설계도는 ‘형상’, 재료는 ‘질료’에 해당한다. 건축가, 설계도, 재료가 있어야 집을 지을 수 있는 것처럼, 세계(우주) 역시 “만드는 이”인 ‘제작자demiourgos’, “언제나 같은 상태로 있는 것”으로서의 본이 되는 ‘형상eidos’ 그리고 재료인 ‘질료hyle’가 있어야 발생할 수 있다. 이것이 플라톤의 ‘원인론’이다.
가장 근본적이어서 가장 중요한 원인, ‘형상eidos’
이 세 가지 원인 중 ‘형상’에 주목해야 한다. 우리는 흔히, 집을 지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건축가(제작자)라고 여긴다. 재료(질료)는 흔한 것이고, 설계도(형상)는 건축가의 머릿속에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플라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플라톤의 ‘제작자(설계자)’는 모든 것을 창조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플라톤에 따르면, ‘제작자(설계자)’는 ‘형상(설계도)’과 ‘질료(재료)’를 창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설계자(형상)’의 머릿속에 ‘설계도(제작자)’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플라톤에게는 반대다. 플라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형상eidos’이다. 이 ‘형상eidos’이 바로 플라톤이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여긴 ‘이데아idea’와 같은 것이다. 플라톤은 ‘형상’(이데아)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신적이고, 영원하며, (감각이 아닌) 지성으로 알 수 있고, 분리나 해체가 불가능하며, 언제나 자신의 원래 동일한 상태로 있는 것 『파이돈』 플라톤
플라톤에 따르면, ‘형상’(이데아)은 신적이고 영원하며, 분리‧해체 불가능한 “언제나 같은 상태로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보고 만지는 등의 감각으로는 파악할 수 없고 오직 지성(예지)적으로만 파악할 수 있다. 플라톤에게 ‘형상’은 가장 근본적이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다. 세상의 모든 사물들은 이런 ‘형상’의 그림자일 뿐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플라톤은 ‘건축가’(제작자)가 ‘설계도’(형상)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완전하고 영원한 ‘설계도’(형상‧이데아)가 ‘건축가’(제작자)를 만든다고 본 셈이다.
무기력은 세계관의 문제다.
우리는 왜 무기력해지는 걸까? 흔히 사람들은 무기력의 원인을 신체에서 찾으려고 한다. 쉽게 말해서 몸(체력)이 약해서 무기력해진다는 것이다. 이는 정확한 진단이 아니다. 몸이 약하면 무기력할 개연성이 커지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약한 신체가 무기력의 유일한 원인은 아니다.
우울증에 빠진 운동선수를 생각해 보라. 강한 신체를 가진 이가 어느 순간 극심한 무기력의 상태에 빠지는 일은 흔하다. 반대의 경우 역시 존재한다. 죽음에 이르는 상황에서조차 또렷한 정신을 유지하는 고승들을 생각해 보라(좌탈입망!). 약한 신체에도 불구하고 활력 넘치는 삶을 유지하는 경우도 있다. 이처럼, 무기력은 단지 신체적 상태 때문에 벌어지는 일 아니다.
무기력의 근본적 원인은 세계관이다. ‘내가 세계를 어떻게 보고 있느냐?’에 따라 무기력한 삶과 활력적인 삶이 결정된다. 종종 무기력해진다면 자신의 신체가 아니라 자신의 세계관을 점검해야 한다. 바로 여기서 플라톤의 ‘원인론’이 문제가 된다. 플라톤의 ‘원인론’은 하나의 세계관이다. 이는 어떤 세계관인가? 존재하는 모든 사물의 의미는 이미 결정되어 있다고 보는 세계관이다.
무기력의 원인, ‘플라톤’적 세계관
플라톤에게 중요한 건, ‘제작자’도, ‘질료’도 아니다. 이미 결정되어 있기에 “언제나 같은 상태로 있는” ‘형상’이다. 이는 우리 주변에 있는 사물이건, 세계 전체이건 존재하는 모든 것의 의미는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의미다. 이런 ‘플라톤’적 세계관을 갖고 있는 이들은 필연적으로 무기력해질 수밖에 없다. 모든 것의 의미는 이미 정해져 있다고 보는 이에게 생기 넘치는 활력을 기대하기 어렵다. 그런 이들은 어떤 일이 닥치든, 그 일에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개입할 필요도 이유도 없기 때문이다.
‘사랑’을 예로 들어보자. ‘플라톤적 세계관’에서 사랑은 이미 결정되어 있는 운명(형상)적 사랑이다. 내(제작자)가 누군가(질료)를 만나 어떤 사랑을 하게 될지는 운명(형상) 안에서 이미 다 정해져 있다. 이런 ‘플라톤’적 세계관을 갖고 있는 이들에게 활력이 있을 리 없다. 당연하지 않은가? 이들에게 운명적 사랑은 이미 예정되어 있다. 그러니 사랑을 시작하기 위한 이런저런 시도를 해나갈 수 있는 활력은 애초에 필요치 않다.
‘플라톤’적 세계관을 가진 이들은 자신의 세상 밖으로 나가기보다 무기력하게 운명적 사랑을 기다릴 뿐이다. 이들의 유일한 활력은 숨겨진 사랑의 형상(운명)을 발견하기 위해 교회나 점집을 향할 때 잠시 꿈틀거릴 뿐이다. 하지만 이런 퇴행적 활력은 이내 더 큰 무기력으로 되돌아올 뿐이다.
우리는 왜 무기력해지는 걸까? 이제 답할 수 있다. 종종 무기력에 빠진다면 그것은 우리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플라톤’적 세계관으로 세상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사물의 의미는 세상 너머에 있는 ‘형상’(이데아)에 의해 이미 모두 결정되어 있다는 ‘플라톤’적 세계관. 그러니 우리의 무기력에 대해서 이렇게 말해도 좋겠다. ‘플라톤’적 세계관을 받아들인 만큼 무기력해지는 것이라고 말이다.
활력 넘치는 삶을 위한 ‘들뢰즈’적 세계관
어떻게 무기력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간명하다. ‘플라톤’적 세계관에서 벗어나면 된다. 하지만 이 간명한 답은 결코 쉽지 않다. 2000년 넘게 서양철학을 지배해온 이 ‘플라톤’적 세계관은 우리 마음 깊숙한 곳에도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시간을 건너뛰어 명실공히 현대 서양철학의 최고봉이라고 평가받는 ‘질 들뢰즈’를 만나 볼 필요가 있다. 그는 ‘형상’ 혹은 ‘이데아’로 상징되는 ‘플라톤’적 세계관은 삶의 진실을 왜곡하는 거짓이라고 단언한다.
어디에서 출발하는가? 어디를 향해 가는가? 이런 물음은 정말 쓸데없는 물음이다. 백지상태를 가정하는 것, 0에서 출발하거나 다시 시작하는 것, 시작이나 기초를 찾는 것, 이 모든 것들은 여행이나 운동에 대한 거짓 개념을 함축한다. 『천개의 고원』 질 들뢰즈 & 펠릭스 가타리
“어디에서 출발하는가? 어디로 가는가?” 들뢰즈는 이런 질문은 쓸데없다고 단언한다. 이는 플라톤을 향한 날 선 비판이다. 플라톤의 ‘형상’(이데아)이 바로 세상 만물의 출발점(시작‧기초)이자, 그것들이 어디를 향해 나아갈지를 결정하는 것 아닌가. 또한 들뢰즈는 “시작이나 기초를 찾는 것” 즉 ‘형상’(이데아)을 찾는 것은 삶(여행이나 움직임)의 진실을 왜곡하는 거짓말이라고 진단한다.
들뢰즈는 ‘플라톤’적 세계관의 중심인 ‘형상’(이데아)을 해체했다. ‘플라톤’적 세계관을 넘어선 들뢰즈는 세계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 플라톤이 세상 만물을 세 가지 원인(제작자‧형상‧질료)의 결과물로 본다면, 들뢰즈는 세상 만물을 ‘다양체multiplicity’로 본다. 다시 집을 예로 들어보자.
집은 ‘건축가’와 ‘설계도’와 ‘재료’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수없이 많은 우발적 마주침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어느 ‘건축가’가 자신의 ‘설계도’를 따라 집을 지었다고 해보자. 그 ‘건축가’ 그린 ‘설계도’는 그가 우연히 한 여인을 만나 사랑에 빠졌고 아이를 낳았기에 생성된 것이다. 또 그 집을 지을 때 우발적인 날씨 변화에 의해 ‘재료’들은 미세한 영향을 받았을 테다.
만약 그 ‘건축가’가 그 여인과 아이를 만나지 못했다면 그 ‘설계도’는 존재할 수 없다. 또 집을 지을 때 그 날씨가 아니었다면 그 ‘재료’는 그 재료가 아니었을 테다. 그 모든 우연적이고 우발적인 마주침이 없었다면 그 집은 존재할 수 없다. 이처럼 집은 세 가지 원인(제작자‧형상‧질료)이 아니라, 그 세 가지 원인을 원인되게 하는 무수히 많은 우발적 마주침에 의해 만들어진다. 들뢰즈는 집뿐만 아니라 세계(우주) 전체 역시 이런 수많은 우발적 사건의 마주침에 의해 만들어진 ‘다양체’라고 보았다.
다양체는 연결접속들을 늘림에 따라 반드시 본성상의 변화를 겪게 된다. 『천개의 고원』 질 들뢰즈 & 펠릭스 가타리
들뢰즈의 난해한 이야기를 이제 이해할 수 있다. 들뢰즈에게 세상 만물은 모두 ‘다양체’이고, 그것들은 연결접속(마주침)이 일어날 때마다 본성(본질)이 변하게 된다. ‘사랑’ 역시 그러하지 않은가? 10대의 사랑, 20대의 사랑, 30대의 사랑, 혹은 40‧50대의 사랑은 다 다르다. 그것은 ‘사랑’이 바로 ‘다중체’이기 때문이다.
어떤 두 사람이 각자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또 그 두 사람이 어떤 조건과 상황에서 만났는지에 따라 ‘사랑’은 본성의 변화를 겪게 될 수밖에 없다. 수많은 우연적 조건에 따라 매 순간 변화되는 사랑, 그것이 진짜 ‘사랑’이다. 이미 존재하는, 그래서 어떤 경우에도 변하지 않는 본성을 갖고 있는 운명(형상‧이데아)적 사랑 같은 건 없다.
모든 것은 ‘형상(이데아)’의 결과가 아니라, ‘지층화’의 결과다.
우리는 의미화하지도 의미화되지도 않는다. 우리는 지층화된다. 『천개의 고원』 질 들뢰즈 & 펠릭스 가타리
들뢰즈는 “우리는 의미화하지도 의미화되지도 않는다”고 말한다. 여기서 ‘의미화’는 ‘형상(이데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즉, 우리는 결코 변하지 않는 ‘형상’을 만들지도 않고, ‘형상’화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우리는 운명(형상)적 사랑을 만들지도 않고, 그런 운명(형상)적 사랑에 포획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지층화”될 뿐이다. ‘지층화’가 무엇인가? 우발적인 마주침에 의해 지층이 수없이 쌓이고(퇴적작용) 이리저리 휘어지는(습곡작용) 과정이다. 이런 ‘지층화’(마주침)에 의해 지구가 형성되듯, 우리 역시 그렇게 ‘지층화’된다. 우리의 사랑 역시 그러하지 않은가? 수없는 우연적 만남, 그리고 우발적인 흔들림에 의해 ‘지층화’되는 것, 그렇게 끊임없는 사랑의 본성이 변화를 겪게 되는 것, 그것이 사랑 아닌가.
‘플라톤’적 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이들은 ‘사랑의 의미’를 찾느라 ‘사랑의 기쁨’을 놓치고 만다. 그렇게 무기력해진다. 하지만 ‘들뢰즈’적 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이들은 다르다. 이들은 카페에서 우연히 만난 매혹적인 사람에게 조심스레 말을 걸게 되거나, 하다못해 친구에게 소개팅을 해달라고 조르기라도 할 테다. 그렇게 그들은 ‘사랑의 기쁨’을 통해, 진정한 ‘사랑의 의미’까지 발견하게 된다. 그렇게 그들은 활력적인 이들이 된다
‘들뢰즈’적 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이들은 유쾌하고 활력적일 수밖에 없다. 이들은 정해져 있는 삶의 의미 같은 것은 없고, 우연한 마주침에 의해서 삶의 의미가 구성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오늘’과 ‘내일’은 주어진 ‘형상’(운명)을 발견해야 할 퇴행적이어서 우울한 시간이 아니다. ‘어제’와 다른 삶의 의미를 만들어갈 새로운 ‘지층’(마주침)을 형성할 기쁘고 유쾌한 시간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 정해진 의미는 없다는 것. 대상의 의미는 오직 우발적 마주침에 의해 끊임없이 변해간다는 것. 이것이 삶의 진실이다. 무기력을 벗어나 활력 넘치는 삶을 원한다면, 과감하게 ‘들뢰즈’의 세계로 들어서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