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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역사 속 소크라테스>

소크라테스는 직접 쓴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지금 우리가 소크라테스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대부분 그의 제자의 크세노폰과 플라톤이 남긴 기록에 의존하고 있다.) 그의 모든 가르침은 ‘대화dialogue’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는 왜 기록을 남기지 않고 휘발되는 ‘대화’로만 지혜를 전했을까? 소크라테스가 진정으로 남기고 싶었던 지혜는 ‘철학’(이론)이 아니라 ‘철학함’(성찰적 태도)이었기 때문이었을 테다. 휠스베르거는 이러한 지점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일정한 학파의 교의(도그마)를 남겨주려고 했다기보다, 오히려 철학하는 것 자체를 자극했다. 『서양 철학사』 요하네스 휠스베르거


하지만 소크라테스의 이런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소크라테스의 ‘대화dialogue’는 후대에 이르러 서양철학의 거대한 전통인 ‘변증법’으로 나타나게 되기 때문이다. ‘변증법’은 무엇일까? 어원에서 알 수 있듯이, 변증법dialectic은 대화dialogue에서 유래한 개념이다. ‘대화’가 무엇인가? ‘나’(주체)와 ‘너’(타자) 사이에서 일어나는 상호작용이다. 그래서 ‘대화’를 통해 ‘나’는 무지의 자각에 이르고 그로 인해 진정한 앎에 이르게 된다. 큰 맥락에서 ‘변증법’ 역시 이와 마찬가지다. ‘주체’와 ‘대상’의 상호작용(대화)을 통해 새로운(발전된) 인식이나 종합적인(진화된) 이해로 나아가는 것이 바로 변증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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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의 ‘대화’로부터 시작된 ‘변증법’적 전통은 헤겔에 이르러 기묘한 측면으로 접어들게 된다. 헤겔은 역사나 세계 같은 형이상학적 차원의 대상들까지 그런 대화(변증법)을 통해 점차적으로 새로운(발전된, 진화된) 모습으로 나아가게 된다고 역설한다. ‘나’와 ‘너’의 대화처럼, ‘과거(주체)’와 ‘현재(대상)’ 역시 그런 인간적 대화를 통해 역사(세계)가 발전한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수레(과거)가 있었기에 마차(현재)가 있고, 마차(과거)가 있었기에 자동차(현재)가 도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듯 (자동차의) 역사 역시 변증법(대화)적으로 진행된다는 것이 헤겔의 논리다.


이는 얼핏 들으면 그럴듯해 보인다. 하지만 헤겔의 변증법은 치명적 오류를 갖고 있다. 헤겔의 변증법이 가진 ‘목적론’이 바로 그 오류이다. 목적론은 쉽게 말해, ‘답은 정해져 있다’는 이론이다. 헤겔의 변증법은 목적론적이다. 즉 답이 정해져 있다. 예를 들어, 수레가 있었기에 마차가 있고, 마차 있었기에 자동차가 있다는 식이다. 즉 자동차의 역사는 자동차라는 정해진 목적(답)을 향해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명백한 오류다. 목적론은 결과론적 해석이 만들어낸 오류일 뿐이다. 자동차라는 결론으로부터 마차를 찾고, 수레를 찾아내어 꿰어맞춘 것에 지나지 않는다.


역사는 목적론적으로 흐르지 않는다. 역사는 우발적이다. 수많은 우연과 우발성이 중첩되어 어디로 향하는지 가늠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역사다. 현재(자동차)가 있는 이유는 우연과 우발로 인해 그렇게 된 것일 뿐, 정해진 목적을 향해 도착한 답이 아니다. 만약 역사를 되돌릴 수 있다면 지금과 같은 현재가 반복될 확률은 지나가는 개미가 벼락을 맞을 확률보다 낮다. 헤겔의 이런 오류는 소크라테스에서부터 이미 예견된 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소크라테스는 분명 누구보다 지혜롭고 고결한 철학자이지만 한계가 없는 것은 아니다. 비트겐슈타인의 소크라테스를 이렇게 비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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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의 대화들을 읽을 때, 사람들은 이런 느낌을 가진다. : 얼마나 가공할 만한 시간 낭비인가? 아무것도 증명하지 않으며, 또 아무것도 해명하지 않는 이 논증들은 도대체 무엇을 위한 것인가? 『문화와 가치』 비트겐슈타인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의 ‘대화’를 생각해 보라. 그 대화에는 분명 목적론적 성격이 있다. 소크라테스의 ‘대화’는 우연성과 우발성을 긍정하는 대화가 아니다. 모든 대화와 마찬가지로, 그의 ‘대화’ 역시 그 과정에서는 우연적이고 우발적인 상호작용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 ‘대화’의 결론은 이미 정해져 있다. ‘아이(지혜)’를 낳아야 한다는 것! 지혜는 분명 좋은 것이지만, 그 지혜는 어쨌거나 소크라테스가 지향하는 지혜일 수밖에 없다. 소크라테스의 ‘대화’는 자신이 정한 목적(답)으로 몰고 가는 ‘답정너’식 대화일 수밖에 없었다. 이에 대해 러셀은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소크라테스는 논증을 펼칠 때, 사심 없이 공정한 태도로 지식을 추구하지 않고 자신이 동의하는 결론을 증명하기 위해 지성을 사용하고, 사적인 사고를 전개할 때면 정직하지 않고 억지로 둘러대기도 한다. 『러셀의 서양철학사』 버트런드 러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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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의 ‘변증법dialectic’이 목적론적 오류를 범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소크라테스의 ‘대화dialogue’를 온전히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세계의 역사이든, 개인의 역사이든, 모든 역사는 결코 목적론적이지 않다. 모든 역사는 우연적이며 우발적이다. 두 가지 대화(변증법)이 있다. 목적론적 대화(변증법)과 우발적 대화(변증법). 이 중 어느 대화(변증법)을 하며 살 것인지는 매우 중요한 문제다. 전자는 활력을 잃고 우울한 삶을 초래하며, 후자는 활력이 가득한 유쾌한 삶으로 이끌기 때문이다.


답이 정해진 대화에서는 우리가 능동적으로 개입할 여지가 없기에 지루하며 우울하다. 하지만 어디로 튈지 모르는 우발적 대화에서는 언제나 우리가 능동적으로 개입할 여지가 있기에 흥미롭고 유쾌하다. 이것이 소크라테스부터 헤겔로 이어지는 서양철학의 변증법적 전통을 비판적으로 사유해야 할 이유다.


서양철학은 아버지의 유지를 잘 받들지 못한 측면이 있다. 소크라테스가 남긴 진정한 유산은 ‘대화(변증법)’가 아니다. ‘철학함!’이다. 내가 알고 있는 것 너머 내가 모르는 것을 성찰할 수 있는 철학적 태도로서의 철학함! 그의 ‘대화’는 ‘철학함’을 위한 도구일 뿐이다. 소크라테스의 진정한 유산을 넘겨받은 이들은, 목적론적 변증법을 설파하고 다니는 이들을 이렇게 꾸짖어야 할 테다. “너 자신을 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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