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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오게네스:어떻게 당당하게 살 것인가?

불행의 진짜 이유

불행한 이들이 넘쳐난다.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불행의 이유들이 있기 때문이다. 못생겨서, 키가 작아서, 몸이 약해서, 못 배워서, 직장이 없어서, 가난해서, 이혼해서, 부모가 없어서. 그런데 가끔 의아하다. 그 명백한 불행의 이유에도 불구하고 그다지 불행하지 않은 이들을 만나게 될 때 그렇다. 하지만 그 의아함은 오래가지 않는다. 그것은 불행한 이들의 ‘자포자기’(“이렇게 생겨먹었는데 어쩌겠어”)나 ‘정신승리’(“그래도 나정도면 괜찮은 거지”)로 손쉽게 치부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는 모두 안목의 부재일 뿐이다.


명백한 불행의 이유에도 불구하고 불행하지 않을 수 있다. 넘쳐나는 불행의 이유(작은 키·약한 몸·가난·이혼 등등)는 불행의 진짜 이유가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를 진짜 불행하게 하는 것이 무엇일까? 위축감이다. 세상 사람들의 차가운 시선 때문에 생긴 위축감. 못생기고 가난하고 직장이 없어서 불행한 것이 아니다. “넌 왜 그리 못생겼니?” “넌 돈도 없니?” “넌 왜 아직도 취업을 못했니?” 세상의 이런 비난과 차가운 시선에 의해 점점 쪼그라들었기에 불행하다. 이것이 진짜 불행의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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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에서 벗어날 두 가지 방법

불행에서 벗어날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첫 번째는 세상 사람들의 비난과 차가운 시선이 사라지는 것이다. 못생긴 이. 몸이 약한 이, 못 배운 이, 직장이 없는 이, 가난한 이들에게 세상 사람들이 차가운 시선을 보내지 않으면 된다. 결국 불행은 위축감에서 오는 것 아닌가? 그러니 그 비난과 차가운 시선을 제거하면 위축될 일도 불행해질 일도 없다. 이것이 불행에서 벗어나는 근본적인 방법이다.


그런데 이 방법은 실현 불가능하다. 세상 사람들의 비난과 차가운 시선은 쉬이 제거되지 않을 테다. 인간사에서 타인을 향한 비난과 차가운 시선이 사라진 적은 없다. 세속에 치여 사는 세상 사람들은 타인의 불행을 먹고 살기 때문이다. 두 번째 방법이 있다. 위축되지 않기. 세상 사람들의 비난과 차가운 시선 앞에서도 위축되지 않으면 된다. 이것이 불행에서 벗어날 수 있는 현실적인 대안이다. 세상의 비난과 차가운 시선에 앞에서도 위축되지 않고 당당하게 살 수 있는 법을 익혀야 한다. 물론 이는 분명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그렇다고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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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 같은 철학자, 디오게네스


세상의 비난과 차가운 시선 앞에서 어떻게 당당해질 수 있을까? 이 질문의 답은 ‘디오게네스’에게 들어보자. 이 질문에 디오게네스는 이렇게 답해줄 테다. “개처럼 살아가거라!” 이 황당한 대답의 진의를 이해하기 위해서 디오게네스에 대해 조금 더 알아보자. 디오게네스는 아리스토텔레스와 동시대 그리스 철학자였다. 하지만 그는 당대의 명망과 품위를 유지하려는 철학자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기행을 일삼는 괴짜 중에 괴짜였다.


전해지는 디오게네스의 기행들은 황당을 넘어 당혹스러울 정도다. 그가 매일 기거했던 집은 시신 매장을 위해 쓰던 커다란 독이었다. 또한 그는 늘 남루한 옷을 입고 구걸을 하면서 생계를 이어갔다. 그의 기행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디오게네스는 군중들이 모인 곳에서 자위 행위를 하기도 했다. 디오게네스는 정말 ‘개’처럼 살았던 셈이다. 디오게네스의 이런 기행은 단순한 미친 행동이 아니었다. 디오게네스의 모든 기행은 그의 ‘철학’을 실천하는 일이었다.


디오게네스의 철학은 어떤 것이었을까? 디오게네스는 행복을 ‘인간의 본성에 따라 자연스럽게 생활하는 것’이라 여겼다. 그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인간이 인위적으로 정한 관습·전통·제도·교육·도덕·윤리·법률 같은 것들을 부정해야 한다고 여겼다. 디오게네스의 황당과 당혹을 넘나드는 기행은 이런 그의 철학을 추구하는 삶이었다. 디오게네스는 단순히 미치광이가 아니었다. 플라톤이 디오게네스를 가리켜 ‘미친놈’이 아니라 ‘미친 소크라테스’라고 말한 데는 다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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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오게네스의 ‘시니시즘cynicism’

디오게네스는 개처럼 살았지만, 사유하지 않는 개는 아니었다. 그의 사유는 ‘시니시즘cynicism’이라는 사상을 기초 세웠다. ‘시니시즘’은 무엇일까? 이는 인간의 본성에 따라 자연스럽게 사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는 사상이다. 또한 ‘시니시즘’은 그렇게 살기 위해 인간이 인위적으로 만든 관습·전통·제도·교육·도덕·윤리·법률 등을 넘어서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긴다. 왜냐하면 인간의 만든 문명이 바로 인간의 본성에 따라 자연스럽게 살지 못하게 하는 핵심 원인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시니시즘’의 핵심적 내용이다.


디오게네스는 왜 광장에서 자위를 했을까? 그의 충격적인 행위도 이런 ‘시니시즘’의 맥락을 살필 수 있다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의 생애를 정리한 ‘라에르티오스’의 기록을 살펴보자.


디오게네스는 사람들이 보고 있는 가운데 자위에 열중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배도 이런 식으로 비비기만 해도 배고픔이 사라지면 좋으련만 『그리스철학자 열전』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


인간의 본성에는 성욕과 식욕이 있다. ‘시니시즘’, 즉 인간이 인위적으로 정한 관습·전통·윤리를 넘어서려 했던 디오게네스에게 이 두 가지 욕구는 동일한 크기의 욕구였다. 하지만 그때나 2000년이 지난 지금이나 세상 사람들에겐 전혀 그렇지 않다. 광장에서 식사는 할 수 있지만 섹스는 하지 못한다. 이는 식욕보다 성욕에 더 강한 금지의 관습·전통·윤리가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니시즘’의 철학자, 디오게네스는 이 점을 드러내고 싶었던 것이다.


이제 디오게네스가 광장에서 자위를 하며 “배도 이런 식으로 비비기만 해도 배고픔이 사라지면 좋겠다.”고 말한 이유를 알겠다. 세상 사람들이 광장에서 식욕을 해결하며 성욕을 상상할 때, 디오게네스는 광장에서 성욕을 해결하며 식욕을 상상했다. 디오게네스는 ‘시니시즘’적 표현으로 관습·전통·윤리적 의미에서 성욕과 식욕의 위상을 뒤집은 셈이다. 이를 통해 식욕과 성욕은 모두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성이며 이를 같은 크기로 긍정하며 사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시니시즘’을 역설하려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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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니시즘과 당당함


세상 사람들의 비난과 차가운 시선 앞에서도 당당하게 살아갈 방법이다. ‘시니시즘’적으로 살아가면 된다. 이는 우리들 역시 디오게네스처럼, 커다란 독에 기거하며 남루한 옷을 입고 구걸하며, 광장에서 자위를 하며 살아가라는 의미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다시 한번 의아함을 느끼게 된다. ‘시니시즘’적 삶이 당당한 삶과 어떤 관계가 있는 걸까? 이 의아함을 해소해줄 디오게네스에 관한 몇 개의 일화가 있다. 그것은 디오게네스를 흠모한 당대 최고 권력자인 알렉산더 대왕과 관련되어 있다.


알렉산더 대왕이 그의 앞에 서서 “나는 대왕인 알렉산더이다.King Alexander, the great”라고 이름을 밝히자 디오게네스도 자신을 소개했다. “나는 개인 디오게네스이다.Diogenes, the Dog” 『그리스 철학자 열전』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


디오게네스는 알렉산더 대왕을 박대한 것으로 유명하다. 알렉산더 대왕이 그를 찾아와 “내가 당신에게 해줄 일이 없는가?”라고 묻자, 그는 “햇볕이나 가리지 말고 비켜서 달라”고 대답했다. 『고대철학』 앤서니 케니


- 디오게네스는 당대 최고 권력자에게 주눅 들기는커녕, 자신은 개라고 당당하게 밝힌다. 또한 모든 것을 해줄 수 있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왕의 호의에 햇볕이나 가리지 말라며 면박을 준다. 바로 이것이 디오게네스의 ‘시니시즘’이다. 그에게 ‘대왕’은 별것이 아니다. 그저 인간들이 만들어낸 제도(체계)의 수장일 뿐이다. 인간이 정한 관습·전통·제도·교육·도덕·윤리·법률 같은 것들을 넘어서려는 디오게네스에게 알렉산더는 그저 햇볕(자연!)을 가리고 있는 한 남자일 뿐이었다.


우리를 위축되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 무엇인가를 얻고 싶다는 ‘욕심’과 무엇인가를 잃을 수 있다는 ‘공포’다. 우리는 사장 앞에서 왜 위축되는가? 사장이 우리를 승진(인정‧관심) 시켜 주기를 바라는 ‘욕심’과 사장이 나를 해고(무시‧비난)할 수도 있다는 ‘공포’ 때문 아닌가. ‘시니시즘’은 이 ‘욕심’와 ‘공포’을 넘어서게 해준다. 이 낯선 논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욕심’과 ‘공포’ 사이의 관계를 이해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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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심-공포’는 ‘인정욕구’라는 동전의 양면


‘욕심’과 ‘공포’는 ‘인정욕구’라는 동전의 앞 뒷면이다. 무엇인가를 얻을 수 있다는 ‘욕심’이 커질수록, 무엇인가를 잃을 수 있다는 ‘공포’도 커진다. 이 ‘욕심’과 ‘공포’는 모두 타인으로부터 인정(관심‧칭찬)받고 싶은 욕구로부터 발생한다. 무엇인가를 얻을 수 있다는 ‘욕심’은 근본적으로 세상 사람들로부터 인정(관심·칭찬)받고 싶다는 ‘욕심’이다. 무엇인가를 잃을 수 있다는 ‘공포’ 역시 마찬가지다. 그 ‘공포’는 근본적으로 세상 사람들의 인정(관심·칭찬)을 받지 못할, 달리 말해 비난받을 것에 대한 ‘공포’이다.


우리는 왜 사장 앞에서 위축되는 걸까? 사장에게 ‘인정’받아 세상 사람들(부모·배우자·동료·친구·자녀··)의 ‘인정’을 얻고 싶다는 ‘욕심’을 채우고 싶어서다. “나는 이렇게 훌륭한 아들·남편·아빠·친구야!” 동시에 사장에게 ‘인정’받아 세상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공포’를 벗어나고 싶어서이다. “나는 이렇게 무능한 아들·남편·아빠·친구구나!” 그렇다. 위축되고 당당해지지 못하는 것은 언제나 ‘인정욕구’의 문제다. 이런 위축의 발생 원리를 이해하면 ‘시니시즘’이 어떻게 당당함을 주는지도 이해할 수 있다.


시니시즘의 핵심은 인정욕구를 넘어선다는 데 있다. ‘시니시즘’적으로 사는 이들은 ‘욕심’도 ‘공포’도 느끼지 않는다. 당연하지 않은가? ‘시니시즘’은 사회가 지정한 관습·전통·교육·윤리 등을 넘어서서 인간의 본성에 따라 자연스럽게 살아가려는 삶의 태도 아닌가? 이런 삶의 태도를 지향하는 이들에게는 무엇인가를 얻고 싶은 ‘욕심’도, 무엇인가를 잃을 ‘공포’도 없다. 누군가에게 칭찬받고 인정받으려는 마음이 이미 없기 때문이다. 누구보다 디오게네스의 힘을 정확히 알아본 니체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시노페의 시민들이 디오게네스를 추방형에 처했을 때, 그는 무슨 말을 했던가? “그렇다면 나는 그들을 ‘시노페에 남아 있어야 하는 형벌’을 내리노라.” …해적들이 디오게네스를 잡아서 노예시장의 ‘얼간이 돈주머니들’ 앞에 세웠을 때 디오게네스는 무슨 말을 했던가? “어서들 와서 그대의 주인을 사가 게나!” 『니체 자서전 : 나의 여동생과 나』 프리드리히 니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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뻔뻔함과 당당함 사이


디오게네스는 그가 살았던 지역(시노페)에서 추방당했을 때 당당하게 말했다. “너희들에게 무지랭이들만 남은 시노페에 남아 있을 형벌을 내린다!” 해적들에게 잡혀가 노예로 팔릴 운명 앞에서도 디오게네스는 당당하게 말했다. “얼간이들아, 너희들의 주인을 사갈 수 있는 기회를 주겠노라!” 이것이 ‘시니시즘’의 당당함이다. 고대 그리스부터 지금까지 세상 사람들의 차가운 시선이 사라진 적은 없다. 그 앞에서 위축되지 않고 당당해지는 방법은 ‘시니시즘’을 통해, 일체의 인정욕구를 벗어버리는 길밖에 없다.


비범한 디오게네스와 달리 평범한 우리들은 ‘시니시즘’을 체화하기 어렵다. 인정욕구를 벗어버리는 일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인정욕구는 인간이란 존재에게 저주처럼 들러붙은 숙명 같은 것 아닌가? 이런 숙명 앞에서 어떻게 ‘시니시즘’적으로 살 수 있을까? 수행이 필요하다.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행. 사회적 관습·전통·교육·윤리를 내면화한 우리는 그것을 벗어나려고 할 때 너무 쉽게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지 않던가? 많이 배우지 못해서, 취업을 못 해서, 가난해서, 결혼을 못 해서 위축되는 것은 그런 자신의 모습이 부끄럽기 때문 아닌가?


세상 사람들의 차가운 시선 앞에서 당당해지기 위해서는 먼저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을 연습이 필요하다. 그 연습은 뻔뻔해지기다. “넌 왜 대학을 안 갔어?”라고 많이 배운 이가 물으면 이렇게 답해주자. “많이 배운 놈들이 더 나쁜 짓을 많이 해서요” “넌 왜 아직도 취업을 못 했니?”라고 직장인이 물을 때 이렇게 답하자. “직장은 바보들이나 다니는 곳인 것 같아서요” “넌 왜 결혼을 안 하냐?”라고 아버지가 물으면 이렇게 답해주자. “아버지가 전혀 안 행복한 것 같아서요.” 이런 뻔뻔함이 필요하다. 이런 뻔뻔함이 없다면, 내면화된 사회적 질서가 남긴 부끄러움에서 벗어나기는 요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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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당함=뻔뻔함×자기성찰’이다.


물론 뻔뻔함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뻔뻔함이 곧 당당함은 아니기 때문이다. 뻔뻔함에는 기만적 ‘정신 승리’와 유아적 ‘어깃장’, 그리고 몰염치한 ‘후안무치’의 측면이 있다. 취업을 하고 싶지만 취업이 되지 않아 “직장은 바보들이나 같은 곳이야”라고 말하는 기만적 ‘정신 승리’와 유아적 ‘어깃장’을 당당함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또 노인과 임산부를 앞에 두고 최소한 염치도 없이 노약자석을 차지하고 있는 후안무치한 이를 당당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단순히 부끄러움이 없다고 해서 모두 당당함인 것은 아니다. 당당함은 무엇일까? 도식화하자면, ‘당당함=뻔뻔함×자기성찰’이다. 즉, 당당함은 깊이 성찰한 뒤에 뻔뻔해질 수 있는 지혜이며, 또한 뻔뻔하게 행동한 뒤에 자신을 돌아보는 성찰로 얻을 수 있는 지혜다. 당당함이란 지혜는 이렇게 정의할 수 있다. 부끄럽지 말아야 할 것 앞에 부끄럽지 않기!


우리는 부끄럽지 말아야 할 것 앞에서 부끄러움을 느낀다. 이런 우리가 당당함이라는 지혜를 얻기 위해서는 먼저 뻔뻔해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여기서 멈춰서는 안 된다. 나의 뻔뻔함이 기만적 ‘정신 승리’나 유아적 ‘어깃장’ 혹은 몰염치한 ‘후안무치’는 아닌지 성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우리는 진정한 당당함을 얻을 수 있다. 니체는 디오게네스의 ‘시니시즘’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디오게네스는 철학자가 됨으로써 자신의 존엄성을 끝까지 지켰다. 『니체 자서전 : 나의 여동생과 나』 프리드리히 니체


디오게네스는 뻔뻔한 개가 아니었다. 그는 당당한 철학자였다. 뻔뻔함과 자기성찰을 통해 일체의 인정욕구를 벗어던져서 진정한 당당함에 이른 비범한 철학자. 비범한 디오게네스의 삶이 평범한 우리에게 당당해질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 누구 앞에서든 뻔뻔해지라! 그리고 끊임없는 자기성찰을 하라! 이 두 가지만 기억하면 우리 역시 당당해질 수 있다. 그렇게 진정한 당당함에 이르렀을 때, 세상 사람들의 지독한 비난과 차가운 시선에도 불구하고 니체의 말처럼 “자신의 존엄을 끝까지 지켜나갈 수 있다” 당당함이란 그런 것이니까.

수,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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