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도哀悼

변하는 것들이 있다. 아니 모든 것들이 변한다. 늘 내 곁에 있어 줄 것이라 믿었던 것들이 떠나갈 때가 있다. 변하는 것들은 언제나 상실감을 준다. 빈자리. ‘너’가 있어야 할 자리, ‘너’가 있던 내 마음의 자리. 그곳이 비어버린 상실감. 삶이란 그 상실감을 견딘다는 말과 동의어였다. 그 삶의 진실을 마주하게 된 뒤에 의문이 들었다. 왜 견뎌야 하는 걸까? 그 지독한 상실감을 견뎌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많은 것들을 떠나보내며 내 마음에는 크고 작은 구멍이 생겼다. 그 구멍으로 찬 바람이 휑하고 들어올 때마다 생각했다. 이 지독한 상실감이 내 삶에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가? 거기에는 아무 의미도 없고, 그저 끊임없는 상실감을 버티며 사는 것뿐인 걸까? 차가웠던 어느 겨울날, 그 겨울보다 더 차가웠던 어느 병원에서, 어머니가 죽음을 향해가고 있다는 사실을 들었던 날도 그랬다.


불운이었을까? 행운이었을까? 온갖 검사를 하느라 초주검이 된 어머니를 집으로 돌려보내고 남양주 어느 고등학교로 수업을 하러 갔었다. 그곳에는 아이들이 웃으며 축구를 하고 있었고, 여기저기서 아이들이 모여 깔깔거리며 라면을 먹고 있었다. 새싹들.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새싹의 들판에 서서 미소가 번졌다. 수도 없이 읽고 또 읽었던 이야기들이 가슴 속에 깨달음으로 와서 박혔다.


삶은 이런 것이구나. 누군가는 죽어가지만, 누군가는 태어나고 있구나. 누군가는 늙어가지만, 누군가는 새싹처럼 자라고 있구나. 이것이 삶이구나.


상실감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 왜 상실감을 견뎌야 하는지 알게 되었다. 내 마음 생긴 구멍으로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거구나. 그 빈 자리는 찬 바람이 들어오는 곳이기도 하지만, 새싹들이 들어오는 곳이기도 하구나. 지금 누군가를 떠나보내고 있을 이들처럼, 나 역시 언젠가 소중한 ‘너’를 많이도 떠나보냈고, 또 앞으로도 떠나보내게 되겠지. 그때의 상실감은 또 말할 수 없이 아프겠지.


하지만 이제 그 상실감을 조금은 더 잘 견딜 수 있을 것 같다. 내 마음에 너무 많은 ‘너’가 떠난다면 나는 그만큼의 사랑을 할 수 있게 되는 거겠지. 내 마음에 너무 큰 ‘너’가 떠난다면, 나는 그만큼의 사랑을 할 수 있게 되는 거겠지. 그렇게 사랑하다, 언젠가 나 역시 ‘너’가 있는 곳으로 갈 수 있게 되는 거겠지. 아마 이것이 내가 찾은 애도哀悼의 방식인가 보다. 나는 앞으로도 찾아올 이별 역시 그렇게 애도하며 살아가고 싶다.


‘너’를 떠나보낸 모든 이들이 자신만의 애도 방식을 찾게 되기를 소망한다. 지금 ‘너’가 떠난 것처럼, 또 다시 더 많은 더 소중한 이들이 떠나게 될 테니까. 그게 삶이니까. ‘너’와 함께 했던, 좋은 추억도, 아팠던 기억도 마음에 꼭 간직하고, ‘너’를 잘 보내주기를. 비어가는 ‘너’를 보며, 이제 비어버린 자리를 보며 흘렸던 눈물만큼 아름다운 사람이 될 수 있기를. 나도, 너도, 이름 모를 우리도 그렇게 더 아름다운 사람이 될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