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플스테이와 명상
“템플스테이 다녀올까 봐.” 한 친구가 지친 표정으로 말했다. 그 친구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알고 있다. 방송 관련 일을 하는 그 친구는 늘 정신없이 바쁘다. 헐떡거리며 한 주 방송을 마무리하면 또 돌아오는 업무에 대한 압박, 그리고 그사이에 발생하는 사람 사이의 복잡 미묘한 갈등과 마찰. 그 모든 일들에 쫓기며 사느라, 걱정‧긴장‧불안에 단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다. 이것이 그 친구가 종종 휴가를 받아 절을 찾는 이유다. 한적한 산속, 고즈넉한 사찰에 며칠을 머무르면 마음이 편안해지기 때문이다.
요즘은 온갖 자극적인 영상이 넘쳐나는 시대다. 흥미로운 점은 이런 시대에 명상 관련 영상도 적지 않게 재생산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적지 않은 이들이 명상에 관심을 갖고 있다. 그런데 이는 사실 의아한 일이 아니다. 요즘은 얼마나 복잡하고 또 바쁜 사회인가? 누구나 갖가지 걱정‧긴장‧불안 등을 안고 산다. 그 때문에 단 하루도 아니 단 몇 시간도 마음 편한 날이 없다. 늘 복잡하고 뒤엉킨 마음에 시달리며 산다.
이런 마음(걱정‧긴장‧불안)을 손쉽게 회피하려고 자극적인 영상을 찾는다. 하지만 그 끝에는 더 복잡하고 뒤엉킨 마음이 있을 뿐이다. 맵고 짠 음식을 먹으면 잠시는 스트레스가 해소되는 것 같지만 하루 종일 배가 아픈 것처럼 말이다. 이것이 자극적인 영상 홍수의 시대에, 명상 관련 영상이 적지 않게 재생산되고 있는 이유다.
‘템플스테이’에서 ‘명상’을 해도 편안한 마음에 이를 수 없다.
명상은 편안한 마음에 도움이 되는가? 명상을 하면 복잡하고 뒤엉킨 마음이 정돈될 수 있다고 믿는다. ‘좋은 생각’ ‘생각 비움’ ‘마음 챙김’ ‘호흡 명상’ ‘걷기 명상’ 등등의 표어를 내세운 명상이 유행처럼 번지는 이유는 분명하다. 조금이라도 마음이 편안해지기를 바라서다. 이러한 명상은 정말 편안한 마음에 도움이 되는가? 그렇지 않다.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라면, 이것들 역시 자극적인 영상과 다르지 않다.
‘템플스테이’ 동안에는, ‘명상’ 영상을 틀어 놓은 동안에는 ‘좋은 생각’ ‘생각 비움’, ‘마음 챙김’ ‘호흡명상’ ‘걷기 명상’으로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 같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그때뿐이다. 절을 나서고, 영상을 끄고 현실로 돌아오는 순간 다시 온갖 걱정‧긴장‧불안에 잠식당하게 마련이다. 그렇게 편안한 마음은 짧은 순간으로 끝나버린다. 템플스테이로도 명상으로도 편안한 마음에 이르지 못한 이들은 처음부터 다시 질문해야 한다. 어떻게 해야 마음이 편안해질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스토아학파를 통해 답해보자.
스토아학파의 ‘결정론’
스토아학파는 헬레니즘 시대(대략, BC323~BC30)부터 고대 후기까지 큰 영향을 미친 철학사조이다. 스토아stoa학파에서 ‘스토아’는 사람 이름이 아니다. 이는 그리스어로 ‘강당’이란 뜻인데, 이는 스토아학파의 창시자인 제논(BC335~BC263)이 아테네의 ‘얼룩덜룩한 강당stoa-poikile’에서 제자들을 가르친 데서 유래했다. 이 학파의 철학을 공유하는 많은 이들을 묶어서 스토아학파라고 한다.
어떻게 편안한 마음에 이를 수 있는가? 이 질문에 스토아학파라면 이렇게 답해줄 테다. “아파테이아apatheia에 이르면 된다.” 스토아학파의 중요 개념 중 하나인 ‘아파테이아’는 흔히, 부동심不動心이라고 번역된다. 즉 이는 어떤 외부적 상황에서도 동요되지 않는 평온한 마음 상태를 의미한다. 그러니 ‘아파테이아’에 이르면 걱정‧긴장‧불안 같은 복잡하고 뒤엉킨 마음으로부터 벗어나 편안한 마음 상태에 이르게 된다고 말할 수 있다.
문제는 그 ‘아파테이아’의 상태에 어떻게 이를 수 있느냐는 것이다. 먼저 스토아학파의 세계관부터 알아보자. 스토아학파는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았을까? 대표적인 스토아학파이자, 로마제국의 황제였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그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 일은 우주가 시작된 이래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그리고 여러 서로 얽히고설킨 여러 원인들은 먼 옛날부터 그대의 운명에 의해 발생할 일들을 이미 그물처럼 엮어놓았다. 『명상록』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스토아학파의 세계관은 운명‧숙명적 결정론이라고 말할 수 있다. 스토아학파는 세계가 이미 다 결정되어 있다고 본다. 이미 완성된 영화 한 편을 생각해 보자. 스토아학파는 세계와 그 세계 속의 우리네 삶이 바로 한 편의 영화와 같다고 본다. 영화를 볼 때, 주인공이 언제 사랑에 빠지는지, 언제 이별하는지, 또 결말이 어떤지 알 수 없어서 손에 땀을 쥐며 보게 된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이미 다 정해져 있다.
우리가 영화의 내용을 알든 모르든, 그 영화의 인과관계와 결말은 이미 다 정해져 있다. 영화를 끝까지 다 보기 전에는 이러한 사실들을 다 알 수 없다고 하더라도, 영화 속 이야기가 이미 다 결정되어 있다는 것은 알고 있다. 세계와 삶 역시 이와 마찬가지다. 모든 것이 운명처럼 다 결정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스토아학파의 세계관이다.
개인보다 전체!
스토아학파의 이런 결정론적 세계관은 자연스럽게 개인보다 전체를 중시하는 사유로 나아가게 된다. 당연하지 않은가? 세계에 이미 정해진 질서가 있다면 인간은 이러한 결정된 질서를 파악하고 그 질서를 따르려고 노력해야만 한다. 영화의 각본과 그에 따른 배역은 이미 모두 결정되어 있다. 그러니 훌륭한 배우라면, 자신이 주연인지 조연인지 아니면 엑스트라인지를 스스로 잘 파악하고 각자 역할에 충실해야만 한다.
스토아학파에 따르면, 인간들은 이미 결정된 질서를 파악하지 못하기에 그 질서에 따르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쉽게 말해, 엑스트라가 조연이 되려고 하고, 조연이 주연 배우의 자리를 욕심내고, 주연 배우가 감독이 되려고 하는 경우는 흔하다는 것이다. 스토아학파는 이런 인간의 욕심‧욕망을 버려야 할 대상으로 보았다. 어떤 경우에도 이미 결정된 질서에 따르는 것이 가장 중요하며 훌륭하다고 보았다. 이에 대해 아우렐리우스는 이렇게 말한다.
운명에서 오는 것 ‧‧‧ 거기에는 필연이 있으며, 이것은 모든 우주에 유익한 것이며 그대도 그 우주의 한 부분이다. 자연 전체가 가져다주는 것과 자연 전체를 보존하는데 유익한 것은 자연의 모든 부분에 유익하다. 그대는 이 원리로 만족하고 이를 언제나 그대의 원칙으로 삼으라. 『명상록』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아우렐리우스에 따르면, 우주(세계 전체)는 모든 것이 결정된 필연적인 운명이다. 개인들은 그 전체를 구성하는 부속품이다. 비유하자면, 개인은 손·발이며, 자연 전체는 인간 자체인 셈이다. 그러니 “자연 전체(인간)를 보존하는 데 유익한 것은 자연의 모든 부분(손발)에 유익”하다고 말하는 것은 당연하다. 중요한 것은 개인(손·발)가 아니라 ‘전체’(인간)니까 말이다. 스토아학파에 따르면, 좋고(이롭고) 나쁜(해로운) 것의 기준은 개별자들에게 속해 있지 않다. 전체의 본성에 속해 있다. 바로 여기서 스토아학파의 금욕주의가 정체를 드러낸다.
‘금욕주의’의 탄생
“괴로움을 참고 견디고, 쾌락을 버려라sustine et abstine!” 이것이 스토아학파의 핵심적인 가르침이다. 스토아학파가 개별자들의 욕망과 고통을 바라보는 관점은 분명하다. 개별자의 욕망이 전체에 해롭다면 그 욕망은 억눌러야 한다. 또 개별자의 고통이 전체에 이롭다면 그 고통은 견뎌야 한다. 왜냐하면 전체가 이로울 때 개별자의 이익이 도모되는 것이지, 개별자의 이익이 전체의 이익에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스토아학파가 말하는 지혜로운 자는 어떤 사람인가? 전체 질서 속에서 자신의 운명을 아는 사람이며, 그 운명을 충실히 따르기 위해 개인적인 욕심‧욕망을 참으며 고통을 견뎌내는 사람이다. 인간은 저마다의 바라는 것과 피하고 싶은 것들이 있다. 하지만 스토아학파는 그런 인간의 욕망을 억누르고 고통을 견디면서 결정된 전체 질서에 충실히 복무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는 지금 우리네 삶과는 상관없는 아주 먼 옛날이야기인가? 그렇지 않다.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사는 건 나쁜 거야!’ ‘괴로움을 견디며 사는 게 좋은 거야’ ‘전체를 위해 개인은 희생해야지!’ 이런 말들에 고개를 끄덕이는 이들이 여전히 존재하지 않은가? 이처럼 우리 시대에도 스토아학파의 잔재는 여전히 남아 있다.
감정이 없는 상태, ‘아파테이아’
이제 우리는 스토아학파의 ‘아파테이아’, 즉 가장 이상적인 평온한 마음 상태가 무엇인지, 또 그것에 어떻게 이를 수 있는지 알 수 있다. ‘아파테이아apatheia’는 ‘감정’(정념‧격정‧욕망)을 의미하는 ‘파토스pathos’에 부정을 의미하는 ‘아a’가 결합된 단어다. 즉, ‘아파테이아’는 일체의 인간적 감정(욕망‧정념‧격정)에서 초연한 상태인 셈이다. 스토아학파는 인간의 감정을 ‘쾌락‧불쾌‧욕망‧공포’ 이 네 가지로 구분했는데, 이 네 가지 감정을 초월한 상태가 바로 ‘아파테이아’다. 쉽게 말해, 아무리 화가 나는 일이 있어도 분노하거나 좌절하지 않으며, 아무리 기쁜 일이 있어도 즐거워하거나 설레지 않는 상태다.
이 ‘아파테이아’는 정말 우리가 지향해야 할 마음일까? 이는 분명 ‘부동심’(평온한 마음)이지만, 동시에 ‘무감정’의 상태라고도 말할 수 있다. ‘부동심’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모든 감정을 제거해야만 한다. 감정이 남아 있는 한, 우리는 언제나 요동치는 마음에 시달릴 수밖에 없으니까. ‘아파테이아’는 지혜로운 자의 평온한 마음처럼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웃음도 눈물도 없는, 차가운 사이코패스의 마음처럼 보이기도 한다. 현대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은 이런 스토아학파의 철학에 대해 날카롭게 진단한 바 있다.
여기에는 스토아학파의 덕(지혜) 개념에 포함된 냉담의 요소가 어울린다. 나쁜 감정뿐만 아니라 모든 감정을 비난한다. 현자는 동정심을 느끼지 않는다. 아내와 자식이 죽더라도, 현자는 아내와 자식의 죽음이 자신의 덕에 방해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기 때문에 그다지 괴로워하지도 않는다. 『러셀의 서양철학사』 버트런드 러셀
‘아파테이아’는 편안한 마음이 아니다.
‘아파테이아’에 이르면 정말 평안한 마음에 이를 수 있을까? 즉, 우리의 모든 감정을 제거하면 될까? 그럴지도 모르겠다. 모든 감정을 제거하면 요동칠 마음 역시 없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이것이 정말 우리가 바라는 것일까? 우리가 바랐던 것이 사랑하는 이와 함께 할 때의 기쁨을 제거하기 위해서인가? 사랑하는 이의 죽음 앞에서 그 어떤 슬픔도 느끼지 않기 위해서인가? 그것은 우리가 편안한 마음을 바랐던 이유가 아니다.
우리는 왜 평안한 마음을 바랐던 걸까? 더 적은 슬픔과 더 큰 기쁨을 위해서다. 그런데 이 슬픔과 기쁨 자체가 이미 감정 아닌가? 그러니 좋은 감정과 나쁜 감정을 모두 제거해 ‘아파테이아’에 이르려는 시도는 얼마나 어리석으며 또한 위험한가. 템플스테이와 명상으로 편안한 마음에 이르려는 이들도 같은 실수를 저지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좋은 감정이든, 나쁜 감정이든 그것은 어디서부터 오는가? 바로 타자다. 우리는 타자 때문에 기쁘고, 또 타자 때문에 슬프다. 템플스테이와 명상을 찾는 이들의 속내는 바로 이 타자를 없애고자 하는 마음이다. 산속에서 혹은 스마트폰 앞에서 홀로 있으며 타자로부터 촉발되는 감정 자체를 제거하려는 것이다. 템플스테이나 명상 등으로 편안한 마음에 이르려는 혹은 이를 수 있다고 믿는 이들에게서 염세주의나 허무주의 냄새가 짙게 배어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아파테이아’의 끝에는 염세주의와 허무주의가 도사리고 있다. 우리네 삶에서 죽음 이외에는 타자를 근본적으로 제거할 방법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타자를 제거해 감정을 제거하려는 이들은 결국 ‘나도 세상도 변하지 않으니 모든 것은 무의미하다’는 염세주의나 허무주의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아파테이아’를 바라는 이들은 알고 있을까? 그들이 끝내 바라는 세계는 웃음도 울음도 없는 사라진 무색무취의 차가운 세계라는 사실을 말이다.
‘아파테이아’ 말고 ‘해탈’
그렇다면 우리는 끝내 편안한 마음에는 이를 수 없는 것일까? 시간과 공간 훌쩍 넘어 600년대 신라시대의 탁월했던 불교 철학자 원효에게 답을 구해보자. 불교는 인간에게는 두 가지 마음이 있다고 말한다. ‘집착‧번뇌의 마음’과 ‘해탈의 마음’이다. ‘집착‧번뇌의 마음’은 걱정‧긴장‧불안으로 요동치는 마음이라 할 수 있고, ‘해탈의 마음’은 편안한 마음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그토록 바랐던 평안한 마음은 바로 ‘해탈의 마음’이다. 원효는 해탈에 이르는 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움직이지 않는 물에 바람을 불면 물결이 생기며 움직이는 물이 된다. 움직임動과 고요함靜은 다르지만 물의 본체는 하나이므로, 고요한 물靜水에 의하여 움직이는 물動水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대승기신론 소‧별기』 원효
원효는 인간의 마음을 물에 비유하고 있다. 호수가 있다. 그 호수의 물이 요동치는 것은 마음이 요동치는 상태이고, 물이 고요해진 상태는 마음이 평안한 상태인 셈이다. 원효는 먼저 “움직이지 않는 물에 바람 불 때 움직이는 물이 된다.”고 말한다. 여기서 바람은 타자다. 우리에게 온갖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타자. 원효는 타자가 우리의 걱정‧긴장‧불안을 불러일으키는 타자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원효의 말에는 의아한 지점이 있다. “고요한 물에 의하여 움직이는 물이 있다”는 말이다. 이는 평안한 마음에 의하여 요동치는 마음(걱정‧긴장‧불안)이 있다는 의미다. 이것이 무슨 말인가? 평안한 마음에 이르면 바라는 것을 이룬 것 아닌가? 그런데 원효는 그 평안한 마음에 이르면 비로소 요동치는 마음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 의아한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해탈의 마음’이 아닌 ‘해탈의 집착’
해탈은 돈‧명예‧젊음‧외모 등등 모든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워져 평안한 마음에 이른 상태다. 불교에서는 이 ‘해탈의 마음’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종파를 불문하고 모든 승려 혹은 불교 철학자들은 ‘해탈의 마음’에 어떻게 이를 것인지에 대해 고민했다. 바로 여기서 해탈의 기묘한 역설이 발생하게 된다. 바로 ‘해탈의 집착’이다. 즉 어떤 경우에도 평온한 마음을 유지하고자 하는 집착이 발생한 것이다.
어떤 경우에도 고요한 마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타인과 교감하고 공감해서는 안 된다. 기쁜 타자를 만날 때 나도 기쁨과 희망으로, 슬픈 타자를 만날 때 슬픔과 우울로 마음이 요동치게 될 테니까. 원효는 이 기묘한 역설을 날카롭게 포착했다. “고요한 물에 의하여 움직이는 물이 있다” 원효의 의아한 말을 이제 이해할 수 있다.
고요한 마음이 없다면 타인의 요동치는 마음을 읽을 수도 껴안아 줄 수도 없다. 그러니 가장 먼저 자신의 마음을 고요하게 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은 끝이 아니다. 고요한 마음에 이르려고 했던 이유는 타인의 요동치는 마음을 받아 안아주기 위해서니까. 고요한 마음을 끝으로 여길 때, ‘해탈의 집착’이 시작된다.
누가 뭐래도 불교의 핵심은 자비심(사랑)에 있다. 해탈은 자비를 위해 필요한 것이지 그 자체가 목적일 수 없다. 원효는 ‘해탈의 집착’이 자비심(사랑)을 가로막는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이것이 많은 승려들이 깊은 산 속에서 고고하게 수행을 하고 있을 때, 원효는 광대들이 가지고 노는 바가지를 들고 온 신라 땅 누비며 번뇌에 시름하는 타자를 만나러 다녔던 이유였을 테다.
‘해탈의 마음’에 이르는 길!
‘해탈의 집착’은 스토아학파의 ‘아파테이아’와 닮아있다. 아파테이아에 이르기 위해 모든 감정을 제거해 버리려 했던 스토아학파와 ‘해탈(고요한 마음)의 집착’으로 중생을 사랑하는 마음(자비심)을 놓쳐버린 일부 승려들은 놀랍도록 닮아있다. 그렇다면 ‘해탈의 집착’이 아니라 ‘해탈’에 이르는 길은 무엇일까?
다시 호수의 예로 돌아가자. 같은 바람이 분다고 해서 모든 호수가 같은 크기로 요동치지 않는다. 만약 호수 안이 요동치고 있다면 같은 바람이 불어도 물은 더욱 크게 요동칠 것이고, 반대로 호수 안이 고요하다면 같은 바람이 불어도 물은 적게 요동칠 것이다. 외모 콤플렉스가 있는 이와 없는 이 두 사람에게 “넌 못생겼어”라고 말했다고 해보자. 이 말은 둘에게 같은 크기로 마음을 동요시키지 않는다. 전자에게는 큰 요동을 후자에게는 미약한 요동을 만든다.
호수(마음)가 요동치는 원인은 엄밀히 말해 두 가지다. ‘나의 마음’과 ‘타자와 마주침’ 먼저 ‘나의 마음’에 관해 이야기해 보자. 호수 안이 요동치고 있다면 외부의 바람이 불지 않아도 호수는 요동친다. 즉 ‘나의 마음’이 이미 돈에 대한 집착, 미래에 대한 불안, 외모‧학벌에 대한 피해의식 등으로 요동치고 있다면 ‘타자와 마주침’이 없어도 내 마음은 요동친다. 이것이 그저 ‘타자와 마주침’만을 제거하려는 템플스테이와 명상으로 마음이 편안해지지 않는 이유다. ‘해탈의 마음’으로 가기 위한 첫 번째 단계는 바로 온갖 집착으로 얼룩진 ‘나의 마음’을 고요하게 하는 일이다.
하지만 문제가 하나 더 있다. 호수 안이 고요해져도 바람이 거세게 불면 다시 물은 요동치게 된다. 즉, ‘나의 마음’이 고요해져도 온갖 슬픔을 주는 ‘타자와의 마주침’은 다시 마음을 요동치게 만들기 마련이다. 이 문제는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점점 더 깊은 호수가 되면 된다. 얕은 호수는 작은 바람에 쉽게 요동치지만, 깊은 호수는 쉽사리 요동치지도 않고 요동치더라도 금세 고요해지니까 말이다.
요동 넘어 공명共鳴!
호수(마음)는 어떻게 깊게 할 수 있을까? 절에서 나와, 명상 영상을 끄고, 사랑하는 이(타자)들을 만나러 가야 한다. ‘나의 마음’이 고요해진 이들은 타자를 만나 그들이 기뻐할 때 함께 기뻐하고 그들이 슬퍼할 때 함께 슬퍼할 수 있다. 이것은 요동이 아니라 공명共鳴이다. ‘나’의 마음(물)과 ‘타인’의 마음(물)이 더해지면서 넘실거리게 되는 공명! 이렇게 공명하는 동안 우리의 호수(마음)는 더욱 깊고 커지게 된다.
우리의 호수(마음)가 충분히 깊어졌을 때, 우리에게 집요하게 슬픔을 주려는 타자와 마주치더라도, 쉽사리 마음이 요동치지 않게 된다. 만약 요동치더라도 이내 잔잔해진다. 깊은 호수(마음)는 작은 바람(타자)에는 요동치지 않는다. 설사 만약 큰 바람(타자)이 찾아왔다고 하더라도, 이내 잔잔해지게 마련이다. 진정으로 평안한 마음은 ‘타자의 제거’가 아니라 ‘타자의 만남’에 있다.
편안한 마음을 원한다면 두 가지 과정이 필요하다. 첫 번째는 ‘나의 마음’ 속에 있는 요동(돈에 대한 집착, 미래에 대한 불안, 외모 콤플렉스 등등) 들을 차분히 응시해야 한다. 그렇게 ‘나의 마음’ 안의 요동부터 고요하게 해야 한다. 만약 템플스테이와 명상이 편안한 마음에 도움이 된다면 이 첫 번째 과정을 돕기 때문일 테다. 두 번째는, ‘나의 마음’ 속이 고요해졌다면, 이제 사랑하는 이들을 만나 기쁨과 슬픔의 공명을 만끽해야 한다. 그 과정을 통해 우리의 호수는 넓어질 테고, 그렇게 우리는 요동치는 마음이 찾아와도 이내 스스로 고요한 마음이 된다. 이 과정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잘 안다. 하지만 편안한 마음, 그 좋은 것이 공짜일 리 없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