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아학파의 철학에는 심각한 모순이 하나 있다. 그것은 운명과 자유 사이의 모순이다. 스토아학파의 세계관은 운명론적 결정론이다. 세계의 질서는 모든 것이 운명처럼 이미 결정되어 있다. 이는 스토아학파가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이에 대해 대표적인 스토아학파 철학자인 에픽테토스는 노골적으로 말한 바 있다.
기억하라. 너는 작가가 원하는 대로 정해진 연극의 배우다. 만일 그가 짧기를 원하면 연극은 짧고, 그가 긴 것을 원하면 연극은 길다. 네가 거지의 배역을 맡을 것을 원한다면, 그것을 능숙하게 연기해야 한다. 만일 그가 절름발이, 지배자, 시민의 배역을 주어도 마찬가지이다. 오직 주어지는 배역을 훌륭하게 수행하는 것만이 너의 임무이다. 그러나 배역을 선택하는 것은 다른 이의 일이다. 『엔케이리디온Encheiridion』 에픽테토스 (아리아노스 엮음)
에픽테토스가 말하는 “작가”는 ‘신’(우주의 영혼)이다. 여기서 ‘신’은 기독교의 신이 아니다. 스토아학파는 모든 생명과 사유들이 나오는 근원을 우주라고 보았고, 이 우주 자체를 하나의 생명체로 보았다. 그 우주라는 생명체의 영혼이 바로 ‘신’이다. 기독교의 신이든, 스토아학파의 신이든, 신은 우리의 운명을 모두 결정해 놓은 존재다. 스토아학파 안에서 인간은 그저 작가(신)가 결정해 놓은 배역(운명)에 의해 살아가게 될 뿐이다. 그런데 이와 동시에 스토아학파는 공공연하게 자유의지를 강조한다.
신들은 우리에게 속하는 것으로서, 욕구하는 힘과 단념하는 힘, 노력하는 힘과 회피하는 힘, 즉 일반적으로 말해서, 표상을 사용하는 힘을 우리에게 주었다. 『담화록diatribai』 에픽테토스(아리아노스 엮음)
에픽테토스는 신이 인간에게 무엇을 욕구하거나 단념하는 힘, 노력하거나 회피하는 힘을 주었다고 말한다. 이 힘은 자유의지다. 인간은 스스로 무엇을 욕구하거나 단념하고, 노력하거나 회피할 수 있다. 이는 자유의지다. 스토아학파는 이 자유의지를 가지고 전체를 위해 금욕적으로 생활하라고 역설한다. 그런데 의하지 않은가? 모든 것이 이미 정해져 있다면 왜 그래야 하는가? 개인을 위해 욕망을 좇으며 살 운명인 이들은 결국 그렇게 살게 될 테고, 전체를 위해 금욕적으로 살 운명인 이들은 결국 그렇게 살게 되는 것 아닌가?
자유의지는 정해진 운명을 넘어설 힘이다. 무엇인가를 욕구하거나 단념하고, 노력하고 회피할 힘이 있다면, 우리는 이미 결정된 운명을 바꿔나갈 수 있다. 신이 우리에게 평생 뚱뚱한 운명을 결정해 놓았다고 하더라도, 자유의지가 있다면 그 운명을 바꿀 수 있다. 날씬 삶을 욕구해서 열심히 운동(노력)하고, 기름지고 자극적인 음식을 단념할 힘이 있기에 주어진 운명을 바꿀 수 있다.
하지만 스토아학파의 자유의지는 기묘하다. 스토아학파의 자유는, 운명을 거부할 자유가 아니라 운명을 받아들일 자유다. 하지만 이는 자유가 아니다. 선택지가 하나뿐인 자유가 어찌 자유일 수 있단 말인가. 자유의지가 있다면 운명은 무의미한 것이고, 운명이 정해져 있다면 자유의지는 무의미한 것이다. 스토아학파는 운명과 자유를 모두 인정함으로써 스스로 모순을 자처했다.
스토아학파는 왜 이런 모순에 빠졌을까? 삶의 진실을 왜곡하면 반드시 모순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세계는 운명적으로 결정되어 있지 않다. 세계는 우발적 마주침에 의해서 늘 역동적으로 변화한다. 이것이 삶의 진실이다. 이는 개인(욕망)보다 전체(질서)를 중요하게 여기는 스토아학파에게 큰 위험 요소였을 테다. 스토아학파의 운명과 자유 사이의 모순은 바로 이 위험을 제거하기 위한 불가피한 결론이었을 테다.
우발성은 곧 자유다. ‘직장을 계속 다닐 것인가? 그만둘 것인가?’ 선택의 기로에 섰다고 해보자. 이때 어느 날, 우발적으로 회사를 그만둘 수 있는 것이 자유다. 이 자유(우발성)를 인정하는 순간, 스토아학파의 운명적 결정론은 무너지게 마련이다. 평생을 월급쟁이로 살다 죽는 배역을 맡은 이가 갑자기 회사를 그만두면 영화 자체가 무너지게 된다. 스토아학파는 이러한 상황을 우려했던 것일 테다.
즉, 모두가 자유(우발성)로워져서 결정된 운명 같은 건 없다는 진실이 폭로되는 것도, 또 그로 인해 개인보다 전체를 중시하는 사회 질서가 무너지는 것도 방치할 수 없었던 것일 테다. 그래서 자유를 인정하되, 그 자유는 오직 운명을 받아들일 자유일 뿐이라는 모순적인 논의를 펼칠 수밖에 없었던 것일 테다.
스토아학파는 자유와 운명을 상황에 따라 자신들의 입맛에 따라 사용한다. 진정한 자유(기쁨)를 아직 맛보지 않은 이들에게는 운명을 강요한다. (“운명은 정해져 있으니 자유에는 관심 갖지 마!”) 또한 진정한 자유를 맛본 이들에게는 거짓된 자유를 강요한다. (“너에게는 욕망의 기쁨을 버리고 고통을 참고 견딜 자유의지가 있어!”) 이것이 스토아학파의 전략이었다. 스토아학파는 이를 통해, 삶의 진실을 은폐하고 자신들의 거짓된 세계관을 유지하려 했던 셈이다.
스토아학파는 틀렸다. 정해진 운명 같은 것은 없으며, 개인보다 전체가 중요한 한 것도 아니다. 개인은 전체의 부속품이 아니다. 전체는 개인들의 연합이 만든 잠정적 테두리일 뿐이다. 인간사에서 공동체(전체)는 늘 변화해 왔다. 원시 공동체에서 노예제, 봉건제, 자본제, 민주제로 전체는 늘 변해왔고, 지금도 변하고 있다.
이는 정해진 운명에 따라 변한 것이 아니다. 개인들이 변했기 때문이다. 개인들이 변했기에 개인들의 연합인 전체 역시 변할 수밖에 없었다. 개인이 자유(욕망)의 기쁨을 누리면 전체가 와해 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저마다의 자유(욕망)의 기쁨을 누리는 개인들이 연합하면 자유의 공동체(전체)가 만들어진다. 진정한 자유를 원하는가? 운명을 거부해야 하며, 개인보다 전체가 중요하다는 거짓을 거부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