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쿠로스 : 어떻게 피해의식을 넘을 것인가?

삶을 불행하게 만드는 피해의식

“결국 돈이면 다 되는 거 아니야!” 한때 이렇게 생각하며 살았다. 돈을 벌기 위해서 다른 이들에게 크고 작은 상처를 주는 것을 당연하거나 어쩔 수 없는 일로 여겼다. 또 내게 ‘돈 말고도 소중한 것들이 있다’고 말해주는 이들에게도 날카로운 말로 상처를 주었다. 돈이 없는 이에게는 “그건 네가 돈이 없어서 합리화하는 거잖아.”라는 말로, 돈이 많은 이에게는 “그건 네가 돈이 많아서 배부른 소리 하는 거야”라는 말로 상처를 주었다.


그런 삶으로 따뜻한 그래서 소중한 사람들을 많이도 잃었다. 어느 순간 주변을 돌아보니 내게 남겨진 사람은 내가 이용할 사람과 나를 이용할 사람들뿐이었다. 그렇게 내 삶은 점점 더 깊은 불행으로 빠져 들었다. 내 삶을 피폐하게 만든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돈에 대한 집착이었을까? 아니다. 그것 역시 결과였다. 근본적인 원인은 피해의식이었다. 돈에 대한 피해의식. 그 피해의식 때문에 주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었고, 동시에 나 자신마저도 상처 입고 있었다.


피해의식이 무엇인가? 상처받은 기억으로 인한 과도한 자기방어다. 가난했다. 이틀이 멀다하고 돈 때문에 악다구니를 하며 싸우는 부모를 보며 이불 안에서 혼자 울어야 했다. 수학 여행비를 내지 못해 매일 아침 불안한 마음으로 등교를 해야 했다. 돈만 있으면 그 서러운 일을 다시는 당하지 않을 것이라 믿었다. 그렇게 나는 돈 때문에 상처받은 기억으로 과도하게 나를 보호하려 했다. 이것이 나도 모른체 내 삶이 조금씩 불행해졌던 이유였다.


세상에는 다종다양한 피해의식이 있다. “예쁘면 다 되는 거 아니야!” “결국 힘이 세야 하는 거야!” 이런 생각은 전부 피해의식이다. 외모‧힘에 대한 피해의식이다. 이들은 예쁘지 못해서, 힘이 약해서 받았던 피해의 기억 때문에 과도하게 자신을 보호하려는 이들이다. 이들의 역시 나처럼 조금씩 불행해질 수밖에 없다. 우리에게 저주처럼 들러붙은 이 피해의식은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이를 에피쿠로스학파를 통해서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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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쿠로스 ‘쾌락주의hedonism’


그리스 헬레니즘 시대를 양분했던 두 철학이 있었다. 스토아학파와 에피쿠로스학파다. 에피쿠로스는 에피쿠로스학파를 기초세운 헬레니즘 시대의 중요한 철학자 중 한 명이다. 하지만 서양철학에서 그의 중요성은 인정과 칭찬보다 폄하와 멸시로 드러났다. 왜냐하면 서양철학의 주된 물줄기는 항상 전체와 질서를 중시하는 방향으로 흘렀기 때문이었다. 그런 서양철학 주된 흐름에서 에피쿠로스학파는 개인의 쾌락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쾌락주의hedonism’를 지향했다. 그러니 에피쿠로스학파에게 폄하와 멸시가 따랐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피해의식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 에피쿠로스라면 이 질문에 대해 이렇게 답해줄 테다. “쾌락을 따라 살면 된다.” 이 생경한 대답을 이해하기 위해 먼저 에피쿠로스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자.


우리는 쾌락이 행복한 삶의 시작이자 끝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쾌락은 타고 날 때부터 좋은 것이라고 인정하기 때문이며, 우리가 선택하거나 기피하는 모든 행위를 쾌락에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모든 좋은 것을 구별하는 기준으로 쾌락의 느낌을 사용하면서, 쾌락으로 되돌아간다. 『메노이케우스에게 보내는 편지』 에피쿠로스


에피쿠로스는 “쾌락은 타고 날 때부터 좋은 것”이고, “우리가 선택하거나 기피하는 모든 행위를 쾌락에서 시작”한다고 말한다. 더 나아가 에피쿠로스는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쾌락의 존재라고 말한다. 그러니 에피쿠로스에게 행복한 삶에서 쾌락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이는 지극히 옳은 말이다. 인간은 날 때부터 배고픔(고통)보다 포만감(쾌락)이 좋은 것이라는 것을 안다. 또 자연스럽게 추위(고통)를 피하고 따뜻함(쾌락)을 선택하며 산다. 그러니 인간을 쾌락의 존재라고 보는 것은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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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의식의 원인은 쾌락의 독점이다.


그런데 이런 에피쿠로스의 논의는 피해의식과 어떤 관계가 있을까? 즉, 쾌락을 따르는 것이 어떻게 피해의식을 극복하게 해주는 걸까? 먼저 피해의식의 발생 과정에 대해서 살펴보자. 세상의 모든 피해의식은 왜 생기는 걸까? 그것은 일부 계층의 ‘쾌락의 독점’ 때문에 발생한다. 이를 외모에 대한 피해의식으로 설명해 보자.


외모에 대한 피해의식이 있는 이들은 자신의 모든 불행의 원인을 외모 탓으로 돌리고, 자신보다 더 나은 외모를 가진 이들에게 과도한 적대감을 가지게 된다. 그들은 왜 이런 피해의식을 갖게 된 걸까? 외모가 아름다운 이가 쾌락(인정‧칭찬‧관심)을 독점했기 때문이다. 그 쾌락의 독점에 의한 반작용, 즉 피해(폄하‧비난‧무관심) 때문에 피해의식이 발생한 것이다.


다른 피해의식 또한 마찬가지다. 어린 시절부터 돈이 많은 혹은 힘이 센 사람들이 온갖 쾌락을 독점했던 기억이 있는 이가 있다고 해보자. 그는 돈 혹은 힘에 대한 피해의식이 있을 수밖에 없다. 돈 많고 힘센 이가 온갖 쾌락(지배‧명령‧당당함)을 독점할 때, 그 반작용으로 인한 피해(굴종‧복종‧치욕)를 고스란히 감당해야 한다. 그렇게 피해의식은 한 사람의 마음속 깊은 곳에 지워지지 않는 상흔으로 자리 잡게 된다.


쾌락의 독점! 이것이 피해의식의 뿌리다. 이제 에피쿠로스의 생경한 대답이 이해될 것 같다. 피해의식에서 벗어나려면 쾌락의 독점을 해체하면 된다. 쾌락의 독점은 어떻게 해체할 수 있을까? 간단하다. 우리도 쾌락을 누리면 된다. 피해의식은 결국 나만 억울하게 피해(쾌락을 즐기지 못하고 고통을 받는 상태) 받고 있다고 확신하는 정서 상태 아닌가? 그러니 누군가가 외모‧돈‧힘‧학벌 등등으로 쾌락을 독점할 때, 우리 역시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저마다의 쾌락을 즐기며 살며 된다. 그렇게 우리 역시 쾌락을 누릴 수 있는 존재임을 깨닫게 되었을 때 피해의식은 조금씩 옅어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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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적인 쾌락 VS 정적인 쾌락


여기서 우리는 의구심이 든다. 어떤 쾌락이든 그것을 즐김으로써 피해의식을 극복할 수 있을까? 외모에 대한 피해의식을 가진 이의 쾌락이 먹는 것이라면? 돈에 대한 피해의식을 가진 이의 쾌락이 술을 마시는 것이라면? 힘에 대한 피해의식을 가진 이의 쾌락이 게임을 하는 것이라면? 이때 쾌락을 마음껏 누리면 피해의식을 넘어설 수 있을까? 피해의식의 극복이나 건강한 삶은커녕 우리네 삶이 더 깊은 절망과 불행의 나락으로 떨어질 것은 자명한 일이다. 이런 의구심에 대해 에피쿠로스는 뭐라고 답해줄까?


우리가 “쾌락이 목적이다.”라고 할 때, 이 말은 우리를 잘 모르거나 우리의 입장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방탕한 자들의 쾌락이나 육체적인 쾌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말하는 쾌락은 몸의 고통이나 마음의 혼란으로부터의 자유이다. 『메노이케우스에게 보내는 편지』 에피쿠로스


에피쿠로스는 의심의 여지 없는 쾌락주의hedonism자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쾌락hedone’은 단순한 육체적 쾌락이 아니다. 이는 육체적 쾌락(배부름‧취함‧성적 쾌감)과 정신적 쾌락(평온한 마음)을 모두 아우르는 쾌락이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에피쿠로스는 ‘동적인 쾌락’과 ‘정적인 쾌락’을 구분했다. ‘동적인 쾌락’은 욕망을 해소하는 과정의 쾌락이고, ‘정적인 쾌락’은 더 이상 욕망하지 않게 되는 상태의 쾌락을 의미한다. 쉽게 말해, 음식을 먹고 있는 과정에서 느끼는 쾌락은 ‘동적인 쾌락’이고, 음식을 다 먹어서 더 이상 음식을 욕망하지 않게 되는 평온한 상태를 ‘정적인 쾌락’이라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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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적인 쾌락’이 진정한 쾌락이다.


에피쿠로스는 ‘정적인 쾌락’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삶을 즐겁게 만드는 것은 계속 술을 마시고 흥청거리는 일도 아니고, 욕구를 만족시키는 일도 아니며, 물고기를 마음껏 먹거나 풍성한 식탁을 가지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모든 선택과 기피의 동기를 발견하고 공허한 추측들(이것 때문에 가장 큰 고통이 생겨난다)을 몰아내면서 멀쩡한 정신으로 (쾌락을) 계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메노이케우스에게 보내는 편지』 에피쿠로스


에피쿠로스는 두 쾌락 중 ‘정적인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 진정한 쾌락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에피쿠로스에게 쾌락은 “계속 술을 마시고 흥청거리는 일”이 아니다. 그런 ‘동적인 쾌락’은 곧 심각한 육체적 고통(병약한 육체), 정신적 고통(중독된 정신)으로 다가올 것이기 때문이다. 에피쿠로스의 쾌락은 “몸의 고통이나 마음의 혼란으로부터의 자유”로울 수 있는 ‘정적인 쾌락’이다. 이는 육체적 쾌락과 정신적 쾌락의 균형 상태equilibrium라고 말할 수 있다.


음식을 예로 들어보자. 허기진 상태는 쾌락이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과식을 하는 것도 쾌락이 아니다. 둘 모두 “몸의 고통이나 마음의 혼란”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과식을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더 많이 먹으면 더 즐거울 것이라는 “공허한 추측”을 하기 때문이다. “이것 때문에 가장 큰 고통이 생겨난다.” ‘정적인 쾌락’은 배고픔(고통)과 과식(고통)이라는 양극단의 고통 사이에서 균형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다. 그래서 몸의 고통이나 마음의 혼란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그것이 에피쿠로스가 말한 진정한 쾌락이다.


‘정적인 쾌락’은 ‘욕구’(배고픔)를 적절히 해소함으로써 ‘욕망’(탐식) 없음의 상태에서 느끼게 되는 정신적 쾌락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에피쿠로스는 이런 ‘정적인 쾌락’이 최고상태에 이른 것을 ‘아타락시아ataraxia’, 즉 평정심의 상태라고 말한다. 에피쿠로스는 그 ‘아타락시아’에 도달하기 위해서 “공허한 추측을 몰아내면서” 예컨대, 음식(육체적 쾌락)을 어디까지 먹을지를 “멀쩡한 정신으로 계산”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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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타락시아’에 어떻게 이를 것인가?


피해의식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정적인 쾌락’을 통해 ‘아타락시아’(평정심)에 이르면 된다. 이 원론적 답에 이견이 있을 수 없다. 피해의식은 억울함, 증오, 분노, 시기, 질투 등등으로 마음이 요동치는 상태 아닌가? 그러니 ‘아타락시아(평정심)’에 이르면 그런 피해의식 역시 고요해질 수 있다. 이제 남은 문제는 하나다. 어떻게 ‘아타락시아’에 이를 것인가? 돈에 대한 피해의식을 가진 이를 생각해 보자. 그는 어떻게 아타락시아에 이를 수 있을까? 에피쿠로스는 그에게 이렇게 답해줄 테다.


우리는 스스로 만족해야 하는 것autarkeia을 커다란 좋음(선)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는 궁핍함에 만족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우리가 비록 많은 것들을 가지지 못했더라도 진심으로 다음과 같이 생각하면서 적은 것들에 만족하기 위해서이다. : “가장 적은 부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부를 가장 행복하게 즐길 수 있는 사람이다.” 『메노이케우스에게 보내는 편지』 에피쿠로스


돈에 대한 피해의식을 가진 이는 돈을 욕망할 수밖에 없다. 돈을 얻을 때 최고의 쾌락을 누릴 수 있다. 그러니 더 많은 돈을 벌어 더 큰 쾌락을 누리면 돈에 대한 피해의식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런데 에피쿠로스는 그런 ‘동적인 쾌락’을 가급적 따르지 말라고 말한다. 대신 지금 있는 것에 스스로 만족하라고 말한다. 즉, 자신이 많은 것을 가지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적은 것들에 만족하라는 것이다.


그 이유에 대해 에피쿠로스는 “가장 적은 부(돈)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부(돈)를 가장 행복하게 즐길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는 이론적으로 명백히 옳다. 부자는 더 이상 돈을 필요로 하지 않은 사람이다. 그러니 지금 자신이 돈을 얼마를 가지고 있던, 더 적은 돈을 필요로 하는 만큼 그는 점점 더 부자가 되는 셈이다. 이는 이론적으로 옳다고 하더라도, 전혀 현실적이지는 않다.


“지금 있는 것에 만족하라!” 이 말에 우리는 ‘아타락시아’(평정심)에 이르러 피해의식을 극복할 수 있을까? 그런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지랄하네! 나보다 더 돈 많은 놈들도 더 벌려고 하는데 내가 왜 지금 있는 것에 만족해야 하는데!” 피해의식 극복은커녕 이런 반발심만 불러일으킬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반발심은 ‘동적인 쾌락’을 더 증폭시킨다. 에피쿠로스의 조언으로는 ‘아타락시아’는 고사하고 ‘피해의식’이 더 깊어질 것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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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쿠로스에 대한 오해는 뒤집어져 있다.


에피쿠로스는 긴 시간 무분별한 쾌락을 부추기는 방탕한 향락주의자라고 비판받았다. 에피쿠로스라는 이름에서 유래한 ‘epicure’라는 단어는 지금까지도 ‘미식가’(향락주의자)라는 의미로 통용되고 있다. 하지만 이는 거꾸로 된 비판이다. 에피쿠로스를 향한 정당한 비판은 그의 금욕주의적 성향에 가해져야 한다. 역설적이게도 에피쿠로스의 ‘쾌락주의’는 과도하게 ‘금욕주의’적인 측면이 있다.


에피쿠로스의 논점은 ‘동적인 쾌락’을 경계해서 ‘정적인 쾌락’을 추구하라는 것이다. 이는 ‘쾌락주의’보다 ‘금욕주의’에 가깝다. ‘아타락시아’에 이르는 길은 무엇인가? 에피쿠로스에 따르면, ‘아타락시아’는 쾌락(돈‧힘‧외모)을 얻는 것이 아니라, 고통(돈‧힘‧외모에 대한 집착)을 없애는 데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정적인 쾌락’(욕망 없음)에 이르기 위해 늘 ‘동적인 쾌락’(욕구 해소)을 경계하며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 ‘동적인 쾌락’은 언제나 고통을 수반하니까 말이다.


실제로 에피쿠로스는 항상 금욕적으로 생활했다. 그는 항상 빵만 먹고 살았으며 맛있는 음식이 널린 잔칫날에도 치즈 조각만 먹었다. 에피쿠로스는 전혀 ‘에피큐어epicure’하지 않았다. 이것이 에피쿠로스의 한계다. 에피쿠로스의 방법으로 ‘아타락시아’에 이를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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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적인 쾌락’보다 ‘동적인 쾌락’이 중요하다.


‘동적인 쾌락’에 집중해야 한다. 피해의식이 있다면 자신을 사로잡고 있는 쾌락이 무엇이든,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동적인 쾌락’(욕구 해소)을 직접적으로 추구해야 한다. ‘동적인 쾌락’이 간접적이거나 왜곡해서도 안 된다. 돈에 대한 피해의식이 있다면 힘껏 돈을 벌어야 한다. 외모에 대한 피해의식이 있다면 힘껏 외모를 가꿔야 한다. 힘에 대한 피해의식이 있다면 힘껏 힘을 길러야 한다.


돈 혹은 외모, 힘 때문에 생긴 피해의식을 엉뚱하게 종교, 지식이나 명예, 내면의 아름다움 같은 것으로 해소하려면 문제가 더 복잡해질 뿐이다. 어설프게 ‘정적인 쾌락’(욕망 없음)을 흉내 내서는 안 된다. 어설픈 ‘정적인 쾌락’(“돈은 없어도 돼!” “외모가 뭐가 중요해!” “힘 싸움은 애들이나 하는 거지!”)은 피해의식을 더욱 증폭시키는 기만적 정신 승리일 뿐이다. 이미 피해의식이 있다면 불행하지만 어쩔 수 없다. ‘동적인 쾌락’을 따라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가장 중요한, 그래서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삶의 진실이 있다. ‘동적인 쾌락’ 끝에는 ‘아타락시아’는 없다. ‘동적인 쾌락’을 힘껏 추구한 결과가 어떻든 마찬가지다. 돈을 많이 벌게 되었든 아니든, 외모가 예뻐졌든 아니든, 힘이 세어졌든 아니든 그 끝에 ‘아타락시아’는 없다. 그렇다면 왜 ‘동적인 쾌락’에 따라야 하는가? ‘동적인 쾌락’을 힘껏 추구하고 난 후의 찾아올 ‘소진’된 마음 때문이다. 이 ‘소진’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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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와 ‘소진’

피로한 인간은 더 이상 실현할 수 없다. 그러나 소진된 인간은 더 이상 가능하게 할 수 없다. 『소진된 인간』 질 들뢰즈


들뢰즈는 ‘피로’와 ‘소진’을 구분한다. ‘피로’는 심리적 상태이고, ‘소진’은 존재론적 사건이다. 즉 ‘피로’는 이런저런 일들을 하느라 지쳐서 더 이상 아무 일을 할 수 없는 상태이고, ‘소진’은 모든 가능성을 다 시도해 보았기에 더 이상의 가능성이 남아 있지 않은 상태이다. 예를 들어, 직장에서 하루 종일 정신없이 일하느라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직장인의 상태는 ‘피로’한 상태이고, 직장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다 시도해 보았기에 더 이상 직장인으로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상태가 ‘소진’된 상태이다.


소진된 인간은 피로한 인간을 훨씬 넘어선다. 『소진된 인간』 질 들뢰즈


들뢰즈는 “소진된 인간은 피로한 인간을 훨씬 넘어선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소진된 인간”은 가능성의 영역을 모두 소진함으로써 다른 기존에는 불가능했던 다른 질서를 열 수 있는 자이기 때문이다. ‘피로’한 직장인은 다음 날 다시 직장을 향하겠지만, ‘소진’된 직장인은 직장인의 삶 너머의 삶으로 나아갈 수 있다. 이는 피해의식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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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에 대한 피해의식을 가진 이가 게임‧음식‧술 등등의 쾌락을 추구하는 것은 ‘피로’한 일이다. 또한 돈을 벌기 위해 이런저런 일들을 하는 것 역시 ‘피로’한 일이다. 이는 이런저런 일들을 실현할 수 있겠지만, 아직 돈을 벌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기에 주어진 삶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열 수 없다. ‘소진’은 ‘동적인 쾌락’을 힘껏 추구하는 일이다. 즉, 돈을 벌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다 시도해 보아서 더 이상 돈을 벌 가능성 자체가 남아 있지 않은 상태가 곧 ‘소진’된 상태이다.


이 ‘소진’된 상태가 중요하다. 바로 ‘소진’에 이를 때, 그 자신의 가능성 영역을 통째로 소진함으로써 기존에는 불가능했던, 새로운 질서를 열 수 있다. 돈 버는(외모를 꾸미는, 운동을 하는) 쾌락을 미친 듯이 따른다고 해보자. 어느 순간, 돈을 벌 가능성이 모두 ‘소진’되었다는 직감이 찾아든다. 그렇게 깊은 공허감이 찾아오게 된다. 돈을 버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 일이며, 또 그렇게 벌었던 돈이 기쁜 충만함이 아니라 슬픈 공허감을 준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깨닫게 된다. 그렇게 자신 삶의 하나의 장場을 매듭지을 수 있다.


이는 어려운 이야기도 아니지 않은가. “적당히 먹어야 기쁨이다.” 이는 과식을 많이 해본 사람이 얻을 수 있는 통찰이다. 불행히도 탐식에 사로잡혀 있다면 어쩔 수 없다, 일단 힘껏 먹어봐야 한다. 그 과정에서 과식이 얼마나 공허한 일인지를 온몸으로 깨달을 수 있는 ‘소진’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때 ‘먹는’ 삶의 모든 가능성을 소진해서 ‘읽는’ ‘쓰는’ ‘뛰는’ ‘사랑하는’ 삶으로 나아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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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적인 쾌락’을 통해 ‘소진’하라.


‘동적인 쾌락’이 남긴 ‘소진’이 ‘아타락시아’(평온함)에 이를 길을 보여준다. ‘아타락시아’에 이르고 싶다면, 어설프게 현자의 지혜를 흉내 내서는 안된다. 이는 유아적 자기 정당화일 뿐이다. 사실은 돈을 벌고 싶지만(날씬한 외모를 갖고 싶지만, 강해지고 싶지만), 돈을 버는(살을 빼는, 운동하는) 과정에서의 피로와 위험은 피하고 싶은 유아적 자기 정당화이다. “돈을 적당히 버는 게 좋아.” “외모보다 내면이 중요해” “육체적 힘보다 마음의 힘이 중요하지.” 이는 모두 유아적 자기 정당화 아니던가?


바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을 우회하거나 정신승리 하지 말고 온 힘을 다해 그것은 가지려고 애를 써야 한다. ‘피로’한 상태에서 머물지 말고, 모든 가능성이 ‘소진’될 때까지 그렇게 해야 한다. 이것이 ‘아타락시아’에 이르는 길이다. 그리고 그 길에서 우리는 진정으로 평온한 마음을 얻게 된다. ‘정적인 쾌락’은 거저 주어지지 않는다. 진정으로 평온한 마음은 온갖 ‘동적인 쾌락’을 모두 ‘소진’했던 이들만이 이를 수 있다. ‘아타락시아’는 ‘동적인 쾌락’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수,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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