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쿠로스의 철학에서 놓쳐서는 안 될 부분이 있다. 죽음에 관한 논의다. 에피쿠로스는 죽음이라는 주제에 대해 깊이 다루고 있다. 의아하다. 에피쿠로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쾌락이다. 그런데 죽음은 쾌락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고통 아닌가? 그는 왜 쾌락의 중요성을 역설하면서 죽음에 대한 논의를 이어갔던 걸까? 에피쿠로스는 궁극적인 쾌락을 긍정하기 위해서는 죽음이라는 주제를 우회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죽음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죽음이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믿음에 익숙해져라. … 가장 두려운 악인 죽음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존재하는 한 죽음은 우리와 함께 있지 않으며, 죽음이 찾아오면 이미 우리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 산 사람에게는 아직 죽음은 찾아오지 않았고, 죽은 사람은 이미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메노이케우스에게 보내는 편지』 에피쿠로스
에피쿠로스는 죽음이 두려워할 일이 아니라고 말한다. 이를 감정(감정)적으로 쉬이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더라도, 논리적으로는 자명한 말이다. 우리가 살아 있을 때 죽음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당연히 죽음은 두려워할 일이 아니다. 반대로 죽음이 찾아왔다면 우리는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죽음은 두려워할 일이 아니다. 논리적으로 보자면, 죽음은 산 사람이나 죽은 사람 모두에게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다.
죽음은 원초적인 두려움이다. 이는 논리적 증명으로 쉬이 사라질 수 있는 두려움이 아니다. 그럼에도 왜 에피쿠로스는 죽음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힘주어 말했던 걸까? 에피쿠로스가 ‘쾌락주의자’였기 때문이었다.
‘죽음은 두려운 일이 아니다.’라는 사실을 진정으로 깨달은 사람은, 살아가면서 두려워할 일이 없다. 『메노이케우스에게 보내는 편지』 에피쿠로스
쾌락을 가로막는 것은 언제나 두려움이고, 이 두려움의 근본은 죽음에 있기 때문이다. 이는 어려운 말이 아니다. 길거리에서 노래를 즐겁게 흥얼거리고 있다. 그때 옆에 있는 이가 말한다. “조용히 해! 죽고 싶지 않으면.” 그러면 우리는 노래(쾌락)를 멈출 수밖에 없다. 왜? 죽음이 두렵기 때문이다. 쾌락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일 수밖에 없다. 그러니 쾌락주의자인 에피쿠로스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그저 지켜볼 수 없었다.
최고의 쾌락은 무엇일까? 자유다. 가고 싶은 곳을 가고,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는 자유. 그런데 이 궁극의 쾌락은 좀처럼 누리기 어렵다. 왜 그런가? 권력자(부모‧선생‧상사‧사장‧국가)의 ‘쾌락의 독점’ 때문이다. 즉 권력자가 가고 싶은 곳을 독점하고(“넌 거기 가지마!”), 하고 싶은 말을 독점(“너 그 말 하지 마!)했기 때문이다. 권력자는 언제나 쾌락을 독점한다. 그러니 최고의 쾌락(자유)을 누리기 위해서는 권력자의 쾌락 독점에 맞서야 한다.
어떻게 맞서야 하는가? 우리 모두 저마다의 쾌락을 향유하면 된다. 즉, 우리가 가고 싶은 곳을 가고, 우리가 하고 싶은 말을 하면 된다. 하지만 권력자는 그것을 결코 두고 보지 않는다. 우리가 각자의 쾌락을 누리려 할 때 권력자는 각가지 방식으로 겁박한다. 그리고 그 겁박의 마지막은 “죽고 싶어?”다. 죽음이 두렵다면 우리는 종국에는 쾌락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 에피쿠로스는 최고의 쾌락(자유)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때만 누릴 수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에피쿠로스 쾌락을 가로막는 마지막 장애물인 죽음마저도 제거하려고 했다.
에피쿠로스는 쾌락주의의 핵심이 ‘쾌락의 독점’을 해체하는 데 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이는 에피쿠로스의 삶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는 한 편으로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쾌락을 누리라고 말하면서, 또 한 편으로는 아테네 교외에 정원을 사서 ‘에피쿠로스의 정원The Garden of Epicurus’이라는 기쁨의 공동체를 만들었다. 전자는 ‘쾌락의 독점’을 해체하려는 직접적인 시도였다면, 후자는 ‘쾌락의 공유’ 공동체를 통해 ‘쾌락의 독점’을 해체하려는 간접적인 시도였던 셈이다. 누가 뭐래도, 에피쿠로스는 인간에게 쾌락, 즉 유쾌하고 명랑한 삶을 돌려주려고 애쓴 철학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