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크레티우스 : 왜 시작은 어려운가?

왜 시작이 반일까?

“시작이 반이다.” 이는 격려의 말이다. ‘일단 시작하면 그 일의 절반은 이룬 것이니 할 일을 해 나가라’는 격려의 말이다. 그런데 이 격려의 말은 왜 생겼을까? 우리는 쉬운 일을 격려하지 않는다. 먹고 자고 싸는 일을 격려하지 않는 것처럼. 우리는 어렵고 힘든 일 앞에서 격려의 말을 건넨다. 이것이 “시작이 반이다”라는 오래된 격언이 자주 회자되는 이유다.


‘시작이 반이다’라는 격언은 과장된 표현일까? 정량定量적으로 보자면 분명 그렇다. 하지만 정성定性적으로는 정당한 표현일 수 있다. 새로운 ‘책’의 첫 페이지(운동을 시작하는 첫날)는 정량적으로는 분명 1페이지(하루)일 뿐이다. 하지만 그 ‘책’(운동)을 읽어내는 데 드는 마음의 무게를 측정할 수 있다면, 첫 페이지(하루)를 펼치는 일은 그 절반에 해당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만큼이나 새로운 시작은 힘들고 어려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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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막하고 두려운 새로운 시작


시작, 특히나 새로운 시작은 누구에게나 어렵고 힘든 일이다. 연인과 이별하고 새로운 혼자의 시작. 학생을 벗어나 직장(업무)의 시작. 이전 전공을 버리고 새로운 분야의 시작. 혼자의 삶을 끝내고 결혼(부모)의 시작. 부모의 죽음으로 어른의 시작. 익숙했던 삶을 벗어나 새로운 삶을 시작해 본 이들은 안다. 그것이 얼마나 막막하고 두려운 일인지 말이다. 이것이 우리가 이전의 삶이 불행했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시작을 가능한 미루거나 회피하려는 이유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 미루거나 피하고만 싶은 그 새로운 시작은 선택사항이 아니다. 원하든 원하지 않던 우리는 필연적으로 새로운 시작 앞에 던져지게 된다. 자의든 타의든, 언젠가는 익숙했던 연인‧전공‧직장‧부모와 이별을 고해야 한다. 그리고 다시 저마다 새로운 삶을 시작해야만 한다. 새로운 시작이 막막하고 두렵다고 하여 이 새로운 시작을 미루거나 회피해서는 안 된다.


왜 그런가? 미루거나 회피한 일들은 우리네 마음 깊은 곳에서 불안과 공포로 자리 잡기 때문이다. 과도한 불안과 공포 속에서 사는 이들의 삶을 살펴보라. 그들은 하나 같이 언젠가는 마주해야 할 새로운 일을 미루거나 회피하는 이들이다. 불안과 공포 넘어 유쾌하고 당당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새로운 시작을 강건하게 마주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새로운 시작을 강건하게 받아들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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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크레티우스의 ‘원자’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루크레티우스(BC96~BC55)에게 들어보자. 그는 에피쿠로스의 철학을 이어받은 헬레니즘 시대의 철학자다. ‘왜 새로운 시작은 어려운가?’ 이에 대해 루크레티우스라면 이렇게 답해줄 테다. “클리나멘clinamen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클리나멘’은 무엇일까? 이는 ‘편위偏位’라고 번역되기도 하는데 ‘기울어져 빗겨남(벗어남)’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루크레티우스는 새로운 시작이 어려운 이유에 대해 기울어져 빗겨 나는 것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셈이다. 이 난해하고 생경한 답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루크레티우스의 사유 전반을 알아보자.


자연 전체는 … 두 가지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물체들과 빈 공간이 있어서, 그 공간 안에 이 물체들이 놓여 있고, 거기서 이리저리 움직이니 말이다. … 우리가 빈 곳으로 부르는 장소와 공간이 없다면, 물체들은 어디에도 놓여 있을 수가 없을 것이고, 어디로도 방향 잡아 나갈 수 없을 것이다. … 숫자상 세 번째로 발견되는 자연적 요소인 듯한 것은 전혀 없다. 『사물의 본성에 대하여』 루크레티우스


루크레티우스는 세계(자연 전체)가 ‘물체’와 ‘빈 공간’이라는 두 가지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본다. 여기서 ‘물체’는 단순히 연필‧노트‧가방 같은 구체적인 대상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런 대상들을 이루는 근본인 ‘원자’를 의미한다. 루크레티우스에 따르면, 이 ‘원자’는 무한히 많으며 궁극적이며 더 나눌 수 없는 아주 작은 ‘딱딱한’ 원소이다. 그리고 ‘빈 공간’은 외부가 존재하지 않는 무한한 공간이다. 루크레티우스는 세계가 무한히 많은 ‘원자’와 그 원자가 운동할 수 있는 무한한 ‘빈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본다. 그 두 가지를 제외한 제3의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루크레티우스의 세계는 무한한 ‘빈 공간’에서 무한한 ‘원자’가 쏟아지고 있는 세계이다. 이미지화하면, 칠흑 같은 어두운 밤하늘(빈 공간)에서 비(원자)가 쏟아져 내리는 상황을 떠올리면 된다. 그런데 이는 우리가 보는 세상과는 조금 다르지 않은가? 세계에 존재하는 것은 ‘빈 공간’과 ‘원자’뿐이라면 연필‧꽃‧나무‧새‧구름‧인간 등등의 우리가 보는 구체인 대상은 어디에 있단 말인가? 루크레티우스가 말하는 세계, 즉 무한한 ‘빈 공간’에서 무한한 ‘원자’가 쏟아지고 있는 세계는 ‘세계 이전의 세계’다. 구체적인 대상들이 존재하기 이전의 세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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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크레티우스의 ‘클리나멘clinamen’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다채로운 대상들이 존재하는 세계는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 루크레티우스의 이야기를 조금 더 들어보자.


원자들이 자신들이 가진 무게 때문에 허공을 통하여 아래로 떨어질 때, 결코 예견할 수 없는 시간과 장소들에서 자신들의 직선 경로에서 아주 조금, 단지 움직임 조금 바뀌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비껴 난다. 만일 그것들이 계속해서 그렇게 비껴 나가지 않는다면 모든 원자들은 마치 빗방울처럼 깊은 허공 속으로 떨어지기만 할 것이고 어떤 충돌도 벌어지지 않을 것이며, 어떤 타격도 생기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자연은 결코 어떤 것도 만들지 못했을 것이다. 『사물의 본성에 대하여』 루크레티우스


루크레티우스에 따르면, ‘세계 이전의 세계’는 “원자들이 자신들이 가진 무게 때문에 허공을 통하여 아래로 떨어”지고 있는 상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세계 이전의 세계’에서 ‘원자’들은 서로 평행하게 쏟아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원자’들끼리 서로 마주치지 않는다. 루크레티우스는 만약 ‘원자’들이 서로 영원히 평행하게 떨어진다면 세계와 만물은 결코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즉, 영원히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무의미한 ‘세계 이전의 세계’에 머무르는 게 되는 것이다.


바로 여기서 ‘클리나멘clinamen’의 중요성이 드러난다. ‘클리나멘’이 무엇인가? 원자들의 ‘기울어져 빗겨남(벗어남)’이다. 즉 원자들이 돌발적으로 자신들의 직선 경로로부터 아주 미세하게 벗어나 기울어져 빗나가는 현상이 바로 ‘클리나멘’이다. 평행하게 내리던 원자들이 미세한 빗겨나게 되고, 이 때문에 원자들은 서로 충돌하게 된다. 그리고 그 충돌은 다시 다른 충돌을 부른다. 이렇게 만들어진 충돌의 무한한 연쇄를 통해 지금 우리가 지각하는 세계가 만들어지게 되는 것이다. 즉, 무의미한 ‘세계 이전의 세계’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다채로운 세계로 전환되는 시작점이 바로 ‘클리나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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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시작을 어렵게 만드는 창조론적 세계관


왜 새로운 시작이 어려울까? 새로운 시작은 막막하고 두렵기 때문이다. 그 막막함과 두려움은 어디서 왔을까? 한 사람의 세계관에서 온다. 어떤 이는 세계가 ‘무無’에서 ‘유有’로 만들어졌다고 믿는다. 이런 세계관은 ‘창조론적 세계관’이다. 이들은 당연히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도 막막하고 두려울 수밖에 없다. 아무것도 없는 무無의 상태에서 무엇인가를 시작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니 창조론적 세계관을 가진 이들이 새로운 일 앞에서 주저하고 망설이거나 회피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창조론적 세계관’을 갖고 있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의존일 수밖에 없다. ‘무’에서 ‘유’가 창조되기 위해서는 ‘제3의 존재’(신)가 있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무’는 그 자체로 아무것도 없는 것 아닌가? 그러니 그 아무것도 없는 데서 무엇인가 있음이 나오려면 ‘제3의 존재’가 반드시 필요하다. 이것이 새로운 시작을 어려워하는 이들이 ‘제3의 존재’(종교·선례‧멘토‧점집)를 집요하게 찾는 이유다. ‘무’에서 ‘유’로 만들어가는 것은 너무나 막막하고 두려운 일이기에 ‘제3의 존재’의 도움을 받아야만 가능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루크레티우스는 이런 ‘창조론적 세계관’이 삶의 진실이 아니라고 말한다. 루크레티우스에게 ‘무’는 없다. 세계가 형성되기 이전에도 이미 무수한 ‘원자’들이 쏟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는 어느 ‘원자’의 우발적 빗겨남에서 의해서 탄생하게 된다. 즉 세계는 ‘무’에서 ‘유’가 탄생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있는 것들의 우발적 마주침에 의해서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어느 고대 철학자의 터무니없는 가설일 뿐일까? 이에 대해 현대 인지 생물학자이자 철학자인 움베르토 마뚜라나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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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진실, 클리나멘적 세계관


별의 역사가 시작될 때 분자 물질들은 근본적으로 동질적이었다. 그러나 행성들이 생겨난 뒤에 화학적 변화가 꾸준히 일어나 지각 표면과 대기에 꽤 다양한 분자 물질들이 생겨났다. … 특히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탄소사슬로 이루어진 분자, 곧 유기분자들이 많아지고 다양해진 시점이다. 탄소 원자는 홀로 또는 다른 여러 원소들과 함께 성분, 크기, 분자형태, 원자배열 등이 다른 여러 화합물을 무한히 많이 만들 수 있기 때문에 유기 분자의 형태적‧화학적 다양성은 원칙적으로 무한하다. 유기 분자의 이런 화학적‧형태적 다양성 때문에 비로소 생물이 있을 수 있다. 『앎의 나무』 움베르토 마뚜라나


마뚜라나는 자신의 저서 『앎의 나무』에서 우주의 시작부터 생물의 탄생까지의 과정을 매우 함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우주가 시작될 때도 동질적인 분자 물질들이 있었다. 이 분자 물질은 꾸준한 화학적 변화를 겪게 되고 그 과정에서 다양한 분자 물질이 생겨난다. 그 중 탄소사슬로 이루어진 분자가 다양한 생물의 기원이 되었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탄소원자는 홀로 또는 다른 원소들과 함께 성분, 크기, 분자형태, 원자배열 등이 다른 여러 화합물을 무한히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마뚜라나는 지금 모든 생명체의 기원이 하나의 탄소 ‘원자’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고대철학자 루크레티우스의 견해와 놀랍도록 일치하지 않는가? 루크레티우스의 우주발생론을 되짚어 보자. 우주라는 텅 빈 공간에 무한한 원자들이 서로 평행하게 쏟아지고 있고, 그중 하나의 원자가 미세하게 비껴난다. 이로 인해 발생한 원자들 사이의 우발적 마주침의 연쇄를 통해 세계와 만물(생물)이 만들어지게 된다. 이는 현대 과학적 견해와 거의 같다.


결국 세계는 ‘무’에서 ‘유’로 창조되는 것이 아니라, ‘유’에서 ‘유’로 생성되는 것이다. 더욱 정확히는 세계는 어떤 원자(있음)의 ‘클리나멘’에 의해서 생성된다. 어느 원자의 그 미세한 빗겨남이 모든 것의 시작이다. 이는 고대 철학이나 현대과학의 힘을 빌리지 않더라도 직관적으로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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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의 기원, 클리나멘


사랑의 발생 과정을 보자. ‘진철’과 ‘수민’은 첫눈에 사랑에 빠졌다. 이때 그 사랑은 ‘제3의 존재’(운명‧신)에 의해 ‘무’에서 ‘유’로 형성된 것일까? 사랑이 탄생하는 순간만 보면 그렇게 보일 수도 있다. 둘은 첫눈에 반해버렸으니까. 그렇다면 이 사랑은 ‘큐피트’(사랑의 ‘신’)의 화살을 맞고 ‘운명’적으로 탄생한 것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이 사랑은 ‘클리나멘’에 의해서 발생한 것이다.


‘진철’은 늘 같은 시간에 같은 길을 따라 출근한다. 그리고 ‘수민’ 역시 마찬가지다. 그 둘은 늘 평행했기에 서로 마주칠 일이 없다. 하지만 햇살이 눈부시던 5월의 어느 아침, 출근길에 몇 년을 쓰던 ‘진철’의 서류 가방이 찢어져 서류들이 쏟아졌다. 그 서류를 챙기느라 들어섰던 카페에서 자스민 차를 마시던 ‘수민’을 마주치게 된 것이다. 그렇게 둘의 사랑은 시작되었다. 이는 루크레티우스 말처럼, 원자(가방)의 돌발적 미세한 빗겨남(찢어짐)이 새로운 사랑을 만든 셈이다.


비단 사랑만 그런가? 삶 자체가 ‘클리나멘’이다. 불행한 교통사고도, 우리 손에 들려 있는 핸드폰도, 친구도, 가족도, 직장도 어느 것 하나 ‘클리나멘’에 의하지 않은 것이 없다.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클리나멘’(돌발적인 미세한 빗겨남)이 만든 연쇄적 마주침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이것이 삶의 진실이다.


이 삶의 진실에 눈을 뜨면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의 막막함과 두려움은 사라지거나 크게 줄어들 수밖에 없다. 우리가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 막막하고 두려운 이유는 ‘무’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어떤 경우에, 어떤 일을 하더라도 ‘무’에서 시작하지 않는다. 이미 있는 것들로부터 시작한다. 우리 시대 너머에 있는 철학자, 들뢰즈는 이러한 삶의 진실에 대해 명료하게 말한 바 있다.


우리는 결코 (무로부터 출발한다는 의미에서) 시작하지 않는다. 우리는 결코 백지를 가지고 있지 않다. 우리는 중간으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스피노자의 철학』 질 들뢰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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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시작을 즐기는 법


‘세계(삶)가 클리나멘으로 인해 구성된다’는 삶의 진실을 깨달으면 시작이 두렵지 않다. 직장에서 새로운 일을 시작한다고 해보자. 막막하고 두려울 수 있다. 하지만 그때도 우리는 “무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니다. 수많은 ‘유’들이 존재하는 세계 “중간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것이다. 처음 하는 일이기에 낯선 부분도 있을 수 있겠지만, 그 일을 구성하는 ‘원자’와 자신을 구성하는 ‘원자’들 사이에서 새로운 일을 시작하게 된다.


그렇게 직장을 다니다 보면, 직장의 일을 구성하고 있는 수많은 ‘원자’ 혹은 자신을 구성하고 있는 수많은 ‘원자’ 중 하나가 ‘클리나멘’을 발생시키게 되고, 그때 어떤 우발적인 마주침이 일어나게 된다. 아무리 처음 하는 일이라도 그 일을 하다 보면, ‘이거 그때 그 일과 비슷하네’라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이는 ‘원자’들의 우발적인 마주침으로 인해 발생한 느낌이다. 그 마주침으로 새로운 시작에서 막막함과 두려움보다 평온함과 유쾌함을 느낄 수 있다.


서른여섯에 프로 복서를 꿈꾸며 복싱을 시작했다. ‘나’를 구성하는 ‘원자’ 중 하나가 돌발적으로 빗겨나갔다. 그 빗겨나간 방향이 복싱이었던 셈이다. 모든 것이 막막하고 두려웠다. 어떻게 운동을 해야 하는지 막막했고, 맞는 것이 두려웠다. 복싱을 구성하는 ‘원자’에는 폭력이 있었고. 나를 구성하는 ‘원자’에는 겁이 있었다.


‘클리나멘’으로 인해 두 원자(폭력-겁)의 마주침이 발생했다. 놀랍게도, ‘폭력-겁’이라는 두 원자의 마주침은 막막함과 두려움이 아니라, 평온함과 유쾌함을 주었다. 실제로 맞아보니 그건 그리 두려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맞는 것이 두렵지 않으니 링 위에서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고, 복싱이라는 스포츠가 얼마나 유쾌한지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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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주침의 긍정


새로운 시작이 어려운 이유는 ‘클리나멘’을 보지 못하기 때문일 뿐이다. 달리 말해, 새로운 시작이 막막하고 두려운 이유는 그것이 ‘무’에서 시작하는 일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떤 새로운 시작도 막막한 백지에서 시작하는 일일 수 없다. 그것은 평행하게 내리던 수없는 ‘원자’들이 ‘클리나멘’에 의해서 마주치는 일이다. 즉 그 일을 구성하는 수많은 ‘원자’와 나를 구성하는 수많은 ‘원자’가 마주치는 일이다. 우리는 그저 우연히 찾아올 마주침을 긍정하면 된다.


하지만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여기서 ‘마주침의 긍정’은 모든 새로운 일을 꾸역꾸역 견디며 살아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세계를 구성하는 ‘원자’는 무한하다. 이는 우리가 마주칠 수 있는 마주침 역시 무한하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마주침은 우연이지만, 그 우연은 하나가 아니라 다수다. 예를 들어, 직장(제조업)을 그만두고 새로운 직업을 찾는다고 해보자. 그때 마주칠 수 있는 새로운 직업은 우연이다. 즉, 우연히 기존에 하던 일과 비슷한 일(제조업)과 마주칠 수도 있고, 우연히 만난 옛친구 때문에 완전히 새로운 분야의 일(예술업)과 마주치게 될 수도 있다.


그 다수의 마주침 중에서 슬픔을 주는 마주침(제조업)이 있을 수 있고, 기쁨을 주는 마주침(예술업)이 있을 수 있다. 그때 그 다수의 마주침 사이에서 자신에게 조금 더 큰 기쁨을 주는 마주침을 따르는 것. 그것이 바로 ‘마주침의 긍정’이다. 즉, ‘마주침의 긍정’이란 우연적인 마주침 중에서 조금 더 기쁜 우연을 마주하는 일이다.


삶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네 삶이란 새로운 타자(직장‧업무‧사람‧운동 등등)의 ‘원자’들과 자신의 ‘원자’들의 마주침이 연속되는 일이다. 이때 그 우연적 마주침 중에서 어떤 마주침이 기쁨 혹은 슬픔을 주는지를 섬세하게 구별해내고, 더 작은 슬픔과 더 큰 기쁨을 주는 마주침으로 나아갈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마주침을 긍정하는 삶이다. ‘클리나멘’을 진정으로 이해하여, 마주침을 진정으로 긍정하게 될 때, 우리는 새로운 시작을 기대하며 즐겁게 맞이할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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