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크레티우스는 대표적인 에피쿠로스학파였다. 남겨진 문헌이 별로 없는 에피쿠로스학파의 많은 사유들은 루크레티우스의 저작을 통해 전해지고 있다. 루크레티우스에 대해서 논의하면서 스토아학파와 에피쿠로스학파의 논쟁을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스토아학파와 에피쿠로스학파 사이 논쟁의 쟁점은 ‘필연성’과 ‘우연성’에 있다고 알려져 있다. 쉽게 말해, 스토아학파는 ‘세계의 법칙은 필연적으로 모두 정해져 있다’고 보고, 에피쿠로스학파는 ‘필연적으로 정해진 세계의 법칙 같은 것은 없고 모든 것이 우연성에 의해 결정된다’고 본다는 것이다.
스토아학파가 에피쿠로스학파를 공격한 핵심은 우연성에 있다. “너희들은 정말 세상 모든 일 우연히 발생한다고 생각해? 그렇다면 세계에는 어떤 인과법칙도 존재하지 않는 거네? 칼에 찔려도(원인) 피가 안 날 수도 있다(결과)는 말이야?” 이것이 스토아학파가 루크레티우스 혹은 에피쿠로스학파에게 가한 공격의 핵심이었다. 이는 스토아학파의 헛발질이다. 엉뚱한 과녁에 화살을 쏜 셈이다. 에피쿠로스학파는 세상이 우연에 의해 무작위로 펼쳐지는 공간이라 말한 적이 없다. 즉 인과법칙을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모든 일이 철저한 '인과성'에 의해 발생한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한 루크레티우스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각각의 것에서 떠나가는 몸체들이, 그것이 떠나는 그 사물은 줄어들게 만들고, 그것들이 그리로 옮겨간 그 사물에게는 성장을 선물한다. 이들은 전자를 늙어버리게 만들고, 후자는 반대로 피어나게 만든다.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 루크레티우스
루크레티우스는 철저한 '인과성'을 주장한다. 구름(원인)에서 비(결과)가 내리면, 그 내린 비(원인)에 의해 구름은 축소(결과)된다. 그리고 그 비(원인)는 꽃(결과)을 자라게 한다. 이처럼 자연(세계)은 철저한 인과성을 따른다고 주장했다. 스토아학파와 에피쿠로스학파 사이 논쟁의 쟁점은 ‘필연성-우연성’이 아니라 ‘운명-인과성’에 있다. 스토아학파는 세상은 이미 정해진 ‘운명’대로 흘러간다고 주장했고, 루크레티우스(에피쿠로스학파)는 원인과 결과에 따른 ‘인과성’을 주장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의아한 부분을 발견하게 된다.
클리나멘이라는 개념은, 원인이 없다고 하는 뜻으로, 엄밀히 하게 보자면, 우연(원인 없는 사건)이라는 개념과 같은 것이다. 『서양철학사』 요한네스 휠스베르거
휠스베르거의 말처럼, 루크레티우스의 ‘클리나멘’은 분명 우연적 사건이다. 즉, 원인이 없는 사건이다. ‘클리나멘’, 즉 원자의 미세한 어긋남은 원인에 따른 결과가 아니라 그저 우연히(원인 없이) 발생한 일이다. 그렇다면 스토아학파의 공격은 유효한 것 아닌가? 달리 말해, 루크레티우스(에피쿠로스학파)는 인과성을 부정하며 세계가 우연적 사건에 의해 무작위로 구성된다고 본 것일까? 그렇지 않다. 놀랍게도 ‘우연성’과 ‘인과성’은 모순되지 않는다.
‘진철’과 ‘수민’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진철’은 가방이 찢어져 쏟아진 서류들(원인)을 수습하려 바로 앞의 카페에 들렀다(결과). 이것을 인과 계열 A라고 하자. ‘수민’은 아침 미팅이 취소(원인)되어서 차 한 잔을 마시기 위해 카페에 들렀다(결과). 이것을 인과 계열 B라고 하자. ‘진철’은 가방이 찢어졌기 때문에 카페에 들어섰고, ‘수민’은 미팅이 취소되어서 카페로 왔다. 이처럼 세상의 모든 일은 저마다의 인과성의 계열을 따른다. 여기까지는 스토아학파와 에피쿠로스학파(루크레티우스) 사이에 차이는 없다.
하지만 문제는 두 인과 계열 A와 B가 충돌할 때다. A와 B가 충돌해 ‘진철’과 ‘수민’이 사랑에 빠졌다. 이때 스토아학파는 그 충돌마저 이미 결정된 ‘운명’이라고 본다. ‘진철’과 ‘수민’의 사랑은 ‘운명’적 사랑이다. 스토아학파는 인과 계열뿐만 아니라 인과 계열들 끼리의 마주침 역시 이미 모두 정해진 ‘운명’으로 본다. 하지만 루크레티우스는 다르다. 세계는 각자의 인과성을 따르는 계열(A‧B)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그 계열들의 마주침은 우연적이다. 루크레티우스(에피쿠로스학파)는 분명 인과성을 긍정한다. 하지만 그 다수의 인과 계열의 마주침은 우연이다. 이에 대해 현대철학자, 들뢰즈는 이렇게 말한다.
실제로 클라나멘(편위)는 인과적 계열들 사이의 만남에 대한 결정이며, 이때 각각의 인과적 계열은 한 원자의 운동에 의해 구성되면서 동시에 (계열들의) 만남 속에서 자신의 완전한 독립성을 보존한다. 『들뢰즈가 만든 철학사』 질 들뢰즈
(A‧B라는) 인과적 계열은 (‘진철’‧‘수민’이라는) 한 원자의 운동에 의해서 구성된다. 또한 동시에 그 (A‧B라는) 계열의 만남 속에서 둘은 ‘운명’ 안에 종속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완전한 독립성을 보존한다. 이때 ‘클리나멘’의 역할은 분명하다. ‘클리나멘’은 인과적 계열들 사이의 만남을 결정한다. 쉽게 말해, ‘진철’이 쏟아진 서류를 길거리에 정리했다면, ‘수민’의 차가 아니라 식사를 하러 갔다면 둘의 사랑은 없다. ‘진철’이 길거리가 아닌 카페를 선택하는 ‘클리나멘’, ‘수민’이 아침 식사가 아닌 차를 선택하는 ‘클리나멘’이 A와 B 사이의 만남을 결정한 것이다. 이처럼 ‘우연성’과 ‘인과성’은 모순관계 아니라 상호작용의 관계다.
루크레티우스는 ‘인과성’을 긍정하면서도 ‘클리나멘’이라는 ‘우연성’을 강조했다. 그렇게 ‘인과성’과 ‘우연성’ 사이의 둘 모순을 해소하려고 애를 썼다. 그 이유는 분명하다. 루크레티우스를 포함한 일군의 에피쿠로스학파는 자유의지를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했다. 스토아학파의 말처럼 세계가 ‘운명’이라면 인간에게 자유의지는 없다. 자유의지가 없는 인간이 갈 곳은 슬픔으로 가득 찬 노예의 세계다. 에피쿠로스학파는 ‘클리나멘(우연성)’을 통해 이러한 불행을 막으려 했던 것이다. 이에 대해 루크레티우스는 분명하게 말한다.
정신 자체는 모든 일들이 일어나는 데 있어서 내적인 강요를 가지지 않으며, 마치 패배한 존재인 듯 견디고 참도록 강제되지 않는다는 사실, 이 사실은 클리나멘(시초의 작은 비껴남)에 의하여 생긴다.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 루크레티우스
‘클리나멘’, 즉 우연성(원인 없는 사건)이 가능하다면 인간은 ‘운명’적 연쇄를 끊고 스스로 작은 빗겨남을 만들 수 있다. 그렇게 우리는 각자만의 독창적인 인과 계열을 시작할 수 있다. ‘운명’적인 사랑을 기다리는 노예가 아닌, ‘우연’적인 사랑을 만나기 위한 저마다 ‘인과(원인-결과)’를 형성해 나갈 수 있다. 그렇게 각자 삶의 주인이 되어 우리에게 더 작은 슬픔과 더 큰 기쁨을 주는 삶을 만들어 나갈 수 있다. 이것이 루크레티우스와 에피쿠로스학파가 그토록 간절히 바라던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