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갈등과 다툼에는 시간이 개입해 있다
우리네 삶에는 많은 갈등과 다툼이 있다. 이는 관계의 문제다. 친구, 연인, 가족 사이에 갈등과 다툼이 있다. 그런데 이러한 ‘관계’들은 저마다 갈등과 다툼의 깊이가 다르다. 즉, 대체로 친구보다 연인이, 연인보다 가족 간의 갈등과 다툼의 골이 더 깊다. 왜 그런가? ‘시간’ 때문이다. 함께 한 시간이 많으면 많을수록 갈등과 다툼의 골 역시 깊어질 수밖에 없다. 때로 가족 관계보다 직장의 관계가 더 괴로운 것도 그 때문이다. 이처럼 ‘관계’만큼 ‘시간’ 역시 갈등과 다툼에 큰 영향을 미친다.
시간은 무엇인가? 시간에는 세 가지 층위가 있다. 과거, 현재, 미래이다. 우리가 겪는 갈등·다툼은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의 세 층위에 따라 발생하게 된다. 먼저 과거에 관한 이야기부터 해보자. 우리는 특정한 관계에서 과거의 일 때문에 갈등하고 다투기도 한다. 연인이나 부부 사이에 지난 일들을 다시 꺼내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다투게 되는 경우가 얼마나 흔하던가.
또한 우리는 현재의 일 때문에 다투기도 한다. 친구끼리 지금 무엇을 할 것인지로 다투게 되는 일이 그렇다. 미래의 일로 갈등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자식의 진로를 두고 부모와 자식이 갈등하고 다투게 될 때가 이런 경우다. 이처럼, 우리가 겪는 갈등과 다툼에는 시간이 매우 깊이 개입하고 있다. 그러니 살아가면서 결코 피할 수 없는 갈등·다툼을 잘 다루기 위해서는 ‘시간’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가 필요하다.
시간의 난해함
시간, 정확히는 시간의 세 가지 층위인 과거·현재·미래란 무엇인가? 이 답은 ‘아우구스티누스Aurelius Augustinus’라는 철학자에게 들어보자. 그는 초대 그리스도교 교회의 대표적인 철학자였고 동시에 중세의 새로운 문화를 탄생하게 만든 선구자였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론』이란 저서를 통해 서양 철학사에서 처음으로 ‘시간’에 관한 문제 전반을 연구하고 기록했다.
생각해 보면 ‘시간’이란 것은 참 묘하다. 시간은 항상 우리 곁에 있다. 아니 시간이 바로 우리네 삶 그 자체라고 말할 수 있다. 시간 없이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도, 느낄 수도 없다. 그만큼이나 시간은 우리와 밀접하다. 그런데 그런 밀접함에도 불구하고 시간 무엇인지에 대해 명쾌하게 말하기 어렵다. 시간은 그저 흘러갈 뿐, 눈에 보이는 것도, 손에 잡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시간’의 난해함에 대해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말했다.
도대체 시간이란 무엇입니까? 아무도 묻는 사람이 없으면 아는 듯하다가, 막상 묻는 사람에게 설명하려 하면 말문이 막혀버립니다. 『고백론』 아우구스티누스
우리는 과거, 현재, 미래를 마치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것이라고 여긴다. 이는 ‘과거‧현재‧미래’를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어제‧오늘‧내일’이라고 생각하는 까닭이다. 하지만 우리의 생각과 달리, 과거, 현재, 미래는 객관적이지 않다. 과거가 무엇인가? 그것은 이미 지나가 버린 것이다. 현재가 무엇인가? 곧 사라질 지금 찰나의 순간이다. 미래란 무엇인가? 아직 오지 않은 것이다. 그것은 모두 뜬구름 같은 것이다. 그 어느 것 하나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막상 시간에 관해 설명하려고 하면 말문이 막혀버리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런 난해한 시간에 관해 놀라운 통찰을 보여준다.
과거=기억, 현재=지각, 미래=기대
내가 알고 있는 시를 읊조린다고 해보자. 내가 시작하기 전에 나의 ‘기다림’은 시 전편에 뻗친다. 그러나 막상 시를 읊조리기 시작하면, 벌써 몇 구절은 과거로 되어버린다. 그렇게 과거로 따돌려진 시 몇 구절은 내 기억 안으로 들게 된다. 이리하여 내 행동의 존재는 두 군데에 걸치게 된다. 그 하나는 이미 읊조린 것을 ‘기억함’이고, 또 하나는 읊조릴 것을 ‘기다림’이다. 이때 ‘지켜봄’은 현재인 것으로, 미래이던 것이 과거가 되어 이를 거쳐 가는 것이다.” 『고백론』 아우구스티누스
아우구스티누스는 시를 읽는 자신의 모습을 통해 과거, 현재, 미래를 설명한다. 이를 영화를 보는 모습으로 설명해 보자. 영화를 보기 위해 집을 나설 때, 영화를 보는 것은 미래의 일이다. 그리고 극장에 도착해 영화를 보는 순간은 현재다. 그리고 보았던 영화의 내용은 과거가 된다. 이때 우리의 마음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까? ‘기다림’ ‘지켜봄’ ‘기억함’이다. 즉, 영화를 보기 전에는 영화를 보기 위한 ‘기다림’, 영화를 보는 동안에 영화를 보는 ‘지켜봄’, 영화를 보고 나서는 영화를 ‘기억함’이 발생된다.
바로 이것이 과거, 현재, 미래의 정체이다. 과거란 무엇인가? 과거는 이미 지나가 버려서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과거를 있는 것처럼 말할 수 있을까 ‘기억’하기 때문이다. 현재란 무엇인가? 현재는 결코 붙잡을 수 없는 찰나의 순간이다. 그런데 어떻게 현재에 관해 말할 수 있을까? ‘지켜보기’ 때문이다. 미래란 무엇인가?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기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어떻게 미래를 있는 것처럼 말할 수 있을까? ‘기다리기’ 때문이다.
과거, 미래는 없다. 현재만 있을 뿐
이제 아우구스티누스의 ‘시간’에 대한 관점을 이해할 수 있다.
엄밀한 의미에서는 과거, 현재, 미래라는 세 시간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엄밀하게는 세 개의 시간은 과거의 현재, 현재의 현재, 미래의 현재입니다. 사실 이 세 가지는 의식anima 속에 있으며 의식 이외에는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과거의 현재는 기억이며, 현재의 현재는 지각이며, 미래의 현재는 기대인 것입니다.” 『고백론』 아우구스티누스
아우구스티누스는 “엄밀한 의미에서 과거, 현재, 미래라는 세 시간이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현재라는 하나의 시간뿐이라고 말한다. 즉, 시간은 찰나의 ‘지켜봄’의 시간뿐이다. 그 현재만이 실재하는 것이고 과거와 미래는 실제로는 없는 것이다. 우리가 과거 혹은 미래하고 말하는 것은 “과거의 현재”, “미래의 현재”라고 말한다. 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르면, 실제로 시간은 ‘과거의 현재’, ‘현재의 현재’, ‘미래의 현재’이다.
이는 어려운 논의가 아니다. 과거 있다면 그것은 그 과거가 진행 중일 때였던 ‘과거의 현재’ 뿐이다. 어제 영화를 보았던 것은 과거고, 그것은 이미 지나가 버렸다. 그 과거는 어제 영화를 보고 있었던 중이었던 ‘과거의 현재’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미래가 있다면 그것은 앞으로 다가올 미래가 현재가 될 때뿐이다. 내일 영화를 볼 일은 아직 오직 않았다. 그 미래는 내일 영상을 보고 있을 ‘미래의 현재’일 뿐이다.
‘과거’, ‘현재’, ‘미래’는 모두 우리의 마음(의식)속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과거의 현재’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기억’하기 때문이다. 어제 보았던 영화를 ‘기억’하기에 과거를 알 수 있다. ‘현재의 현재’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지각’(지켜봄)하기 때문이다. 지금 영화를 지각하기에 현재를 알 수 있다. ‘미래의 현재’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기대’(기다림)하기 때문이다. 내일 영화를 볼 것을 기대(기다림)하기 때문에 미래를 알 수 있다.
‘과거=기억’, ‘현재=지각’, ‘미래=기대’ 이것이 아우구스티누스의 시간의 개념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은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것은 지극히 주관적인 것(마음!)이다. 쉽게 말해, ‘기억’, ‘지각’, ‘기대’라는 우리 마음의 세 가지 기능이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시간 개념을 통해, 삶에서 겪을 수밖에 없는 관계의 갈등과 다툼 문제를 해소할 수 있다.
과거의 문제로 갈등하지 않는 법
먼저 과거를 생각해 보자. 우리는 때로 과거의 문제로 많은 갈등과 다툼을 겪곤 한다. ‘과거’ 학교에서 심하게 다투었던 친구와 이야기를 나눴다고 해보자. 그는 내가 잘못해서 싸웠다고 말하고, 나는 그 친구가 잘못해서 싸웠다고 말했다. 이처럼 과거의 일로 갈등과 다툼이 생기는 경우는 흔하다. 이런 일은 왜 발생하는가? 그의 ‘과거’와 나의 ‘과거’가 달라서다. 그런데 이는 표면적인 이유일 뿐이다.
이 다툼의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과거가 객관적으로 존재할 것이라는 믿음이다. 즉, 친구는 친구의 과거가 객관적인 사실이라고 여기고, 나는 나의 과거가 객관적인 사실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갈등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갈등과 다툼은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해서 해소될 수 있다. 과거는 객관적 ‘사실’이 아니라 주관적 ‘기억’일 뿐이다. 시간에 관한 논의를 이어받은 현대 철학자, 베르그손은 이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주관과 객관, 그들의 구별과 결합에 관계된 문제는 공간보다는 시간과의 관계하에서 제기되어야 한다. 『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베르그손은 “주관과 객관”은 ‘공간’ 문제가 아니라 ‘시간’의 문제라고 말한다. 이는 과거(시간)에 의해서 주관과 객관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는 의미다. 친구와 나는 왜 각자의 과거가 객관적인 ‘사실’이라고 믿었을까? 과거가 ‘공간’에 관계한다고 생각할 때, 과거를 객관적 ‘사실’처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즉 그 과거가 학교라는 객관적 ‘공간’에 의해서 발생했다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삶의 진실이 아니다. 베르그손은 과거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아우구스티누스와 같은 답을 한다.
과거는 … 개별적인 기억들 속에서 살아남는다. 『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흔히, 과거를 객관적인 ‘사실’이라고 믿지만, 과거는 오직 각자의 “개별적인 기억들 속에서만 살아남는” 것일 뿐이다. 과거는 곧 ‘기억’이기 때문에 그 자신은 객관적이라고 믿는 ‘사실’이 실은 지극히 주관적인 ‘기억’일 뿐이다. 친구와 나의 과거는 각자의 ‘시간’, 즉 ‘기억’에 의해서 발생한 것일 뿐이다. 그러니 친구의 ‘과거’와 나의 ‘과거’는 다른 것은 당연한 일이다.
‘너’는 ‘너’의 ‘과거(기억)’가 있고, ‘나’는 ‘나’의 ‘과거(기억)’가 있다. 이것이 아우구스티누스와 베르그손이 알려주는 과거의 진실이다. 이 진실을 받아들이면, 우리는 과거의 문제로 인해 겪는 갈등과 다툼을 지혜롭게 조정해 나갈 수 있다. 같은 ‘사건’을 겪었다고 해서, 같은 ‘기억’을 갖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과거로 인한 갈등과 다툼은 현저히 줄어들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나의 과거가 객관적인 ‘사실’이 아니라 지극히 주관적으로 편집·왜곡된 ‘기억’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 과거의 문제로 발생하는 타인과의 갈등은 현저히 줄어들게 된다.
현재의 문제로 갈등하지 않는 법
이제 ‘현재’를 생각해 보자. 우리는 현재에서도 갈등과 다툼을 겪곤 한다. 과거는 ‘기억’이고, 현재는 ‘지각’이다. 과거의 ‘사건’만 다르게 ‘기억’하는 게 아니다. 현재 ‘사건’ 역시 다르게 ‘지각’하는 경우는 흔하다. 바로 이 때문에 우리네 삶에 크고 작은 갈등과 마찰이 일어나게 된다.
만난 지 얼마 안 된 커플이 있다. “점심은 먹었어? 오후에도 힘내서 일해” 여자는 바쁜 일상을 쪼개 남자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남자는 곧장 답장하지 않고 그날 저녁에 답장을 했다. 이때 종종 갈등과 다툼이 벌어지곤 한다. 남자는 여자의 바쁜 일상을 알기에 답장을 여유 있게 한 것일 뿐인데, 여자는 그것을 애정이 없거나 자신을 무시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즉 이 갈등과 다툼은 현재 ‘사건’을 서로 다르게 ‘지각’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늦은 답장’을 여자는 ‘무시’로 남자는 ‘배려’로 ‘지각’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그런데 이런 ‘지각’의 차이는 이 갈등·다툼의 피상적인 이유일 뿐이다.
근본적인 원인은 각자의 ‘지각’이 객관적인 사실이라는 믿음이다. 즉, ‘늦은 답장’이라는 현재 사건을 ‘무시(혹은 배려)’를 드러내는 객관적 사실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현재의 문제로 인한 갈등을 해소하는 근본적 해법은 ‘지각’의 진실을 깨닫는 데 있다. 과거의 ‘기억’만큼이나 현재의 ‘지각’ 역시 객관적 ‘사실’이 아니라 주관적 ‘해석’이다. 그런데 이는 쉬이 납득하기 어렵다. 과거의 일이야 이미 지나간 일의 ‘기억’이니 저마다 다를 수 있지만,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일은 객관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것 아닌가? 그런데 왜 과거 ‘기억’처럼, 현재 ‘지각’ 역시 ‘사실’이 아니라 ‘해석’인 걸까? 이에 대해 베르그손은 이렇게 말한다.
사실상 기억에 젖어 있지 않는 지각이란 없다. 우리는 감각에 현재 직접적으로 주어지는 것들에다 과거 경험의 세부들을 섞는다. 『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시간은 분절되지 않는다. 흐름이다. 즉 과거와 현재는 지속적으로 연결되어 흐른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 “사실상 기억(과거)에 젖어 있지 않는 지각(현재)이란 없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여자는 왜 ‘늦은 답장’에서 애정 없음(무시)을 느꼈을까? 그것은 그녀에게 그런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다. 과거 남자 친구들이 애정이 식었을 때 답장이 늦었던 ‘기억’ 때문이다. 남자는 왜 ‘늦은 답장’이 배려라고 느꼈을까? 그에게 그런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현재의 ‘지각’이란 것은 과거 ‘기억’에 의해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현재 어떤 ‘사건’을 감각할 때 직접적으로 주어지는 것들이 있더라도, 그것에 과거 경험들이 섞일 수밖에 없다. 즉 같은 현재를 ‘지각’하더라도, 각자 다르게 ‘지각’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지각’의 진실이다. 이 삶의 진실을 받아들일 수 있을 때, 현재의 문제로 인해 겪는 갈등과 다툼을 지혜롭게 조정해 나갈 수 있다. 현재 같은 ‘사건’을 겪었다고 그것을 동일하게 ‘지각’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갈등과 다툼은 현저히 줄어들 수밖에 없다.
미래의 문제로 갈등하지 않는 법
미래의 문제로 관계에서 갈등과 마찰을 겪게 되는 경우도 있다. 한 아이가 자신의 ‘미래’에 대해서 부모와 이야기를 나눈다고 해보자. 아이는 자신이 가수가 될 수 있을 거라고 말하고, 부모는 가수가 될 수 없을 거라고 말한다. 이처럼 미래에 대해서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짐으로써 갈등과 다툼이 일어나는 일은 흔하다. 이런 갈등과 다툼은 왜 일어나는가? 각자가 예상하는 미래가 다르기 때문일까? 이는 삶의 오해다.
흔히 미래를 객관적 ‘예상’이라고 믿는다. 마치 내일 비가 올 확률을 예상하는 것처럼, 미래를 생각한다. 이는 옳은가? 미래란 특정한 데이터를 가지고 아직 도래하지 않은 시간을 객관적으로 ‘예상’을 하는 일인가? 자연현상은 그렇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자유의지를 갖고 있는 생명체에게는 그렇다고 말할 수 없다. 왜 그런가?
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르면, 미래는 ‘기대(기다림)’이다. ‘기대(기다림)’란 무엇인가? 우리는 무엇을 기다리는가? 욕망하는 것들이다. 우리는 욕망하는 것들을 기다린다. 바로 이것이 미래의 문제로 세상 사람들과 갈등과 마찰을 겪게 되는 근본적인 이유다. 아이와 부모는 왜 다투는가? 객관적 ‘예상’ 때문인가? 즉 아이가 가수가 될 확률이 높거나 낮기 때문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기대’ 때문이다. 아이는 가수가 되기를 간절히 ‘기대’하고, 부모는 아이가 가수가 되기를 전혀 ‘기대’하지 않기 때문이다.
미래의 문제 때문에 타인과 갈등하거나 다툴 필요가 없다. 미래란 ‘기대(기다림)’, 즉 욕망이기 때문이다. 미래란 객관적인 ‘예상’ 따위가 아니다. 지극히 주관적인 것, 즉 아주 간절한 ‘기대(기다림)’이자 욕망이다. 우리 앞에 어떤 미래가 펼쳐지게 될까? 구체적으로 말해, 우리는 미래에 어떤 직업을 갖고, 어떤 사랑을 하는 삶을 살게 될까? 이는 신이 아니라면, 어느 누구도 분명하게 답할 수는 없는 질문이다.
하지만 이것만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지금 자신이 바라는 그 직업이, 그 사랑이 어떤 모습이건, 그것을 간절한 마음으로 기대하고 기다리면 그곳에 가닿게 될 것이란 사실이다. 물론 미래의 그 직업과 사랑이 현재 바라는 그 직업과 사랑의 모습은 아닐 수 있다. 하지만 그 직업과 사랑을 간절히 기대하면, 그와 매우 유사한(본질적으로 같은) 미래를 맞이할 수 있다. 이는 허황된 낙관론이 아니다.
사업으로 성공하려던 간절한 바람을 가진 이를 알고 있다. 그는 늘 성공한 사업가가 되어 반려견을 데리고 출근하는 미래를 꿈꾸었다. 하지만 그는 사업에 실패했고, 긴 시간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렸다. 더 이상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뭐라도 하자는 심정으로 1인 출판사를 열었다. 그렇게 몇 년을 일하던 어느 월요일 아침, 쇼윈도 비친 반려견을 데리고 1인 사무실로 출근하는 자신을 보고 미소 지으며 말했다. “나 꿈을 이뤘구나!”
미래를 이렇게 우리를 찾아온다. 간절히 바라는 미래가 있다면, 그 미래는 반드시 찾아온다. 간절한 욕망(기대)은 현재를 바꾸고 현재를 바꾸는 사람은 반드시 미래를 바꾸게 되기 때문이다. 간절한 마음으로 ‘기대’하고 ‘기다리는’ 것이 바로 우리의 ‘미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