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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를 넘어 '주인'으로

by 황진규의 철학흥신소

금욕주의는 무엇이 문제인가? 단지 하고 싶은 일을 억압하고, 하고 싶지 않은 일을 수용해야 하는 문제일까? 이는 단기적 금욕주의의 상태일 뿐이다. 금욕주의가 길어질 때, 더 심각한 문제가 드러난다. 그것은 내적 노예화다. 노예화에는 두 가지 양상이 있다. 외적 노예화와 내적 노예화다. 금욕주의는 이 두 가지 노예화를 모두 야기한다. 금욕주의적 삶이 비교적 짧을 때는 외적 노예화에 이르고, 그런 삶이 길어질 때 내적 노예화에 이르게 된다.


외적 노예화는 무엇인가? 이는 ‘욕망의 억압’과 ‘고통의 수용’으로 규정할 수 있다. 자유인으로 살다가 노예가 된 이가 있다고 해보자. 그는 자유에 대한 욕망이 있다. 그는 외적인 힘(신분제 사회)에 의해서 어쩔 수 없이 자유인으로서 욕망을 억압하며 노예로서 고통을 수용하며 살고 있는 것일 뿐이다. 이것이 외적 노예화의 사례다.


그런데 금욕주의는 기묘한 측면이 있다. 금욕주의는 늘 욕망을 억누르는가? 또 늘 고통을 수용하게 만드는가? 그렇지 않다. 금욕주의의 두 양상인 ‘욕망의 억압’과 ‘고통의 수용’은 언제나 전체의 유익과 해악에 의해 달라진다. 즉, 개인의 욕망이 전체에 이로울 때는 그것은 오히려 권장되고, 개인의 고통이 전체에 해로울 때 그것은 적극적으로 회피해야 할 것이 된다. 바로 여기서 내적 노예화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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