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층위 중 가장 답하기 어려운 것이 ‘미래’다. 과거는 이미 지났기에, 현재는 지금 진행 중이기에 어느 정도 분명하게 답할 수 있는 측면이 있다. 하지만 미래는 조금 다르다. 미래는 아직 도래하지 않았기에 모호하고 혼란스럽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미래를 ‘기대(기다림)’라고 말했다. 그런데 이는 뭔가 석연치 않은 답이다.
우리는 정말 ‘기대’하는 미래를 맞이하게 되는 걸까? 우리가 날씬한 몸이 되기를, 부자가 되기를, 근사한 사랑을 하게 되기를, ‘기대’한다고 정말 그런 미래를 맞이하게 될까? 현실에서 그런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가 어떤 ‘기대’를 품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기대’대로 미래가 실현되는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은 틀린 것일까? 그렇지 않다. ‘기대’한 미래가 펼쳐지지 않는 건, 그 기대가 ‘진정한 기대’가 아니기 때문일 뿐이다. 미래로서의 ‘기대’는 단순한 호기심과 같은 기대가 아니라 ‘진정한 기대’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기대’란 어떤 것일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현상학(Phenomenology)의 창시자인 에드문트 후설의 도움을 받을 필요가 있다. 그는 시간의 담론,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해, 시간 경험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의식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관한 깊이 있는 분석을 보여주었다. 그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자.
최초의 음이 울려 퍼지고 있는 가운데, 두 번째 음, 그런 다음 세 번째 음 등이 들려온다. … 이 작용 연속체의 한 부분이 기억이며, 가장 작은 점과 같은 부분이 지각이고, 그 이상의 (더 넓은) 부분이 기대이다. 『현상학적 내적 시간 의식 강의Vorlesungen zur Phänomenologie des inneren Zeitbewusstseins』 에드문트 후설
후설의 시간 개념은 아우구스티누스와 매우 유사하다. 음악을 듣고 있는 순간을 생각해 보자. 최초의 음, 그리고 두 번째 음, 그리고 세 번째, 네 번째 음이 계속 이어진다. 이 연속된 한 부분이 ‘기억’이 되고, 현재 들리고 있는 순간, 즉 “가장 작은 점과 같은 부분이 지각”이다. 그리고 아직 들리지 않고 있는 “그 이상의 (더 넓은) 부분이 기대”이다. 이는 과거·현재·미래를 각각 ‘기억·지각·기대’라고 보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관점과 동일하다.
후설의 논의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미래, 즉 ‘기대’에 관한 부분이다. 후설에 따르면, ‘기대’란 아직 내용이 채워지지 않은 ‘빈 그릇(빈 지향)’이다. 이때 미래란, 현재의 ‘지각’을 만나는 과정에서 그 ‘빈 그릇’이 채워지는 상황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밥을 먹고 싶다는 ‘기대’가 음식 재료들의 ‘지각’을 통해 음식이 되는 상황이 곧 미래인 것이다. 그래서 미래가 과거와 현재보다 “더 넓은 부분”인 것이다. ‘빈 그릇’에 어떤 것이 채워지느냐에 따라 미래는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즉 현재 면과 물이 ‘지각’되면 ‘빈 그릇’에 국수가 채워지고, 밥과 채소가 ‘지각’되면 비빔밥이 채워지는 것처럼 말이다. 이에 관한 후설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자.
지금 바로 작가의 멤버십 구독자가 되어
멤버십 특별 연재 콘텐츠를 모두 만나 보세요.
오직 멤버십 구독자만 볼 수 있는,
이 작가의 특별 연재 콘텐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