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아퀴나스 : 어떻게 일할 것인가?

공부를 강요하는 이유

“아버지처럼 노가다하면서 살래? 먹고 살길은 공부밖에 없다.” 악착같이 공부해서 의사가 된 이를 알고 있다. 그의 어머니가 입버릇처럼 했던 말이다. 막노동을 하며 밥벌이를 하는 남편이 못마땅했을 테고, 그런 남편에게 의지해서 살아야 하는 자신이 불쌍했을 테다. 당연히 어머니는 자신의 아이만은 그런 못마땅하고 불쌍한 삶에서 벗어나기를 간절히 바랐을 테다. 비단 그 의사만 이야기일까?


어린 시절부터 ‘열심히 공부하라’는 이야기를 한 번도 듣지 않고 자란 아이는 없다. 부모‧선생‧사회는 왜 그리 공부를 강조했던 걸까? 학문의 즐거움을 위해서? 지혜로운 삶을 위해서? 코웃음을 칠 일이다. 그 어머니와 같은 마음이었을 테다. 열심히 공부해서 더 나은 삶을 살기를 바라서다. 그렇다면 그네들이 바랐던 ‘더 나은 삶’은 무엇일까? 간단하다. 돈도 잘 벌면서 남들한테 인정도 받는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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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노동 VS 육체노동


하지만 의아하지 않은가? 돈도 잘 벌면서 남들한테 인정도 받는 삶이 꼭 공부를 잘해야만 가능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 일찍 기술을 배워 한 분야의 장인이 되거나 어린 시절부터 장사를 해서 번듯한 상인이 되는 것은 어떤가? 한 분야의 장인과 번듯한 상인 역시 돈도 잘 벌고 남들한테 인정도 받는다. 즉, 기술과 장사로도 ‘더 나은 삶’에 이를 수 있다는 말이다.


우리 사회에서 ‘공부’와 ‘기술‧장사’는 같은 위상이 아니다. ‘열심히 기술을 배워라!’ ‘열심히 장사를 배워라!’라는 말에서 묘한 비하와 폄하의 정서가 느껴지지 않은가? 이는 ‘열심히 공부해라!’는 말에서는 결코 느낄 수 없는 정서다. 왜 이런 현상이 발생한 걸까?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구분 때문이다.


노동을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을 구분하고, ‘육체노동’보다 ‘정신노동’을 더 훌륭하고 고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바로 이 때문에 기름때 묻히는 기술자나 땀내는 장사꾼보다 펜대 굴리는 사무직을 선호하는 것은 당연한 일로 여기게 되는 것이다. 이는 정말 당연한 일일까? 혹여 우리는 너무 성급하게 육체노동을 부정하고 정신노동을 긍정해 버린 것 아닐까? 그래서 저마다의 개성과 기질에 어울리는 직업적 가능성을 놓쳐 버린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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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아퀴나스의 ‘실재론’


처음부터 다시 물어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왜 머리를 쓰는 직업, 즉 정신노동을 원하게 된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토마스 아퀴나스를 통해 알아보자. 아퀴나스는 중세 기독교를 대표하는 신학자이자 철학자이다. 그는 스콜라학파의 왕이라고 불렸는데, 이는 당대 그의 위상을 잘 드러낸다. ‘왜 정신노동을 더 중시하는가?’ 이 질문에 아퀴나스는 다음과 같이 답해줄 것이다. ‘진리는 사유와 존재의 일치이기 때문이다.’ 이 난해한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먼저 ‘실재론’이라는 개념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 아퀴나스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장인은 그가 바라보는 모형 혹은 원형이 있음으로 해서 질료 안에 특정한 형상을 산출한다. 마찬가지로 자연(본성)적으로 발생하는 것들은 (각기) 특정한 형상을 따라 형성되는 것이 명백하다. 『신학대전』 토마스 아퀴나스


바위를 깎아 호랑이 석상을 만든 장인을 생각해 보자. 장인은 “질료(바위) 안에서 특정한 형상(호랑이)을 산출”한 것이다. 이는 장인의 머릿속에 이미 호랑이의 “모형 혹은 원형”(관념)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장인의 머릿속에는 일종의 설계도처럼 호랑이의 ‘원형’(관념)이 있고, 그에 따라 바위를 깎아 호랑이 석상을 만들었다. 아퀴나스는 세계 역시 이렇게 만들어졌을 것이라고 본다.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것”(파도‧바람‧나무‧새…)들이 있다면 그것은 저마다의 “특정한 형상을 따라 형성”되는 것이다. 이것이 아퀴나스의 ‘실재론實在論’이다. 실재론이 무엇인가? 말 그대로 무엇인가 실재한다는 의미다. 그런데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다. 실재론이라고 하면 무언가 ‘물질’적인 것(컵‧나무‧사람…)이 ‘실재’한다고 여긴다.


하지만 아퀴나스의 ‘실재론’은 정반대다. 실재론에서 실재하는 ‘물질’적인 것(개별자)이 아니라 ‘관념’적인 것(보편자)이다. 예를 들어보자. 살과 뼈가 있는(물질적인) ‘민철‧수애‧희선‧인철’과 그 모든 이들의 특성을 포함하는 관념적인 ‘인간’이 있다. 이때 ‘민철‧수애‧희선‧인철’은 ‘개별자’이고, 이들 모두 ‘인간’이라는 ‘보편자’에 속한다. 실재론에서 실재한다고 말하는 것은 바로 이 ‘보편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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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론과 실재론


‘개별자-보편자’ 관계를 바라보는 두 가지 관점이 있다. 유명론과 실재론이다. 유명론은 ‘개별자’로부터 ‘보편자’를 도출하는 관점이다. 쉽게 말해, ‘민철‧수애‧희선‧인철’(개별자)이 먼저 있기 때문에 ‘인간’(보편자)이라는 관념이 존재한다는 관점이다. 즉 다수의 ‘개별’적인 인간들의 특징(직립보행‧사유능력·공감능력…)을 통해서 ‘보편’적인 인간이 만들어진다는 관점이다. 이러한 관점이 유명론唯名論이라고 하는 이유는, 관념적인 ‘보편자’(필기구)는 오직唯 이름名만 있을 뿐, 실재하는 것은 물질적인 ‘개별자’(연필‧볼펜‧지우개…)라는 관점이다.


아퀴나스의 실재론은 그 반대이다. 즉 ‘보편자’로부터 ‘개별자’를 도출하는 관점이다. 이에 대한 아퀴나스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자.


지성이 지성의 관념을 통하여 직접 파악하는 것은 보편자이다. 하지만 간접적으로 지성은 상상에 속하는 개별자들도 파악한다. 그리고 바로 지성이 ‘소크라테스는 인간이다’라는 명제를 형성하는 방법이다. 『신학대전』 토마스 아퀴나스


아퀴나스는 인간의 지성이 직접(1차)적 파악하는 것은 ‘보편자’이고, ‘개별자’는 간접(2차)적으로 파악한다고 말한다. “소크라테스는 인간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 우리는 ‘개별자’인 ‘소크라테스’를 모르지만 “소크라테스는 인간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이는 우리가 ‘보편자’(인간)를 직접적 파악할 수 있고, 그에 따라 간접적으로 ‘개별자’(소크라테스)를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실재론적 관점에서는 ‘인간’이라는 보편자(형상‧관념)가 먼저 있기 때문에 ‘민철‧수애‧희선‧인철‧소크라테스’라는 개별자가 존재하게 된다. 장인의 머릿속에 호랑이의 관념‧형상(보편자)이 있기 때문에 호랑이 석상(개별자)이 만들어질 수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실재론에서 실재하는 것은 물질적인 ‘개별자’가 아니라 관념적인 ‘보편자’다. 그러니 실재론은 엄밀히 말해, ‘관념실재론’이라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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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편자는 실재이고, 그것은 신이 만든다.


아퀴나스는 세계를 실재론적 관점으로 본다. 파도‧바람‧나무‧새 등등 자연에 존재하는 개별자들이 있다. 아퀴나스는 이 개별적인 자연물들은 모두 저마다의 보편자(형상)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본다. 즉, 보편자에 따라서 개별자들이 만들어진다. 쉽게 말해, 개별적(물질적)인 파도‧나무‧새가 있다면, 그것은 모두 보편적(형상‧관념적)인 파도‧나무‧새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바로 여기서 아퀴나스는 자신의 기획을 드러낸다. 모든 ‘개별자’(민철‧수애‧희선‧인철)들이 이미 존재하는 ‘보편자’(인간)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라면, 그 ‘보편자’는 누가 만드는가? 바로 신이다, 아퀴나스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자.


존재자들 중 존재 전체의 보편적 원인인 신으로부터 존재하게 되지 않는 것이란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신이 무로부터 사물들을 존재에로 산출해내는 것은 필연적이다. 『신학대전』 토마스 아퀴나스


아퀴나스는 존재 전체의 보편적 원인은 신이다. 즉 보편자를 결정하는 것은 신이다. 인간‧파도‧새‧나무 등등 자연물(개별자)들은 “신의 정신 안에 존재하는 모형적 혹은 원형적 형상”인 보편자로부터 온 것들이다. 즉, 개별자(민철‧수애‧희선‧인철)보다 먼저 오는 보편자(인간)는 신의 정신 안에 있다. 아퀴나스에 따르면, 신은 자신의 정신 안에 있는 이미 저마다의 ‘보편자’(형상‧이데아)에 따라 ‘개별자’들의 세계를 만들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하나의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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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 생각과 물질의 일치다.


아퀴나스는 장인이 석조상을 만드는 과정을 비유로 신이 세계를 ‘실재론’적으로 창조했다고 설명한다. 그런데 여기에는 심각한 문제가 하나 도사리고 있다. 제아무리 뛰어난 장인이라도 ‘바위’(질료)와 ‘노동’ 없으면 석조상을 만들 수 없다. 아퀴나스의 비유대로라면, 신 역시 질료와 인간의 노동 없이는 세계를 창조할 수 없다는 의미 아닌가? 만약 그렇다면 전능한 신과 한낱 장인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철학자이기 이전에 신학자였던 아퀴나스에게 이는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아퀴나스는 그의 ‘진리론’을 꺼내 든다.이에 관해 아퀴나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진리란 사유와 존재의 일치다. 『신학대전』 토마스 아퀴나스


아퀴나스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중세 스콜라학자들에게 진리는 “사유와 존재의 일치”로 정의된다. 즉 진리란 ‘사유=존재’다. 이는 논리적으로 자명하다. 진리가 무엇인가? 언제, 어디서, 누구든지 참이라고 인정하는 어떤 것이다. 쉽게 말해, 언제 어디서든 절대 틀리지 않는 정답 같은 것이다. 스콜라학자들에게 그런 진리는 무엇일까? 당연히 신이다. 아퀴나스는 진리, 즉 신을 “사유와 존재의 일치”라고 정의한다.


‘사유=존재’는 어떤 의미인가? ‘사유’는 생각이고 ‘존재’는 물질이다. 그러니 아퀴나스의 말은 이렇게 바꿔도 좋다. ‘신은 생각과 물질의 일치다,’ 이는 사실 전혀 어려운 말이 아니다. 신은, 호랑이 석상을 ‘생각(사유)’하기만 하면 바로 호랑이 석상이라는 ‘물질(존재)’이 뿅 하고 나타나게 만드는 존재다. 즉 신은 ‘사유’만으로 ‘물질’을 만들어내는 존재이다. 신이 호랑이 석상을 만들기 위해 재료를 찾고 노동을 해야 한다면, 그것을 신이라고 말할 수 없지 않겠는가?


바로 이것이 인간과 신의 차이다. 인간이 신이 아닌 이유가 무엇인가? ‘사유’(생각)와 ‘존재’(물질)가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장인(인간)은 호랑이 형상을 ‘생각’한다고 해서 ‘물질’적인 호랑이 석상이 뿅 하고 나타나게 하지 못한다. 즉 인간은 ‘사유’(생각)와 ‘존재’(물질)의 불일치다. 장인이 머릿속에 있는 호랑이의 형상을 존재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바위와 노동이 필요하다. 바위와 노동이 있어야 ‘사유’(호랑이 형상)와 ‘존재’(호랑이 석상)를 일치시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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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노동의 존재다.


인간은 노동의 존재다. 밥을 생각만 한다고 밥이 나오지 않는다. ‘진리’(사유와 존재의 일치)는 오직 노동을 통해서만 이뤄진다. ‘사유’(생각) 속에 있는 밥을 ‘존재’(물질)하게 하려면 쌀을 씻어서 밥을 지어야만 한다. ‘사유’(생각)를 ‘존재’(물질)하게 하려면 노동을 필요하다. 이것이 인간의 실존적 조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정신노동을 원하는가? “진리는 사유와 존재의 일치”이기 때문이라는 것이 아퀴나스의 답이었다.


이제 이 난해한 답의 의미를 알 수 있다. 아퀴나스는 현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육체노동보다 정신노동을 우선시한다. 이는 진리 때문이다. 즉 정신노동이 진리, 즉 신을 향해 가는 길이기에 정신노동을 우선시한다. 아퀴나스를 비롯한 일군의 중세 철학자들은 모든 인간은 진리를 지향해야 한다고 말한다. 즉, 불완전한 인간일지라도 신, 즉 진리(사유와 존재의 일치)에 대한 열망을 놓아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실제로 아퀴나스는 ‘노동보다 명상을 통해서 신을 온전히 알 수 있기 때문에 노동보다 명상이 더 가치 있는 일’이라고 말한 바 있다. 아퀴나스가 노동(육체)보다 명상(정신)을 더 가치 있는 일로 치부한 것은 당연하다. 인간은 진리(사유와 존재의 일치)를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인간에게는 ‘신’적 욕망이 있다. 즉, 인간에게는 진리(신)에 다가서려는 욕망 있다. 달리 말해, 인간에게는 사유와 존재를 일치시킬 수 있는 전능한 신이 되려는 욕망이 있다.


세상 사람들이 갖고 있는 이런 ‘신’적 욕망 때문에 정신노동을 그토록 원하는 것은 아닐까? 신이 밥을 사유하기만 하면 밥이 뿅 하고 나타나는 것처럼, 인간 역시 그런 신적 역량을 지향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세상 사람들이 육체노동보다 정신노동을 원하는 이유는 ‘진리(사유와 존재의 일치)’을 향한 신적 욕망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는 과도한 종교적 해석일까? 지금은 중세를 훌쩍 넘어 신이 믿지 않은 시대니까 말이다. 하지만 사태는 그리 단순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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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노동은 ‘신’적 욕망의 상징이다.


많은 이들이 육체노동보다 정신노동을 원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단순히 육체노동은 더럽고 힘들고 위험한데 수입은 적고, 정신노동은 대체로 쾌적하며 편안하고 안전하며 수입도 크기 때문일까? 이는 표면적인 이유일 뿐이다. 그 마음속 깊은 곳에는 모두 ‘사유’와 ‘존재’를 일치시키고자 하는 ‘신’적 욕망이 도사리고 있다.


정신노동은 ‘신’적 욕망의 상징이다. 정신노동에 대한 과도한 집착은 (몸을 쓰는) 노동이라는 인간에게 주어진 실존적인 조건을 초월하고 싶은 ‘신’적 욕망이다. 정신노동에 대한 열망의 가장 근본에는 ‘신’이 되고 싶다는 욕망이 도사리고 있다. 노동하지 않은 존재. 생각만으로 물질을 만들 수 있는 존재. 그런 ‘신’적 존재가 되고 싶다는 욕망이 정신노동을 추구하게 만드는 근본적 동력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결코 과도한 해석이 아니다.


정신노동에 대한 열망의 극한치는 어디를 향하는가? 일하지 않고 돈을 벌고 싶다는 욕망이다. 정신노동을 원하는 마음 끝에는 일하지 않고 돈을 벌고 싶다는 욕망이 도사리고 있다. 막노동꾼(육체노동)은 기술자(작은 육체노동)가 되고 싶고, 기술자는 펜대 굴리는 사무직(더 작은 육체노동)이 되고 싶고, 사무직은 건물주(육체노동 없음)가 되어 돈을 벌고 싶어 한다. 결국은 일(육체노동)하지 않고 돈을 벌고 싶은 것이다. 정신노동을 향한 열망의 극한치는 일하지 않고 돈을 벌고 싶다는 욕망이다. 이는 ‘신’적 욕망의 다른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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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기쁜 삶에 이르는 법

중세의 기독교인들은 왜 노동보다 명상을 더 추구했을까? 생각(사유)만으로 물질(자연물)을 만드는 초월적인 ‘신’에 가닿으려는 허망한 욕망 때문이다. 현대인들 역시 마찬가지다. 생각(정신)만으로 물질(돈)을 만들 수 있는 초월적 ‘자본’에 가닿으려는 허망한 욕망 때문이다. 중세의 기독교인들과 현대의 자본주의자들은 마치 일란성 쌍둥이처럼 닮아 있지 않은가? 기독교든, 자본주의든 초월적 대상을 욕망하는 모든 종교는 필연적으로 우리를 불안과 허무, 공허로 내몬다. 우리가 사는 세상을 초월한 곳에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주어진 실존적 조건을 초월하려는 모든 신적 욕망의 끝에는 지독한 슬픔이 있을 뿐이다. 기쁨은 삶 ‘밖’이 아니라 ‘안’에 있다.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조건을 긍정해야 한다. 아퀴나스는 틀렸다. 진리는 ‘사유와 존재의 일치’가 아니다. 진정한 진리란 ‘사유와 존재의 불일치’다. 생각만으로 이뤄질 수 있는 것은 없다. 순수한 정신노동은 없다. 정신노동을 향한 열망은 우리가 사는 세계를 초월하려는 헛된 욕망일 뿐이다.


노동 없는 삶을 추구하지 말라. 그것은 몸이 없는 삶을 추구하는 것처럼 헛되고 위험한 일이다. 우리는 거꾸로 안다. 노동 없는 삶이 기쁜 삶이 아니다. 노동하는 삶이 기쁜 삶이다. 다만 우리가 기쁜 노동을 마주치지 못했을 뿐이다. 초월적 존재(신)가 되려고 하지 말고, 두 발을 땅에 꼭 붙이고 한 걸음씩 나아가야 한다. 우리네 삶을 유쾌하고 명랑하게 만들어줄 직업은 그렇게 찾을 수 있다. 가장 기쁜 삶은 죽기 전날까지도 하고 싶은 노동을 찾은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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