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역사 속 토마스 아퀴나스>

아퀴나스를 비롯한 중세의 많은 스콜라철학자들의 가장 중요한 화두는 신의 증명이었다. 즉, 현실과 자연 속에서 신의 존재를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이것이 많은 스콜라학자들에게 주어졌던 과제였다. 아퀴나스는 많은 선배 철학자들보다 과감하게 나아가려 했다. 아퀴나스의 선배인 안셀무스는 신의 증명을 논하면서 “이해하기 위해서는 믿어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아퀴나스는 “믿기 위해서 이해해만 한다.”라고 말하며 선배의 입장에 반대했다. 아퀴나스는 선배들보다 더 철저하게 이성‧논리적인 태도로 신을 증명하려고 했다.


아퀴나스의 철학은 많은 부분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영향을 받았고, 자신의 신 증명 역시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유에 의지하고 있다. 그것이 유명한 ‘부동不動의 동자動者’Unmoved Mover라는 개념이다.


영원적인 운동을 일으키는 영원적인 동자動者는 전적인 현실태entelecheia이기 때문에 그 자체는 전적으로 변하지 않고 움직이지 않는 실체로서, 마치 사유대상이나 욕구의 대상이 사유자나 욕구자들(또는 애인이 사랑하는 사람을) 움직이듯이, 자신은 움직이지 않고 다른 모든 사물을 움직이지 않고 다른 모든 사물들을 움직인다. 이 제 1의 움직이지 않는 동자에게 세계의 모든 존재들은 의존한다. 이것은 선이며, 생명이며, 끊임없이 자신을 사유‧관조하는 순수이성이며, 이것은 신이다. 『형이상학』 아리스토텔레스


Gemini_Generated_Image_g6gpwjg6gpwjg6gp.png


아리스토텔레스의 ‘부동不動의 동자動者’는 말 그대로 움직이지 않는 운동자라는 뜻이다. 이는 전혀 어렵지 않다. ‘철수’가 있다. ‘철수’는 어디서 왔을까? 부모로부터 왔다. 그 부모는 어디서 왔을까? 조부모로부터 왔다. 그 조부모는 그들의 부모로부터 왔다. 이처럼, 다른 모든 존재들도 마찬가지다. 움직이는 어떤 대상(동자)이 있다면 반드시 그것을 움직이게 하는 대상이 있게 마련이다.


철수→부모→조부모→조부모의 부모→… 이런 식으로 논리적으로 끊임없이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그렇다면 그 끝에는 무엇이 있겠는가? 모든 것을 움직이게 한 하나의 원인이 있을 수밖에 없다. 즉, 스스로는 움직이지 않지만, 다른 것을 움직이게 했던 최초의 원인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 자신은 움직이지 않지만 다른 것을 움직이게 하는 ‘부동의 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최초의 원인으로서의 ‘부동의 동자’를 세계의 창조주, 즉 신이라고 말한다.


아퀴나스는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의 부동의 동자 개념을 빌려 현실 세계에서 논리적으로 신을 증명하려 했다. ‘부동의 동자’의 신 증명은 논리적으로만 보면 전혀 빈틈이 없어 보인다. 움직이는 대상이 있으면 그것을 움직이게 할 또 다른 대상이 있어야 하고, 그렇게 끝없이 거슬러 올라가면 하나의 최초의 점(원인)에서 도달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세계를 창조한 창조주인 신은 정말 있는가? 아니 ‘부동의 동자’의 논리에는 정말 어떤 모순도 없을까? 논리의 과정 속에는 어떤 모순도 없다. 하지만 여기에는 치명적 문제가 있다. 그 문제는 이 질문으로 드러낼 수 있다.


Gemini_Generated_Image_fgcn03fgcn03fgcn.png


‘세계의 시작은 무無인가? 유有인가?’ ‘부동의 동자’의 논리가 정합성을 가지려면 하나의 전제가 필요하다. ‘태초(세계의 처음)는 무無’라는 전제. 세계의 처음에는 아무 것도 없는 상태라는 것을 전제해야만 모든 존재를 거슬러 올라가서 하나의 원인이 있다는 도식이 완성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아퀴나스가 ‘무로부터의 창조론ex nihilo’을 논증하려고 그리도 애를 썼던 이유였다.


‘부동의 동자’의 논리는 ‘무로부터의 창조론’의 전제로부터 출발해야만 정합적이다. 하지만 만약 세계의 시작이 ‘무’가 아니라 ‘유’라면 ‘부동의 동자’의 논리는 시작조차 될 수 없다. 세계의 시작이 무가 아니라 유였다면, ‘지금 존재하는 대상을 거슬러 올라가면 단 하나의 원인이 있다’는 논리 자체가 성립될 수 없다. 애초에 많은 것들이 있었으니까 말이다. 세계의 시작이 무가 아니라 유라고 명확히 밝힌 고대 철학자가 있다. 루크레티우스다.


첫 원리는 다음과 같은 것에서 우리를 위한 시작점을 얻어야 한다. 즉 그 어떤 것도 신들의 뜻에 의해 무로부터 생겨나지 않는다. … 물체(원자)들은 사물들의 기원이고 일부는 시초적 존재(원자)들의 결합으로 이루어져있다.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 루크레티우스


space-9250868_1280.jpg


루크레티우스는 “어떤 것도 신의 뜻에 따라 무로부터 생겨나지 않는다.”고 분명히 말한다. 그리고 세계는 이미 존재하는 원자들과 그 원자들의 마주침(결합)에 의해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루크레티우스가 옳다면, 아리스토텔레스부터 이어졌던 스콜라철학의 신 증명 기획은 애초부터 부당한 것이 된다. 세계의 시작이 이미 존재하는 다수 원자와 원자들의 마주침에 의해서 탄생했다면, ‘부동의 동자’ 따위의 논리는 애초부터 성립할 수 없게 되니까 말이다.


“믿기 위해서는 이해해야 한다!”고 단언하며 자신만만했던 아퀴나스다. 하지만 그런 그가 말년에 저술활동을 중단하며 자신의 비서에게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나는 더 이상 글을 쓸 수가 없다. 내가 본 것에 비하면 내가 쓴 것은 모두 형편없는 지푸라기처럼 보인다." 이는 젊은 시절 도시(이성)에서 자신만만하다가 말년에 늙고 병들어 고향(신앙)으로 돌아간 어느 노인의 마음이지 않았을까? 결국 이성으로는 신앙을 증명하려 했던 자신의 노력이 얼마나 허망한 것이었는지 말년이 되어서야 깨달았던 것은 아니었을까?


세계는 무로부터 생겨나지 않았다. 세계는 이미 존재하는 수많은 원자들과 그 원자들의 마주침으로 발생한 것이다. 고로 최초의 원인으로서 조물주나 신 같은 것은 없다. 그런 초월적 신을 믿을 때 우리는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없다. 원자(타자)들과 원자(타자)들과의 마주침을 긍정하며 살아가기보다 최초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집요하게 물으며 퇴행적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기쁜 삶은 타자와 그 타자와 마주침을 긍정하는 삶이다. 이런 기쁜 삶에 이르기 위해서는 있는 그대로의 삶을 제대로 볼 수 있어야한다. 기쁜 삶을 위해 우리는 루크레티우스의 말을 잊지 않아야 한다.


우리가 어떤 것도 무로부터 생성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나면, 그때는 이 사실로부터 우리가 좇는 것을 더 제대로 보게 될 것이다.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 루크레티우스

keyword
수, 금 연재
이전 27화토마스 아퀴나스 : 어떻게 일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