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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로서의 연애'를 벗어날 방법, 없다

돈과 연애 I

소비로서의 사랑 VS 생산으로서의 사랑

 

어느 인문학자의 강의를 듣게 되었다. 그는 지금 시대의 사랑과 연애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다. 그의 주장인즉슨,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사랑은 결국 소비의 문제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 때문에 제대로 된 사랑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돈이 없어서 연애를 못하는 건, 사랑을 오직 소비로서의 사랑으로만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쉽게 말해서 남녀가 만나 연애를 하는 모든 과정이 돈을 쓰는 과정 안에 머무른다는 말이었다. 그래서 돈이 없으면 사랑도 연애도 하지 못하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돌아보면 맞는 말이다. 연애 중인 남녀가 데이트를 하면서 하는 것이 무엇인가? 밥을 먹고, 차를 마시고, 영화를 보고, 모텔 가는 것 아닌가? 이 모든 과정은 소비의 과정이다. 즉 돈이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과정이다. 그렇기에 많은 사람들이 돈이 없으면 연애를 할 수 없는 것이라고 단정 짓고 있는 것이다.     


 그 인문학자는 지금 남녀 관계의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 소비를 조장하는 자본주의에 포섭된 그래서 왜곡된 사랑이라고 말했다. 소비로서의 사랑은 진정한 의미의 사랑이 아니라는 말이었다. 그리고 대안으로 ‘소비로서의 사랑’ 대신 ‘생산으로서의 사랑’을 하라고 말했다. 꼭 돈이 아니라도 연애를 하면서 무엇인가를 써서 없애는(소비) 방식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만들어 내는(생산) 방식을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깊이 공감했다. 또 반성했다. 나는 소비로서의 사랑이 아닌 방식으로 사랑을 한 적이 있었던가를 돌아보게 되었다.      



‘소비로서의 연애’을 벗어날 방법, 없다. 


그 인문학자의 이야기를 통해 함께 무엇인가를 생산하는 연애를 할 수 있다면, 돈이 없어서 연애를 못하는 일은 발생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큰 깨달음을 안고 현실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 깨달음 뒤에도 “돈이 없어서 연애를 못해”라고 말하는 이들에게 “생산으로서의 연애를 하세요”라고 말하지 못했다. 현실에서 만난 사람들의 삶의 모습에서 ‘생산으로서의 연애’라는 이야기가 얼마나 공허한지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 인문학자의 이야기는 분명 옳다. 지금 시대의 사랑은 자본주의적 속성에 의해 ‘소비로서의 사랑’으로 왜곡되어 있다. 그걸 부정할 순 없다. 하지만 그 대안으로 ‘생산으로서의 사랑’을 이야기할 순 없을 것 같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지금은 자본주의에 포섭되지 않은 공간이 없는 시대다. 이런 시대에 ‘생산으로서의 사랑’을 이야기하는 것은 공허하다. 마치 이론적 옳음을 증명하기 위해 강한 중력이 작용하는 현실을 일종의 ‘진공 공간’으로 가정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있는 그대로의 삶을 보자. 지금은 어떤 것이라도 생산하기 위해 소비가 필요한 시대다. 내 어머니의 말씀처럼 “움직이면 돈이 드는” 시대다. 연애를 하며 뒷마당에 상추를 기르려고 해도, 먼저 뒷마당이 있어야 한다. 음식을 만들어 먹으려고 해도 재료를 사고, 음식을 만들어 먹을 원룸이라도 있어야 한다. 하다못해, 연애편지를 생산하려고 해도 종이와 펜을 소비해야 한다. 옳은 이야기도 좋지만 정직하게 말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지금 우리에게 ‘소비로서의 연애’를 벗어날 방법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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