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소유가 아니라 존재다.
과거에 집착하는 사람들에게
‘스피노자’는 「에티카」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어떤 사람이 어떤 것을 즐기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그것을 사랑할 것이고 그것을 즐기려고 할 것이다.” 또 ‘라캉’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인간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 스피노자는 그것이 무엇이든지 상관없이 누군가 그것을 즐긴다면 그것을 사랑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라캉은 내가 욕망하는 것들은 나의 욕망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이 욕망하는 어떤 것을 내가 반복하고 있는 것뿐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게 무슨 의미일까? 표현을 달리 했을 뿐, 스피노자도 라캉도 인간의 질투심, 정확히는 소유욕에서 파생된 질투심에 대해서 이야기한 것이다. 잠자리에서 연인의 실수로 인해 질투심에 사로잡힐 수 있다. 사랑하는 사람이 섹스 도중 다른 이의 이름을 부르는데 질투심이 솟구쳐 오르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을까? 사랑으로 인해 발생한 질투심이다. 하지만 함께 차를 마시다가 “이 음악 너무 좋다”는 여자 친구의 이야기에, 갑자기 싸늘하게 “왜? 전 남친이랑 들었던 노래인가보지?”라고 말하는 것을 사랑으로 인한 질투심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건 ‘내 여자 친구는 나만 소유할 수 있어!’라는 소유욕으로 인한 질투심인 건 아닐까?
사랑으로 인한 질투심이 소유욕으로 인한 질투심으로 변질될 때, 그 감정은 자기와 상대를 파괴하는 부정적인 감정으로 돌변한다. 여자가 남자를 감당할 수 없어, 이별을 말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사랑의 뒷면이 질투심인 것은 맞지만, 질투심의 뒷면은 사랑이 아닐 수 있다. 사랑을 하면 질투심이 생기지만, 질투를 한다고 해서 사랑의 감정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의처증, 의부증은 사랑이 아니다. 그건 탐욕스런 소유욕에서 파생된 파괴적인 질투심일 뿐이다.
사랑은 소유가 아니라 존재다. 사랑은 그 자체로 그냥 존재하는 것이지 누군가를 소유하는 것도, 누군가의 소유가 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때로 사랑을 소유로 착각하곤 한다. 그래서 너무 쉽게 ‘내 여자(남자) 친구’라는 표현을 하기도 하고, 또 ‘넌 내꺼야!’라는 표현을 하는 것일 테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연인에게도 질투심을 느끼고 또 헤어진 연인에게도 질투심을 느끼곤 하는 것이다. 이미 헤어졌지만 아직도 ‘내 것’이라는 의식이 남아 있다면, 질투심을 느끼게 되는 건 너무나 당연하다.
질투를 잘 다루기 위해 중요한 질문
사랑으로 인해 파생된 질투심은 언제나 통제가능하다. 그런 질투심은 그 자체가 사랑하는 사람 때문에 나온 것이니, 그 질투심으로 상대에게 정신적, 육체적 폭력을 가하거나 사랑을 파탄 내는 이별을 맞이할 일이 없다. 하지만 소유욕으로 인해 변질된 질투심은 상황이 다르다. 이건 상대를 배려하지 않는다. 이런 질투심은 노골적으로 말해, ‘내 것인데 내가 가질 수 없다면, 파괴해버릴 거야!’라는 감정이다. 그러니 소유욕에서 나온 질투심의 끝에는 언제나 불행이 도사리고 있을 수밖에 없다.
‘나는 상대를 사랑하기 때문에 질투하는 것일까? 아니면 상대를 소유하고 있다고 여기기에 질투하는 것일까?’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다면, 연애를 하고 있다면 그래서 어쩔 수 없는 질투심에 사로잡혀 있다면 이 질문을 결코 우회해서는 안 된다. 사랑에서 파생된 질투심은 연애를 더욱 풍성하게 만드는 건강한 긴장감을 주지만, 소유욕에서 파생된 질투심은 상대와 자신을 파멸로 몰고 가기 때문이다. 또 이런 질문이 없다면, 사랑에서 파생된 질투심이라 할지라도 너무나 쉽게 소유욕으로 인한 질투심으로 변질되기 때문이다.
‘나의 질투심의 원인은 사랑일까? 소유욕일까?’라는 질문을 부여잡고 연애를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래야 연애를 하면서 결코 피할 수 없는, 너무나 우리를 괴롭히는 질투라는 감정을 조금 더 잘 다룰 수 있게 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