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있을 수 없어 연애하지 않기
‘타잔’식 연애는 좋을까?
‘타잔’식 연애도 나름 괜찮은 방법 아닐까? 이별의 고통을 최소화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는 나름 좋은 방법이다. 하지만 ‘타잔’식 연애는 몇 가지 치명적 결함이 있다. 우선 이런 연애를 하면 할수록 진짜 사랑에서 점점 멀어지게 된다는 점이다. 사랑은 그 사람이기에, 그 사람이 아니면 안 되기에 하는 것이다. 하지만 ‘타잔’식 연애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누구라도 옆에 있기만 하면 된다. 이런 식의 연애가 반복될 때, 사람이 좋아 연애 하는 게 아니라 연애를 위해 사람을 만나게 된다. 그렇게 반복된 연애는 필연적으로 사랑의 순도를 떨어뜨리게 된다.
또 한 가지 치명적 결함이 있다. ‘타잔’식 연애는 한 사람을 점점 더 미성숙한 존재로 만든다는 점이다. ‘성숙하다’는 것은 무엇일까? 쉽게 말해 그건 ‘혼자 있을 수 있음’이다. 다섯 살짜리 아이가 미성숙한 것은 혼자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옆에 엄마가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기에 다섯짜리 아이는 미성숙한 것이다. 연애도 마찬가지다. 뜨거웠던 사랑이 끝나고 나면 아프지만 혼자 있을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그저 이별을 감당해보아야 한다. 힘들지만 그럴 수 있을 때 성숙해진다. 아이가 혼자 할 수 있는 일들이 많아지면 어른이 되듯이.
혼자 있을 수 없어 연애하지 않기
사랑보다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이 어디 있을까? 그러니 연애는 항상 옳다. 하지만 연애하지 말아야 할 때가 있다. 그건 혼자 있을 수 없을 때다. 특히나 이별 후에 찾아오는 그 공허, 외로움, 불안에 시달릴 때는 더욱 그렇다. 그 부정적인 감정은 너무 쉽게 자기연민으로 변질된다. ‘나는 왜 이렇게 항상 외롭고 아픈 걸까?’라는 자기연민. 그때는 연애를 시작하지 말아야 할 때다. 그 자기연민으로 시작된 연애는 대체로 ‘타잔’식 연애로 귀결된다. 누군가를 만나 연애를 시작하는 게 아니라 연애를 하기 위해 누군가를 만나게 된다.
사랑에 관한 오래된 오해가 있다. 혼자 설 수 없는 두 사람이 서로에게 기대어 서는 것이 사랑이라는 믿음이다. 그건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혼자서도 당당하게 설 수 있는 두 사람이 서로의 손을 잡고 걸어가는 것이다. 연애의 ‘타잔’들은 정서적으로 혼자 설 수 없는 사람이다. 야박하게 말하자면, 이런 부류는 ‘연인’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엄마’가 필요한 사람이다. 잠시도 혼자 있을 수 없는 자신에게 안정감과 보살핌을 줄 수 있는 ‘엄마’를 찾는 것이다.
연애의 ‘타잔’은 연애 그 자체도 원만치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노골적으로 말해 연인을 피곤하게 한다. 왜 안 그럴까? 시도 때도 없이 엄마를 찾는 아이는 엄마를 피곤하게 하는 법이다. 뭘 하든 연인이 옆에 있기를 바라는 연애, 그건 육아다. 육아를 하고 싶지 않다면 연애의 ‘타잔’은 가급적 피하는 것이 좋다. 더욱이 심각한 건, ‘타자’식 연애를 하는 사람은 항상 이별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더 친절하고 더 관심 어린 보모가 나타나면 언제든 갈아탈 준비를 하는 것이 아이들 아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