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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집, '철학흥신소'

철학흥신소는 나의 밀실이며, 광장이며, 헤테로토피아다.

1.

“인간에게는 '광장'과 '밀실'이 모두 필요하다.”    


 아빠에겐 집이 없다. 물론 물리적인 공간으로서 집이 없다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육체를 쉬게 하고 영혼을 돌볼 공간으로서의 집은 없다. 나도 그렇다. 아이 둘을 키우는 집은 모든 공간이 아이들 공간이다. 그나마 직장을 다닐 때는 나았다. 죽기보다 싫은 직장이었지만, 그곳에 나만의 공간이 있었다는 사실만은 좋았다. 쏟아지는 업무에, 상사의 잔소리에 육체도 영혼이 말라갔다. 하지만  늦은 야근을 끝내고 텅 빈, 그래서 안락함 마저 느껴지는 나만의 공간에서 음악을 한 곡을 들을 때면, ‘여기가 바로 내 집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직장을 그만두었다. 이직도, 창업도, MBA도 할 생각이 없었다. 글을 쓰고 싶었다. ‘인생 뭐 있나? 전세 아니면 월세지!’라는 심정으로 직장을 나섰다. 아이가 둘인 가장이 어찌 돈 걱정이 안 되었을까? 미안한 마음에 아내에게 퇴직금을 모조리 주었다. 수중에 50만원 정도가 있었던 것 같다. 그마나 다행이었던 건, 글 쓰는 일은 돈이 안 되지만 한편으론 딱히 돈이 들어갈 일도 없다는 거였다. 컴퓨터만 있으면 어디서든 글을 쓸 수 있으니까. 그렇게 집필실도 없는 ‘유목민’ 혹은 ‘장돌뱅이’ 글쟁이가 되었다.



 몇 년을 카페, 때로는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글을 썼다. 좋아하는 일을 하니, 여행 배낭을 들고 다니는 정도 불편함은 당연한 것이라 여겼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자 무언가 답답하고 공허했다. 역시 인간에게는 집이 있어야 했다. 단순한 물리적 공간으로서의 집이 아니라 육체와 영혼을 돌볼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다. 어느 작가의 말처럼, 사람에게는 ‘광장’과 ‘밀실’이 모두 필요했다. 카페와 도서관은 ‘광장’이다. 가족들과 함께 사는 집 역시 광장이다. 내게 '광장'으로서의 집은 있었지만, ‘밀실’로서의 집은 존재하지 않았다.


 홍대에서 신촌으로 가는 길에 ‘카페바인’이라는 작은 카페가 있다. 나는 거기에 작은 집을 얻었다. 나의 새로운 집에 ‘철학흥신소’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나는 거기서 책을 읽고 글을 쓴다. 그리고 사람들을 만난다. 여기는 내게 ‘광장’이자 ‘밀실’이다. 사람들에게 상처 받아 혼자 있고 싶을 때 여기에서 가끔 혼자 운다. 홀로 음악을 듣고 영화를 보며 육체와 영혼을 돌본다. 여기는 나만의 ‘밀실’이다. 나는 여기서 상처받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눈다. 사람들과 함께 수업을 하고, 차를 마신다. 여기는 사람들을 만나는 ‘광장’이다.



2.

자기 이외의 모든 장소들에 맞서서, 어떤 의미로든 그것을 지우고 중화시키고 혹은 정화시키시 위해 마련된 장소들, 그것은 일종의 반反공간이다. 이 반공간, 위치를 가지는 유토피아들. 아이들은 그것을 완벽히 알고 있다. 그것은 당연히 정원의 깊숙한 곳이다. 그것은 당연히 다락방이고, 더 그럴듯하게는 다락방 한 가운데 세워진 인디언 텐트이며, 아니면 - 목요일 오후 - 부모의 커다란 침대이다.  미셸 푸코,「헤테로토피아」



 ‘유토피아’라는 개념이 있다. ‘토마스 모어’가 천국에 가까운 이상적 사회를 묘사하기 위해 고안한 개념이다. ‘디스토피아’라는 개념도 있다. ‘조지 오웰’이 자신의 소설「1984」에서 지옥에 가까운 비극적인 사회, 즉 디스토피아를 묘사한다. 우리의 집은 유토피아일까? 디스토피아일까?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는 정반대의 개념이지만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둘 다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허구의 공간이라는 것이다.


 ‘헤테로토피아’가 있다. ‘미셸 푸코’라는 탁월했던 철학자가 제시한 개념이다.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의 중간 속성을 지닌 공간으로, 현실에 분명히 존재하지만 현실의 맥락을 흐릿하게 만드는 환상적 현실을 ‘헤테로토피아’라고 했다. 이는 어렵지 않다. 어린 시절 다락방이나 작은 텐트, 아니면 평일 오후 부모의 침대 이불 속을 떠올려보자. 우리는 거기에서 얼마나 많은 공상과 상상을 했던가. 분명 그곳은 현실에 존재하지만 현실로부터 멀어지게 해서 무한한 상상을 가능케 하는 공간이었다.



 나는 집이 ‘헤테로토피아’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오직 헤테로토피아만이 우리의 육체와 영혼을 어제보다 더 아름답게 돌볼 수 있게 만들기 때문이다. 다락방, 텐트, 침대 밖의 매서운 현실을 살아가야하지만 동시에 그 현실을 흐릿하게 만들어 무한한 상상, 환상, 설렘을 만끽할 수 있는 다락방, 텐트, 침대 속이 필요하다. 내게 '철학흥신소'는 '헤테로토피아'다. 잠시 매서운 현실에서 비껴서서 무한한 상상을 하고, 또 마음 맞는 친구들과 다락방과 텐트 속에서 우주여행을 하는 헤테로토피아.


 ‘철학흥신소’는 나의 ‘밀실’이며, ‘광장’이고, 또한 ‘헤테로피아’다. 그래서 바로 이곳은 나의 집이다. 나 자신을 만나고, 사람을 만나는 공간. 나는 이 공간에서 그렇게 나의 육체와 영혼을 돌보고 싶다. 나는 바로 이 공간에서 문을 열고 매서운 현실과 타자들이 우글거리는 세상으로 나갈 준비를 한다. ‘철학흥신소’에서 읽고, 쓰고, 만난다. 바로 여기가 나의 집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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