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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엄마’라는 여자의 친구가 되고 싶다.

애증의 대상, 나의 엄마

차이나타운의 ‘엄마’


‘엄마는 딸에게 빚을 받아오라고 시켰다. 엄마는 딸의 남자 친구를 죽였다. 그리고 외국으로 딸마저 팔아넘기려고 했다. 그래서 딸은 엄마를 죽였다. 하지만 엄마는 별 저항 없이 조용히 딸에게 죽임을 당해주었다’ 


  평범한 일상과는 너무나 거리 먼 이야기다. 영화 ‘차이나타운’의 내용이다. 물론 여기서 등장하는 ‘엄마’는 진짜 엄마도, 친 엄마도 아니다. 당연히 딸 역시 진짜 딸도 친 딸도 아니다. 딸은 태어난 후 지하철 보관함 10번에 버려져, ‘일영’이라는 불리는 여자 아이다. ‘엄마’는 자신의 조직의 충실한 일원으로 ‘일영’을 거둬 키운다. 하지만 어느 날 불시에 찾아온 ‘일영’의 사랑 때문에 모든 것이 뒤엉키게 된다.


  ‘엄마’의 명령으로 빚을 받으러 간 ‘일영’은 채무자의 아들과 사랑에 빠지게 된다. 태어나서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따뜻함과 친절함에 매료된 것이다. ‘엄마’의 명령을 거역하고 그 남자와 함께 도망치려고 했던 ‘일영’을 ‘엄마’는 용서하지 않았다. 남자는 죽여 버렸고, 일영은 외국으로 팔아넘겨버리려고 했다. 하지만 ‘일영’은 우여곡절 끝에 도망쳐 나와 결국은 ‘엄마’를 죽이게 된다.



불편한 영화, 차이나타운


이 영화는 불편하다. 조직을 운영하기 위해 어린 아이를 이용하는 천하의 죽일 년인 ‘엄마’ 그리고 그 ‘엄마’를 응징하는 불쌍한 딸 ‘일영’의 이야기로 끝나지 않기 때문이다. 차이나타운의 ‘엄마’도 모성애를 가진 어쩔 수 없는 여자여서일까? 자신도 너무나 외로워서였을까? 오래 시간 ‘일영’과 함께 해서 정이 들어서였을까? 어찌되었건 ‘엄마’도 ‘일영’을 사랑했었나보다. 자신을 죽이러 온 ‘일영’을 위해 짜장면 한 그릇을 시켜놓았다. 또 충분한 힘과 권력이 있었으면서도 ‘일영’에게 순순히 죽임을 당해주었다.


  ‘엄마’는 자신을 칼로 찌른 딸에게 죽어가면서 열쇠를 하나 건넨다. ‘일영’이 태어난 지하철 10번 보관함의 열쇠였다. 그 보관함에는 가족관계 증명서류가 있었다. ‘엄마’가 ‘일영’을 진짜 딸로 입양했다는 가족관계 증명서. 10번 보관함에 있었던 것은 ‘일영’을 향한 ‘엄마’의 사랑이었다. 그래서 이 영화는 불편하다. 어린 아이들을 이용해 온갖 범죄를 저지르는 ‘엄마’가 우리 시대의 다른 엄마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나는 이 영화가 좋았다. 부모와 자식 관계를 정직하게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효(孝)라는 학습된 이념 때문에, 엄마의 희생 때문에, 엄마와 행복했던 추억 때문에 세상 사람들은 엄마를 ‘사랑해야만’ 한다고 강요한다.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나 역시 그렇다. 엄마에게 효도를 해야 한다는 강박이 여전히 있다. 힘든 시절을 희생해온 엄마의 삶을 잘 알고 있다. 쓸데없는 데에 돈을 절대 쓰지 않는 엄마가 그렇게나 갖고 싶었던 롤러스케이트를 사주었던 날의 행복한 기억도 있다. 가끔 그런 엄마 생각이 들 때면 눈물이 핑 돌 때가 있다. 



 날 때 부터 엄마인 여자는 없다.


내게 가진 많은 행복한 추억도 엄마가 만들어준 것이지만 동시에 내가 가진 많은 상처 역시 엄마로부터 기인했다. 엄마는 돈에 쪼들릴 때면 욕설과 폭언을 했고, 남편에게 받은 스트레스를 아들에게 풀기도 했다. 결혼을 하고 두 아이를 낳고야 알게 되었다. 남편에게 풀지 못하는 스트레스는 간혹 아이들을 향할 수도 있다는 걸. 지금 내 속의 어두운 부분의 대부분 엄마가 어린 시절 내게 주었던 상처들에서 기인한다는 것을 서른이 훌쩍 넘어서야 알게 되었다.


  물론 엄마를 원망하는 건 아니다. 그러기에는 이제 세상을 너무 많이 안다. 태어 날부터 엄마인 여자는 없다. 어리고 미성숙해서 자신조차 감당할 수 없는 여린 여자가 어느 날 엄마가 된다. 육아라는 고됨, 부모라는 경제적 부담을 감당하기에는 모든 초보 엄마는 아직 너무 어리고 미성숙하다. 나의 엄마 역시 그랬을 테다. 엄마가 입버릇처럼 하는 말처럼 정말 ‘느그 아부지 안 만났으모 내도 이리 안 살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나는 엄마를 원망하지 않는다. 그녀 역시 겨우 겨우 자신의 삶을 감당해왔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엄마이기 때문에 모든 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사랑해야만 한다’는 세상 사람들의 이야기에 동의하지는 않는다. 나는 가끔 엄마가 싫다. 엄마는 내게 조금 특별한 존재다. 내게 엄마는 ‘애증’ 그러니까 애정과 증오를 오가게 하는 존재다. 그녀와 함께 살아왔던 삶을 생각하면 고맙고 또 마음이 아파 가끔 울컥하기도 하지만 때로 엄마를 안보고 지냈으면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엄마는 나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지만 나와 가장 어울리지 않는 사람 중에 한 명이다. 그게 정직한 내 심정이다.



애증의 대상, 나의 엄마

직장을 그만둔 후 엄마에게 전화를 할 때가 있다. 엄마는 내게 한심하다는 듯이 말한다. “요새 뭐하노? 맨 날 노니까 좋나? 마누라는 쌔가 빠지게 돈 벌고 니는 매일 놀고 잘 한다” 알고 있다. 아들 걱정이 돼서 그렇게 말한다는 거. 혹시 아내에게 장모에게 돈 못 버는 남편, 사위이라고 무시는 당하지 않을지 걱정이 되어서 그리 말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게 그녀 스타일이다. 그걸 알지만 그 스타일 딱히 마음에 들지는 않는다. 그 스타일 때문에 어린 시절 상처를 적지 않게 받은 탓에 지금도 엄마가 그런 식으로 말할 때면 분노가 스멀스멀 올라온다.


  영화 ‘차이나타운’의 ‘엄마’를 보며 참 많은 생각을 했다. 자신이 살아왔던 거칠고 고된 세월 때문에 자신의 사랑을 잘 표현하지 못했을 뿐, 그 속에는 누구 못지않은 사랑이 있는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을 했다. 동시에 ‘엄마’의 섬세하지 못한 혹은 폭력적인 모습 때문에 종종 자식들은 깊은 상처를 받게 되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도 했다. 그게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진짜 엄마의 모습이고, 또 그게 진짜 자식의 모습이지 않을까? 한없는 사랑을 주고받지만 그 이면에는 또 깊은 상처를 주고받으며 살 수 밖에 없는 것이 평범한 엄마와 자식의 관계 아닐까? 그게 평범한 사람들의 진짜 삶 아닐까?


  그런 애증의 관계가 우리 시대의 평범한 엄마와 자식의 관계인 것 같다. 생각해보면 그렇다. 마냥 좋기만 한 엄마가 어디 있을까? 또 마냥 싫기만 엄마가 어디 있을까? 잔혹하고 이기적인 여자가 자신의 조직을 유지하기 위해 키운 조직원 ‘일영’에게도 기묘한 모성애를 느끼게 되는 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할 바도 없다. 함께 밥 먹고 이야기하며 지낸 온 그 긴 추억을 생각할 수 있다면 말이다. 그게 평범한 삶일 게다. 때로 엄마 생각이 눈물이 핑 돌 정도로 뭉클해지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때로 엄마가 준 상처와 그 흔적들 때문에 엄마가 싫어지기도 하는 삶, 그게 평범한 삶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바로 내 삶이 그랬으니까. 



그녀와 친구가 되고 싶다. 그것이 가능하다면.


직장을 그만 둔 후 가끔 엄마 생각을 한다. ‘나는 엄마와 어찌 지내야 할까?’라는 생각을 한다. 엄마라는 단어만 들어도 가슴 한켠이 먹먹해지기도 하지만 또 가끔은 통화도 하기 싫을 정도로 미워지는 엄마와 어찌 지내야 할까? 엄마이기 때문에 무조건 사랑해야만 하는 삶은 살고 싶지 않다. 또 어린 시절의 상흔 때문에 엄마를 미워하기만 하는 미성숙한 인간으로 살고 싶지도 않다. 나는 정직해지기로 했다. 나는 누군가를 ‘사랑해야만’ 하기 때문에 사랑하고 싶지 않다. 누군가를 ‘싫어해야만’ 하기 때문에 싫어하고 싶지도 않다. 한 사람을 사랑하고 싶을 때 사랑하고 싫어질 때 싫어하고 싶다. 그 대상이 엄마라도 말이다.


  나는 엄마가 보고 싶고 생각날 때는 전화해서 안부를 물으며 살고 싶다. 또 엄마와 함께 한 행복한 추억이 생각날 때면 그때 정말 행복했다고 그래서 고마웠다고 편지 한통을 적어 보내고 싶다. 하지만 여전히 예전처럼 또 자신의 감정을 통제하지 못해 상처를 주려고 한다면 ‘그래서 엄마가 싫다’고 정직하게 말하고 싶다. 누군가 나를 불효자라고 비난해도 할 수 없다. 나는 효자가 되고 싶은 생각이 없다. 그저 나를 긴 시간 키워준 이제 환갑을 넘긴 그 여자의 친구가 되고 싶을 뿐이다.


  나는 ‘엄마’라는 여자의 친구가 되고 싶다. 그 친구는 내게 특별하다. 나는 이제 싫은 사람과는 친구를 하지 않지만 그 친구는 예외라서 그렇다. 그녀는 내가 싫어도 만나는 유일한 친구다. 헤어지려고 해도 헤어질 수 없는 친구이니까. 그 친구와 동행하기 위해 나는 정직해져만 한다. 고마울 때, 보고 싶을 때는 고맙다고 보고 싶다고 말하고, 또 싫어질 때는 싫다고 말할 것이다. 그게 나와 그녀가 동행하는 가장 현명한 방법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나는 그렇게 엄마의 친구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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