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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정체되었다고 느끼나요?

열심히 살지만 삶이 정체되어 있다고 느끼는 사람들에게

잠도 덜 깬 상태로 지하철에 몸을 구겨 넣은 채로 직장을 향한다. 쏟아지는 업무, 상사의 잔소리에도 묵묵히 주어진 일을 한다. 퇴근 후 상사, 동료들과 맥주 한 잔은 업무의 연장이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났다. 주말이다. 토요일 오전 자기계발 모임으로 간다. 일요일은 주식, 경매에 관련 강의를 들으러간다. 


 알고 지낸지 오래된 친구의 일주일 단상이다. 특별한 것이 없어 보인다. 특별한 것이 있다면, 보통의 사람들보다 부지런 한다는 것 정도일 테다.  하지만 이 친구에게는 ‘특별한’ 문제가 있다. 그 바쁜 와중에 맥주 한 잔을 하자며 연락이 왔다. 놀랍게도 그는 내게 “어쩐지 내 삶이 정체되어 있는 것 같아”라고 말했다. 정체라니? 이 친구보다 더 열심히 사는 사람이 또 어디 있단 말인가. 직장에서 열심히 노력해서 승진하고, 주말이면 자기계발에 주식, 경매 강의까지 듣는 친구 아닌가. 그런 삶이 정체되어 있다면 대체 누구의 삶이 정체되지 않았단 말인가.


 ‘정체’의 반대말은 ‘흐름’이다. 그러니 참, 역설적인 일이다. 흐르는, 그것도 누구보다 역동적으로 흐르는 삶에서 정체를 느낀다니 말이다. 이런 역설적인 일이 그 친구에게만 일어나는 특별한 일이 아니라는 게 심각한 문제다. 취업 준비, 직장생활, 창업, 장사, 주식, 경매 등등 다들 열심히 산다. 역동적으로 산다. 심지어 그 역동적인 흐름에 우리네 삶이 휩쓸려 나갈 지경이다. 하지만 그런 역동적인 삶의 흐름에 속에 우리는 종종 “내가 잘살고 있는 건가? 내 인생이 왜 이렇지?”라고 말하며 삶이 정체되어 있음을 느낀다.



'정체'의 반대말은 '흐름'이 아닐지도 모른다.


이유가 무엇일까? 역동적인 ‘흐름’ 안에서 ‘정체’를 느끼는 이유가 뭘까? ‘정체’의 반대말은 ‘흐름’이 아닐지도 모른다. 어디론가 흘러가지 않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우리는 삶이 정체되었음을 느끼니까 말이다. 중요한 건 흐름의 ‘방향’이다. 흘러가고 있는 방향에 따라, 역동적으로 어디론가 달려가지만 기묘한 정체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 흐름의 역동성과 별개로 방향이 잘못되었다면 삶이 정체되어 있다고 느끼게 된다. 이제 질문하게 된다. 삶이 ‘정체’되어 있다는 그 불편하고 불쾌한 느낌에서 벗어나려면, 그 '흐름'은 어떤 ‘방향’이어야 하는가?

   

 내 친구의 이야기로 답해보자. 역동적으로 사는 그 친구는 왜 정체감에 시달렸을까? 이유를 안다. 마음 속 깊은 곳에 자리 잡은, 하지만 버거운 세상살이 때문에 외면해버린 '욕망' 때문이다. 언젠가는 자신이 찍은 사진들로 전시회를 열고 싶다는 그 욕망. 서글픈 것은 언제나 현실은 욕망을 교살한다는 사실이다. ‘먹고사니즘’ 때문에 사진작가가 되고 싶다는 욕망을 외면했다. 심지어 ‘요즘 같은 세상에 사진작가는 무슨 얼어 죽을!’이라며 자신의 욕망을 부정해버렸다. 그렇게 그는 직장생활, 자기계발이라는 역동적인 흐름에 몸을 맡겼다.



정체, 흐름, 방향, 그리고 욕망


어떤 ‘방향’으로 ‘흘러야’ 하는가? 내면 깊숙한 곳에서 흐르는 욕망의 방향이다. 오직 나이기에 욕망하는 것들의 방향으로 흘러야한다. 그 방향의 흐름만이 그 기묘한 정체감에서 벗어날 수 있는 흐름이다. 내면의 욕망을 외면하고 부정하면서 내달리는 역동적 흐름 끝에는 절망과 좌절이 도사리고 있을 뿐이다. ‘이건 내가 살고 싶은 삶이 아니었는데...’라는 절망과 좌절보다 더 끔찍한 절망과 좌절을 나는 알고 있지 못하다. 삶이 정체되어 있다는 불쾌하고 불편한 느낌이 엄습해온다면, 더 열심히 노력할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잠시 멈추고 자신의 내면의 욕망을 돌아볼 일이다.


 물론 안다. 내면의 욕망을 돌아보는 것, 그리고 그 욕망을 따르는 삶도 모두 심각한 불안을 동반한다는 것을. 그 친구가 이제 카메라를 잡지 않는 것도, 직장생활과 자기계발에 더욱 집착하는 것도 그 불안으로 벗어나고 싶기 때문일 테다. 욕망을 발견하고 그것을 따르는 삶이 주는 불안함에서 벗어나고 싶은 것일 테다. 욕망을 발견하고 따르는 삶은 불안하다. 하지만 욕망을 외면하고 부정하는 삶 끝에는 절망이 도사리고 있다. 고되고 버거운 삶을 살아가는 우리는 '절망'과 '불안',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할까? 삶의 지혜 하나! 절망보다 불안을 껴안는 것이 훨씬 밝고 유쾌한 삶이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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