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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변할 수 있다. 아니 변해야만 한다.

변하지 못하는 자신에게 실망한 사람에게 1

사람은 변할 수 있을까? 변하지 않을까?   


‘사람은 변할 수 있을까? 사람은 변하지 않는 것일까?’ 라는 질문에 ‘사르트르’라는 철학자는 이리 답했다. “실존은 본질에 앞서서 온다” 선뜻 이해하기 어렵다. 이 난해해 보이는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사르트르가 말한 ‘존재’라는 개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존재’는 본질이 미리 정해져 있는 사물들이다. 예를 들면 노트북, 가방, 물통 같은 것들이다. 우리는 일상에서 노트북, 가방, 물통이라는 ‘존재’를 보지만 이 ‘존재’는 본질에 결코 선행하지 않는다.      


 가방의 본질이 무엇인가? ‘물건을 담을 수 있는 어떤 것’이다. 이 가방의 본질을 사람이 떠올린 후에야 누군가가 가방을 만들 수 있는 것이다. 노트북도 물통도 마찬가지다. 노트북이라는, 물통이라는 ‘본질’이 먼저 온 후에야 ‘존재’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주위를 둘러보면 그렇지 않은 것이 없다. 다 본질이 있고, 그 ‘본질’을 실현하는 방법으로 ‘존재’한다. ‘본질이 존재에 선행한다’는 의미는 달리 말해 존재는 변할 수 없다는 뜻이다. 정확히는 존재는 애초에 주어진 본질을 밖으로 나설 수 없다는 의미다. 연필은 지우개가 될 수 없고, 필통은 도시락 통이 될 수 없는 것처럼.     



사르트르의 '실존' 혹은 '탈존'


하지만 사르트르는 유일하게 본질 밖으로 나설 수 있는 ‘존재’가 있다고 말하고 있다. 바로 ‘실존’이다. 이것이 ‘실존’이 밖으로 나간다는 의미인 'exit-'에서 파생된 'existence'인 이유다. 사르트르는 인간을 'existence'(실존)라고 이야기하면서, “실존은 본질에 앞서서 온다”고 말했다. 이 이야기를 통해서 사람은 변할 수 있는지 혹은 그렇지 않은지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다. 유일하게 인간이라는 존재, 그러니까 ‘실존’만이 본질에 앞서서 온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 인간에게는 미리 주어진 본질 같은 것은 없다는 의미다. 이 말은 인간은 변할 수 있는 존재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모든 존재는 본질에 갇혀 태어나고 죽는다. 연필은 연필로 태어나서 죽고, 가방은 가방으로 태어나서 죽고, 개는 개로 태어나서 개로 죽는다. 하지만 사르트르는 실존(인간)만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사르트르는 인간은 본질 안에 갇혀 있는 존재가 아니라 끊임없이 자신의 본질 밖으로 향하면서 자신의 본질을 새롭게 만들 수 있다고 했다. 더 나아가 인간은 자신의 본질을 새롭게 만들어야만 하는 존재라고까지 말했다. 그래서 사르트르는 ‘인간은 자유롭도록 저주받은 존재‘라고 표현했던 것일 테다.


 사르트르에게 ‘인간은 변할 수 있나요?’ 라고 묻는다면 그는 분명 이렇게 답했을 것이다. ‘사람은 변할 수 있고 또 변해야만 한다. 인간은 본질에 선행하니까’라고. 같은 맥락에서, ‘삼성전자에 입사하기 위해 태어났다’고 말하는 직장인에게, ‘연기를 하기 위해 태어났다’고 말하는 배우에게, ‘노래를 하기 위해서 태어났다는 가수’에게 사르트르는 그렇게 말했을 게다. ‘당신은 실존이 아니라 그저 존재일 뿐이오!’ 사르트르에게 인간은 끊임없이 삼성전자 직원, 배우, 가수라는 본질 바깥으로 나서야만 하는 실존(탈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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