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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심삼일에 대처하는 자세

변하지 못하는 자신에게 실망한 사람에게 2

우리는 '대자'(對自)적 존재인가?


의문이 든다. ‘인간은 변할 수 있다’는 말을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 왜 인간만이 본질 밖으로 나서서 자신의 본질을 새롭게 만들 수 있을까? 사르트르는 그 질문에 대해 이렇게 답하고 있다. ‘인간은 대자(對自)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 말이 난해한 이유는 딱 한 단어 때문이다. ‘대자’(對自). 그러니 ‘대자’(對自)라는 단어만 이해하면 사르트르의 이야기는 어렵지 않다. 대자(對自)의 문자 그대로의 의미는 ‘자신에 대해서 답할 수 있음’이다. 쉽게 말해 인간은 스스로 반성할 수 있는 존재라는 의미다.


 인간만이 과거 자신의 모습과 거리를 두어 성찰할 수 있다. 그렇기에 인간은 자신의 새로운 본질을 만들어 내어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사르트르의 핵심 논리다. 하긴 그렇다. 연필이 연필이라는 본질에 갇히는 이유는 자신이 연필이라는 사실에 거리를 두어 성찰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개가 개라는 본질에 갇혀 죽을 때까지 개로 살 수밖에 없는 이유는 자신이 개처럼 살고 있다는 자기 성찰을 할 수 없기 때문 아닌가. 오직 인간이라는 실존만이 자신의 삶에 스스로 답할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사람은 변할 수 있다.



대자적인 존재임에도 변하지 못하는 답답함.


사르트르의 이야기는 옳다. ‘인간은 대자적 존재’라는 말도, 그렇기에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말도 다 옳다. 그래서 인간이 변할 수 있다는 이야기도 논리적으로 옳다. 하지만 이제 철학에서 거리 두어 다시 삶으로 와보자. 우리 주위 사람들을 보자. 과거의 자신과 단절하여 다른 사람으로 변하는 경우를 얼마나 보았을까? 씁쓸하게도 소심한 사람은 늘 소심하게 살아가고, 게으른 사람은 늘 그렇게 게으르게 살아가는 것이 일반적인 삶의 모습 아니던가.


 분명 인간은 자기성찰을 할 수 있는 ‘대자’(對自)적 존재다. 그래서 과거의 자신과 결별하고 새로운 자신을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소심한 사람인들 자신의 소심함을 돌아보고 성찰해보지 않았을까? 게으른 사람도 자신의 게으름을 돌아보고 반성해보지 않았을까? 자신이 못마땅해 보이는 어떤 점을 단 한 번도 대자(對自)적으로 성찰하고 반성해보지 않는 사람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과거의 자신과 결별하고 다른 사람으로 변하지 못한 채 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사르트르의 이야기는 때로 공허하게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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