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여'적 인간이 되자.
“얼마 전에 어떤 모임에서 소외되었는데, 괜찮아요. 그런 아픈 경험도 결국 제 삶에 도움이 된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요.”
“그런 정신승리는 하지 않는 게 좋아요. 그런 의미부여 때문에 삶이 더 두려워지는 거예요.”
“자기 삶에 대한 의미부여를 하지 말라뇨?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면 희망도 생기지 않는다는 걸 선생님이 몰라서 그래요.”
과거의 상처에 의미를 부여하려는 분과의 대화는 그 즈음에서 멈췄다. 그 분만 그럴까? 소위, 자신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의미부여’를 좋아한다. 흥미로운 점은 좋은 일 보다는 안 좋은 일에 더욱 의미부여를 하려고 한다는 사실이다. 이유는 어렵지 않다. 그렇게 해야 자신의 삶을 더 ‘희망’적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의미부여’는 자신의 삶을 ‘희망’적으로 보려는 일종의 심리적 도구다.
직접적으로 묻자. ‘희망’은 좋은 것일까? 질문 자체가 황당하다고 여길지도 모르겠다. ‘희망이 있어야 꿈을 이룰 수 있다’ ‘희망적으로 생각해’ 희망이 없는 삶은 참혹하다’라는 식의 희망예찬론은 너무 흔하지 않은가. 그래서 이제 우리는 ‘희망을 가져라!’는 말 자체를 의심하지 않는다. 희망은 너무나 좋은 것이라 믿으니까. 하지만 놀랍게 삶의 진실은 이와 전혀 다르다. 희망은 좋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희망은 삶을 두려움으로 몰아넣는다.
스피노자는 「에티카」에서 ‘희망’에 대해서 이렇게 정의했다. “희망이란 우리가 그 결과에 대하여 어느 정도 의심하고 있는 미래 또는 과거의 사물의 관념에서 생기는 불확실한 기쁨이다.” 어렵지 않다. 희망은 의심하고 있는 사물을 생각할 때 발생하는 불확실한 기쁨이다. 예컨대, ‘자신이 부자가 되는 모습’(의심하고 있는 사물)을 생각할 때 기쁨을 느끼는 데, 이것은 의심하고 있기에 확실하지 않은 기쁨이다. 이 불확실한 기쁨이 바로 희망이다. 여기까지는 희망은 좋은 것 같기도 하다. 불확실하기는 하지만 기쁨이니까.
하지만 스피노자는 이 희망의 반대 짝이 되는 감정으로 ‘두려움’(공포) 말하고 있다. “두려움(공포)란 우리가 그 결과에 대하여 어느 정도 의심하고 있는 미래 또는 과거의 사물의 관념에서 생기는 불확실한 슬픔이다.” 즉, ‘자신이 가난뱅이가 되는 모습’(의심하고 있는 사물)을 생각할 때 느끼게 되는 불확실한 슬픔이 바로 두려움(공포)다. 우리는 흔히 희망은 좋은 것으로, 두려움(공포)은 나쁜 것으로 여긴다. 희망은 삶을 건강하게 하고, 두려움(공포)은 삶을 어둡게 만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희망과 두려움은 언제나 붙어 다닌다. 그래서 스피노자는 “공포 없는 희망은 없으며, 희망 없는 공포는 없다”고 말했다. 이어 “왜냐하면 희망에 기대어 어떤 사물의 결과를 의심하는 사람은 그 미래의 사물의 존재를 배제하는 어떤 것을 표상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러한 한에 있어서 그는 슬픔을 느끼고 결국 희망에 의지해 있는 동안 그 사물의 결과를 두려워한다.”라고 말했다.
우리가 ‘자신이 부자가 되는 모습’(희망)을 생각할 때, 그것은 언제나 불확실하기에 반드시 ‘자신 가난뱅이가 되는 모습’(공포)이라는 생각까지 불러일으키게 된다는 말이다. ‘희망’이라는 기쁨과 ‘두려움’(공포)라는 슬픔은 언제나 붙어 있는 한 세트다. 희망이 커지면 커질수록 그 희망만큼의 두려움(공포)에 휩싸일 수밖에 없다. 과도한 의미부여를 통해 희망을 갖고자 하지만 그 희망만큼 우리는 두려움(공포)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의미부여는 희망을 만들어내는 심리적 도구인 동시에,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도구이기도 하다.
지금 우리는 절박한 질문 앞에 서 있다. ‘희망 없이 어떻게 살아야 하나?’ 암울하고 걱정스런 그래서 불안한 현실을 그나마 버틸 수 있게 해준 감정이 희망 아니었던가. 불교에는 ‘진여’眞如 (tathatā) 라는 개념이 있다. ‘모든 현상의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이라는 의미다. 희망도 두려움도 넘어서려면 ‘진여’가 필요하다. 모든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한다.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다면 희망도 없고, 두려움도 없다. 나와 내 앞에 펼쳐진 삶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중요하다.
이러저런 상처 받았던 일에 과도하게 의미부여 하지 말자. 어제 연인에게 이별 통보 받았다면, (아픈 일이긴 하지만) 그 사실을 있는 그냥 그대로 보고 받아들이자. ‘이 일이 지금은 아프지만 분명 내 삶에 도움이 될 거야’라는 식의 억지스러운 희망적 의미부여를 할 필요 없다. 아니 해서는 안 된다. 상처가 아물 때까지 그냥 아파하면 된다. ‘진여’적 인간이 되자. 나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려고 노력하자. 그렇게 희망도 공포도 넘어서자. 그렇게 우리는 어제보다 성숙한 그래서, 행복한 인간이 될 수 있을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