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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을 공부해야 하는 이유

프롤로그  : "에티카를 읽어보셨나요?"

세상에 없는 '스피노자' 대신, '신도림 스피노자'와 함께 읽는「에티카」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1.

철학은 무엇일까요? 철학은 ‘앎’과 ‘삶’이라는 두 가지 문제가 관련되어 있을 겁니다. 도서관에서 어려운 글에 파묻혀 많은 이론적 지식, 즉 ‘앎’에 도달한 사람도 ‘철학적’입니다. 반대로 도서관 근처에도 가본 적 없고, 철학 책 한권 읽은 적이 없지만, 자신의 ‘삶’을 수행하듯 정직하고 치열하게 살아낸 사람 역시 ‘철학적’입니다. 말하자면, ‘앎’은 이론이자 지식으로서의 철학, ‘삶’은 실천이자 수행으로서의 철학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물론 '앎'과 '삶'이라는 두 가지 철학은 별도로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명료한 ‘앎’에 도달하면 자연스레 ‘삶’으로 실천하게 되고, 수행하듯 ‘삶’을 진지하게 살아내다 보면 자연스레 이론적 지식으로서의 ‘앎’이 생기게 마련이니까요. 바로 여기에 우리가 ‘앎’으로서의 철학을 배워야하는 이유가 숨어 있습니다. 



 삶은 가르치거나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삶은 좌충우돌하며 그저 살아내야 하는 것이지요. 삶으로 앎에 도달하는 사람이 드문 이유를 알 것도 같습니다. 수행하듯 실천하듯 살아내기보다 그저 때우듯 쫒기듯 살아내는 사람이 대부분이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살지만(삶) 제대로 알지(앎) 못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앎’이 중요한 겁니다. 그래서 이론으로서, 지식으로서 철학을 공부해야 하는 겁니다. ‘삶’으로 ‘앎’을 구축하기가 어렵기에, ‘앎’으로 ‘삶’을 구축해야 합니다. 제대로 공부해서 명료한 앎에 이르면 자연스레 그에 걸 맞는 삶에 이를 수 있으니까요. 말하자면, ‘앎’으로서의 철학은 때우듯 쫒기듯 사는 삶을 잠시 멈춰 세워 다른 삶을 구축할 수 있는 공간을 여는 시작점인 셈입니다. 그래서 ‘철학은 무슨 철학이야, 열심히 살면 되는 거지’라고 쉽게 말하지 말고 앎으로서의 철학을 공부해야 하는 겁니다.     






2. 

이제 앎으로서의 철학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충분히 이야기했지요? 그럼 이제 ‘철학을 어떻게 공부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져야 할 차례입니다. 선생도, 학교도, 학위도 없이 맨땅에 헤딩하듯이 철학을 공부하면서 이 질문에 나름 답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앎으로서의 철학을 공부하는 방법론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 쉬운 텍스트부터 시작해서 어려운 텍스트로 나아가는 방법입니다. 두 번째는 그냥 어려운 텍스트를 읽어나가는 겁니다. 어느 것이 좋다, 나쁘다고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두 방법 모두 나름의 장단이 있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 방법, 쉬운 텍스트로 시작해서 어려운 텍스트로 나아가는 방법은 효율적입니다. 효율적인 만큼 많은 사람들이 선택합니다. 서점에 쉬운 철학을 표방하는 철학 입문서가 그리도 많은 이유도 같은 맥락에서일 겁니다. 철학은 함축적이고 난해한 개념이 난무해서 읽어도 무슨 말인지 모르는 텍스트가 너무 많지요. 그래서 철학을 시작하지도 못하고, 시작해도 중간에 포기하는 사람이 그리도 많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방법이 반드시 좋은 방법인 것은 아닙니다. 


 쉬운 텍스트에 길들여져 어려운 텍스트로 나아가지 못하는 경우를 많이 보았습니다. 깊이 있는 사유를 선물해줄 어려운 텍스트를 읽어나가고자 했던 처음 의도를 까맣게 잊은 채, 쉬운 텍스트에 머물며 얄팍한 만족감에 젖어버리기도 합니다. 그리곤 시간이 지나 이렇게 말하지요. “철학은 의미 없어. 삶을 변화시키지도 못하고 도움도 안 되잖아” '앎'은 '삶'을 변화시킵니다. 만약 '앎'이 '삶'에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면, 그 앎이 제대로 된 명료한 앎이 아니라 쉬운 텍스트로 익힌 얄팍한 앎이었기 때문일 겁니다.



 두 번째 방법, 무작정 어려운 텍스트를 읽어나가는 방법은 효율적이지는 않지만 효과적입니다. 이 방법의 단점은 말하지 않아도 알고 계실 겁니다. 글자만 읽을 뿐 내용과 의미는 전혀 알지 못한 채 책을 붙들고 있는 고문을 당해야 한다는 것이 가장 큰 단점이지요. 밀도 있고 깊이 있는 텍스트는 언제나 그렇지요. 그래서 이 방법은 효율적이지는 않은 겁니다. 누군가에는 철학이 두려움의 대상이, 누군가에는 포기의 대상이 된 것도, 몇몇의 악명 높은 철학자, 예컨대 스피노자, 칸트, 비트겐슈타인 같은 이들이 남긴 난해한 텍스트 때문일 겁니다.

      

 이 방법의 장점은 무엇일까요? 효과적이라는 겁니다. 일류 복서들이 즐비한 체육관에서 운동하는 초보 복서를 생각해볼까요? 그는 언제나 한 대도 때리지 못하고 흠씬 두들겨 맞기만 할 겁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첫 시합을 하면 알 게 됩니다. 놀랍게 성장한 자신의 기량을 말이죠. 어려운 텍스트를 먼저 읽는 것도 비슷할 겁니다. 어려운 텍스트를 바로 읽어나가는 것은 힘들지만 그 과정을 해낼 수 있다면 놀랍게 성장한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때 철학 입문서는 시시해보일지도 모릅니다. 너무 쉬워서 뻔한 이야기니까요.    



  



3. 

두 번째 방법은 분명 효과적이지만 누구나 이 방법을 사용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두 번째 방법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조금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일류 복서들이 즐비한 체육관에서 운동하는 초보 복서라고 모두 실력이 일취월장하는 건 아닙니다. 맞다 지쳐 포기해버리는 초보 복서들이 훨씬 많을 겁니다. 좋은 코치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포기하지 않고 그 되고 어려운 훈련을 견뎌낼 수 있지요. 어려운 텍스트를 바로 읽어내는 과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좋은 가이드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포기하지 않고 어려운 그 과정을 해낼 수 있으니까요. 


 그런 가이드가 있다면 어려운 텍스트를 바로 읽어가는 방법도 불가능하다거나 지겹고 고통스러운 과정이지만은 않을 겁니다. 스피노자의 「에티카」는 악명 높은 책이지요. 읽어도 무슨 말인지 모를 만큼 난해하니까요. 많은 사람들이 스피노자와 「에티카」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인용하지만 실제로 그 텍스트를 직접 읽어보신 분은 많지 않을 겁니다. 대부분 어디에서 인용된 ‘카더라’를 접하고 이야기하거나 재인용한 경우일 겁니다.



 이제부터 시작하려는 이야기의 목적은 분명합니다. '에티카 직접 읽기!' 어떤 사람이 읽고 가공해 놓은 「에티카」해설이 아니라 어려운 텍스트 ,「에티카」를  각자의 힘으로 직접 읽어낼 수 있게 해드리고 싶습니다. 이번 기회에 스피노자의 「에티카」라는 보물같은 텍스트를 직접 읽어낼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자신의 삶도 누군가 창을 통해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눈으로 직접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안목을 기를 수 있었으면 좋게습니다. 


 지금 시작하는 이 글이「에티카」를 읽어낼 수 있게 도와주는 좋은 코치이자 가이드가 되기를 바랍니다. 세상에 없는 '스피노자' 대신, '신도림 스피노자'와 함께 읽는「에티카」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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