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배적인 힘을 이겨낼 수 있는 의지는 도대체 어떻게 생기는 걸까?
지배적인 힘을 이겨낼 수 있는 의지는 도대체 어떻게 생기는 걸까?
먼저 첫 번째 의문을 풀기 전에 우리가 기억해둬야 할 스피노자의 말이 있다. 바로 우리는 본질적(신의 속성을 부여받았기에)으로 기쁨을 추구하고 슬픔은 멀리하는 존재이며, 끈질기게 그 것을 지속하려 노력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본질은 외부의 원인에 의해서가 아니면 결코 파괴될 수 없다.(에티카 3부 정리4, 5, 6, 7, 28) 그렇다. 우리는 원래 이렇게 기쁨을 추구하는 존재이지만 외부의 힘에 의해 그 본질을 서서히 잃어갔다. 언제나 기뻤던 어린 시절과 달리, 안타깝게도 지금은 누군가가 “오늘 기쁜 일이 있었어?”라고 물으면 한참을 생각해봐야 하고, 심지어 기억이 나지 않을 수도 있다.
여기서 우리는 '기쁨'이라는 감정에 집중해봐야 한다. 왜냐하면 외부의 힘에 휘둘리지 않는 자신의 힘과 의지란 이 기쁨에서부터 비롯되기 때문이다. 심지어 스피노자는 우리를 휘두르는 선과 악의 개념조차 우리의 기쁨 또는 슬픔의 감정일 뿐이라 말한다.(에티카 4부 정리8) 그렇다면 대체 이렇게도 중요한 기쁨이란 감정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바로 우연히 마주치는 타자에서부터 비롯된다. 하지만 기쁨을 주는 그 타자는 우리와 마주칠 수도 있지만 끝내 마주치지 못할 수도 있다. 말 그대로 우연이라는 말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본질적으로 기쁨을 추구하는 존재이기에 일부는 의지로써 타자와의 관계를 바꿀 수 있다. 노동자들을 사랑한 전태일의 의지, 68혁명이 일어나기 전 프랑스 노동자들의 기쁨을 쫒던 밤, 그리고 우리가 외부의 힘에도 불구하고 ‘철학흥신소’에서 타자로써 마주치게 된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기억해야 될 것이 있다. 기존의 나의 것, 나의 기쁨과 무관한 그것 들을 지키려 하는 순간 우리에게 기쁨을 주는 타자는 떠나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외부의 힘에 의해 본질을 많이 잃어버린 우리는 이런 일을 되풀이 해왔다.
그렇기에 바디우의 다음과 같은 말은 참 인상 깊게 다가온다. “사랑의 만남이 주는 영향 아래 내가 그 만남에 실질적으로 충실하고자 한다면, 내 상황에 거주하는 나 자신의 방식을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바꾸어야 한다는 것은 명백하다.” 이렇게 우리는 잃어버렸던 본성을 찾고 주체에 한걸음 다가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종혁 (MC 들뢰즈)
- 철학흥신소 소속 작가. (라고 본인은 한테 설득 중)
- 우울증 핑계대고 퇴사해서, 놀고 먹고 있음
- 놀고 먹다 지쳐, 랩을 만들고 주짓수를 하고 있음.
- 창의적인 인간임(창의성은 놀 때 발현된다는 것을 삶으로 입증 중)
- 아직은 방황하고 있지만, 계속 그럴 같음. (다행히 아버지가 돈이 좀 있음)
- 철학을 삶으로 받아들인다고 쌩똥을 싸고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