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혁 칼럼]스피노자가 답해준 세가지 질문 IV

주체로 살아가는 집단이 커진다면 그 집단 밖에 사람들과는 어떻게 될까?

“주체로(신이 부여한 본성대로) 살아가는 집단이 커진다면 그 집단 밖에 사람들과는 어떻게 될까?, 결국 또 적과 동지로 나뉘어 서로를 파괴하는 일들이 되풀이 되는 건 아닐까?”


이것이 내가 해명하고 싶었던 세 번째 질문이었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이미 외부의 힘에 지배받아 본성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우리가 조금만 경계심을 늦추면 순식간에 우리 고유의 감수성을 제거하고 그들과 같은 감수성을 주입하려 한다. 그리고 우리는 종종 이러한 폭력에 몸과 마음이 너덜너덜 진다. 이에 스피노자는 본성대로 살아가는 사람은 그러지 못한 사람들이 본성을 되찾을 수 있게끔 노력할 것이라고 말한다.(에티카 4부 정리37, 부록9) 결국엔 모두가 본성대로 살게끔 될 것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에티카 4부 정리36)


어떻게 보면 스피노자의 이러한 이야기는 '아는 자'와 '모르는 자'를 이분법적으로 나누어 계몽을 원했던 알튀세르의 생각과 비슷한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에 탈근대 철학자 랑시에르는 그것이 근대적 지식인의 오만이라 비판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스피노자의 사상은 이러한 문제를 피해간다. 데카르트의 사상이 피할 수 없었던 주체와 대상의 일치의 문제를 실체와 양태의 개념으로 피해간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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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의 사상은 '아는 자'가 '모르는 자'를 계몽시키는 것이 아니다. 본성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잠시 본성을 잊어버린 사람들에게 그것을 상기시키는 것이다. 또한 그러한 본성 자체도 외부적인 것으로부터 배우는 것이 아닌 애초부터 신(자연)에게 부여받은 채로 태어나기에 그의 사상은 계몽 아닌 계몽이 되는 것이다. 스피노자의 말처럼 모두가 본성대로(부분의 기쁨은 결국 신의 기쁨이다) 살아가는 날이 언제일지는 모르겠지만 오긴 올것이라 믿는다.


그러나 너무나 큰 유토피아를 머릿속에 그리기만 하다보면 현재 할 수 있는 것들은 너무나 작고 보잘 것 없어 보이게 된다. 그렇기에 우리는 벤야민의 말을 기억해야 한다. “항상 그때 그때의 1보만이 진보이며 2보도, 3보도, N+1보도 진보 결코 진보가 아니다.”라는 말을. 우리는 외부의 힘에 흔들리지 말고 그저 현재의 기쁨만을 끈덕지게 추구하며 살면 된다. 그게 보잘 것 없어 보이고 때로 의미 없어보이는 아주 작은 것일지라도.


“스피노자, 철학자들의 그리스도.” - 들뢰즈




필진소개

이종혁 (MC 들뢰즈)
- 철학흥신소 소속 작가. (라고 본인은 한테 설득 중)
- 우울증 핑계대고 퇴사해서, 놀고 먹고 있음
- 놀고 먹다 지쳐, 랩을 만들고 주짓수를 하고 있음.

- 창의적인 인간임(창의성은 놀 때 발현된다는 것을 삶으로 입증 중)
- 아직은 방황하고 있지만, 계속 그럴 같음. (다행히 아버지가 돈이 좀 있음)
- 철학을 삶으로 받아들인다고 쌩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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