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누구를 사랑하나요?
지금 누구를 사랑하나요?
‘지금 누구를 사랑하나요?’라는 질문을 받게 된다면, 우리는 어떤 대답을 하게 될까? 뜨거운 연애를 하고 있는 커플이라면 지금 만나고 있는 매력적인 연인이라고 답할 것이다. 또 신혼의 단꿈에 젖어 있는 사람들은 지금의 배우자라고 답할 것이다. 그보다 조금 더 나이가 많은 사람은 자신의 자녀들이라고 답할 게다. 그렇다. 지금 우리는 대체로 연인이나 가족 내부의 사람들을 사랑한다. 이렇듯 어느 사이엔가 사랑이라는 것을 아주 사적인 영역의 관계라고 너무도 당연하게 여기고 있다.
그렇다면 사랑, 그것은 정말 무엇일까? 탁월했던 철학자들이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했지만 결국 핵심은 이것이다. 사랑은 소유의 원리가 아니라 무소유의 원리가 작동하는 가치라는 것. 쉽게 말하자면, 사랑은 자발적으로 가난해지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일반적으로 사랑이라고 믿고 있는 사적 영역의 사랑은 분명 사랑이 맞다. 연인이 가고 싶어 했던 콘서트 티켓을 사줄 때, 고생해서 번 월급을 전부 아내에게 갖다 줄 때, 아들이 갖고 싶어 했던 자전거를 선물해줄 때 우리는 여지없이 가난해질 테니까. 이렇듯 진정한 사랑은 어떤 식으로든지 스스로 기꺼이 가난해지는 것을 선택하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간혹 자신과 사적 관계가 전혀 없는 이를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면 의아함을 느끼게 된다. 아니 사적 영역 밖의 누군가를 사랑하는 사람을 순진한 사람이라고 치부하거나 심지어 무슨 꿍꿍이가 있는 사람이라고 의심하기도 한다. 좋은 대학 법대를 나와서 가족들 건사는 고사하고 인권 변호사로 고생만하고 있는 사람을 세상 사람들은 어찌 생각할까? 세상물정 모르는 순진한 사람이라 여기는 사람이 한둘이 아닐 게다. 또 사회적 약자를 위해 헌신하는 인권변호사는 종종 ‘나중에 정치권에 발을 내밀기 위해 치밀하게 준비하고 있는 거 아니야?’라는 오해를 받기도 한다.
물론 인권변호사 중에 정말 세상물정 모르는 순진한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사회운동을 하는 사람 중 정치에 야심이 있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권변호사와 사회운동에 적어도 10년 이상 헌신한 사람들 중에는 순진하거나 혹은 교활한 사람은 없을 게다. 단순히 순진함이나 야심만으로 인권변호사와 사회운동가라는 척박하기 그지없는 삶을 그 오랜 시간 견뎌내기 쉽지 않은 까닭이다. 그들은 평범한 사람들이 연인과 배우자, 자녀들을 사랑하듯이 자신과 사적인 관계에 있지 않는 타인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들은 마음만 먹으면 다른 방식으로 얼마든지 충분한 돈을 벌 수 있지만, 스스로 가난해지는 길을 선택한 것이니까.
지금 대다수의 사람들은 공적인 영역의 사랑을 하는 사람을 순진하거나 교활한 사람이라고 여기는 경향이 있다. 사적인 영역 밖에는 사랑이란 것이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고 확고하게 믿고 있기 때문이다. 사적인 관계 이외의 영역에 존재하는 사랑을 경험해본 적도 없고, 아예 그런 사랑이 세상에 존재하는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공적인 영역의 사랑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 공적인 영역의 사랑을 하는 사람은 순진하거나 교활한 존재로 보일 수밖에. 안타까운 일이다. 공적인 영역의 사랑을 해본적도 없고, 또 그런 것이 존재하는지도 모르는 삶은 얼마나 협소한가?
사랑, 결혼, 돈
대다수의 믿음처럼 공적인 영역의 사랑, 그러니까 생면부지의 사람 혹은 이웃에 대한 사랑은 정말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오직 연인, 부모, 아내, 자녀에 대한 사랑만이 진짜 사랑이고 나머지는 모두 거짓이거나 위선일까? 전혀 아니다. 장구한 인간의 역사를 돌아보면 분명히 알게 된다. 동서양 할 것 없이 오랜 시간동안 인간 사회에서 사랑이라는 가치는 사회적이고 공적인 차원에서 다루어져 왔다. 예수가 말했던 ‘사랑’이 그러하고, 싯타르타의 ‘자비’, 공자의 ‘인’(仁)역시 그러하다. 지금이야 믿기 어렵겠지만, 인간은 사적인 영역보다 공적인 영역의 사랑을 더 오랜 시간이 믿으며 살아왔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다시 물어보자. 우리는 왜 사적인 영역의 사랑만을 진짜 사랑이라고 여기게 된 것일까? 바로 돈 때문이다. 정확히는 자본주의 때문이다. 자본주의로 인해 신격화 되어버린 돈이 우리의 사랑을 왜곡하고 협소하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선뜩 이해가 안 될 지도 모르겠다. 조금 돌아 가야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지금 우리가 진짜 사랑이라고 확실하게 믿고 있는 사적 영역의 사랑이라는 것은 단 하나의 사회적 제도와 긴밀하게 연결 되어 있다. 바로 '결혼'이라는 사회적 제도 말이다.
사랑이라고 믿는 있는 관계 중 결혼이라는 제도와 직간접적으로 연관되지 않는 관계는 없다. 사적 영역의 사랑, 그러니까 부모, 배우자, 연인, 자녀에 대한 사랑은 전부 결혼이라는 제도에 직간접적으로 연관되거나 파생되어 존재하게 된 것이다. 납득하기 어려울 것도 없다. 부모에 대한 사랑은 부모의 결혼으로 인해 파생된 것이고, 연인의 사랑 역시 대체로 결혼을 전제한 경우가 일반적이다. 또한 배우자나 자녀처럼 직계 가족에 대한 사랑은 절대적으로 결혼이라는 제도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사유재산을 인정하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결혼은 무엇을 의미할까? 그것은 가족이라는 공동체를 이루는 하나의 제도적 장치다. 그런데 이 가족이라는 공동체는 일종의 운명공동체다. 정확히 말하자면 경제적 운명 공동체다. 이것은 달리 설명할 필요도 없다. 남편이 실직을 하거나 사업에 실패하면 그 여파는 고스란히 가족들에게 전해지게 되니까 말이다. 한국과 같이 사회적 안정망이 부실한 국가에서 이런 영향은 더욱 극명하게 드러날 수밖에 없다. 사회적 안정망이 취약한 국가에서는 그 안정망의 역할을 결국 가족이 할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보자. 의료보험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다면, 아이가 아팠을 때 그 경제적 부담은 부모가 고스란히 질 수밖에 없다. 실업에 대한 적절한 사회적 안정망이 없다면 아버지가 실직 후 겪게 될 궁핍함은 고스란히 가족에게 전가될 수밖에 없다. 그 뿐이 아니다. 육아나 노인에 대한 국가적 차원의 안정망이 없다면, 이 역시 전적으로 가족에 대한 사랑이란 미명하에 남은 가족들에게 전가될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사적인 영역의 사랑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더 이상한 일일 게다.
돈이 쪼개버린 사랑
사랑은 스스로 가난해지는 것이다. 그런데 생존의 불안에 시달리는 사람은 결코 스스로 가난해질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자본주의에서 느끼는 생존의 불안은 실제적인 부유함의 문제와 관계가 없다는 점이다. ‘Winer takes all'이라는 구호처럼 승자가 모든 것을 독식하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생존의 불안을 느끼지 않을 사람은 없다. 부유한 사람이든 그렇지 않은 사람이든 일정 정도 모두 생존의 불안을 느끼며 살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결혼이라는 제도 안에 포섭되는 관계의 사랑만을 진짜 사랑이라 믿게 된 게다. 자본주의가 양산한 생존의 불안 때문에 사랑의 대상이 협소해진 게다. 생존의 불안을 느끼는 사람이 '일단 나부터 내 가족부터 살아야지!'라고 생각하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자본주의는 어렵지 않다. 사람보다 돈이 먼저 되는 체제가 바로 자본주의다. 천박한 자본주의에서 교육받고 그것을 내면화한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아는 것이다. 돈이 없다면, 나와 내 가족이 언제든 생존에 위협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지금과 같은 병적인 자본주의 형태에서는 결혼이라는 제도와 연관된 관계(연인, 배우자, 부모, 자녀) 이외의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러니 내 애인, 내 가족부터 챙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제 3자를 사랑하는 것은 순진한 일이거나 꿍꿍이라고 여길 수밖에 없다. 돈에 대한 압박감, 두려움, 불안감이 커지면 커질수록 공적인 영역에 대한 사랑은 점점 사라져갈 것이다.
사적인 사랑에 매몰되고, 공적인 영역의 사랑을 잊어버렸던 것은 우리의 잘못이 아니다. 인간답게 살지 못하게 내몰았던 자본주의 탓이 절대적으로 크다. 이제 알 수 있을 것도 같다. 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사회적 안정망이나 복지를 외치는 말이다. 경제 민주화나 복지를 그리도 외치는 것은 그들이 종북좌파에 빨갱이라서 그런 것이 아니다. 사적인 영역보다 조금 더 넓은 영역의 사람들이 서로를 보듬고 사랑할 수 있는 최소한의 사회적 토대를 만들기 위해서인 것이다. 그들은 그래서 그리도 사회적 안정망이나 복지를 외치는 것이다. 인간답게 서로를 돌보며 사랑하며 살 수 있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