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는 누군가의 소비로 돌아간다.
생산이 자본주의를 굴러가게 한다.
‘돈은 쓰는 것보다 버는 것을 먼저 배워야 되는 기라!’ 어머니가 어린 시절부터 종종 내게 했던 이야기다. 지금도 어머니의 이 말이 옳다고 생각한다. 돈을 버는 것 보다 쓰는 것을 먼저 배우면 영원히 돈에 시달리며 살게 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머니의 이 말을 조금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자본주의는 크게 ‘생산’과 ‘소비’라는 두 축으로 이루어져 있다. 자본주의는 상품을 생산하고 그 상품을 소비하고 다시 상품을 생산하는 순환구조다. 그런 의미에서 돈을 쓰는 것은 소비에 해당되고, 돈을 버는 것은 생산에 해당된다. 그러니까 어머니의 말은 소비보다는 생산을 먼저 해야 한다는 의미였던 셈이다.
이것은 비단 내 어머니의 생각만은 아닐 것이다. ‘잘살아 보세!’를 외치던, 소위 새마을 운동 세대는 항상 생산을 중요한 일이라고 강변했다. 그뿐이 아니다. 일을 하고, 돈을 버는 생산 활동은 언제나 선하고 중요한 일이라고 여겼고, 일하지 않거나 돈을 쓰는 소비 활동은 나쁜 것이고 하찮은 일이라고 여겼다. 경상도에 이런 말이 있다. ‘노니 우는 아 똥이라도 닦아라!’ 아무 일도 안하고 놀고 있으니 차라리 우는 아이 기저귀 갈아 주는 일이라도 하라는 말이다. 이처럼 1970~1990년 사이, 한국 경제의 급 성장기를 살아냈던 사람들은 대체로 생산의 중요성에 크게 동의하는 세대였다.
그렇다면 이렇게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소비보다 생산이 중요하다고 믿는 사람들이 열심히 생산 활동을 해서 경제가 성장했으니, 자본주의를 움직이는 힘은 생산에 있는 것이라고. 실제로 자본주의를 이끄는 동력이 생산에 있다고 일찍이 천명한 철학자가 있다. ‘막스 베버’다. 그는 자신의 저서 「프로테스탄티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직업은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의무인 일종의 소명’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리고 그는 자본주의 구조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했다.
‘소명과 천직으로서 자신이 맡은 바 일을 충실히 수행한 결과로서의 생산은 축적될 것이고, 이 생산을 통해 발생한 이윤을 쾌락을 충족하기 위해 방탕하게 소비하지만 않는다면, 자본가는 그 잉여 이윤을 생산에 재투자할 수 있다’
베버는 ‘생산-축적-생산’ 이런 순환 구조를 통해 자본주의는 유지, 발전될 것이라 전망했다. 그는 기독교 특유의 금욕적 생활태도로 인해 소비는 억제되고 그로 인해서 잉여이윤이 발생할 것이고 바로 그 잉여이윤이 다시 생산에 재투자됨으로써 자본주의가 굴러가게 된다고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핵심은 자본주의를 굴러가게 하는 동력은 소비가 아니라 생산이라는 이야기다. 베버의 이러한 주장은 기독교가 발전한 지역에서 초기 자본주의가 발전했다는 실제적 증거를 등에 업고 더욱 확고한 믿음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소비가 없다면, 생산은 없다.
베버의 이야기는 동아시아에 사는 지금 우리에게도 아주 설득력이 있다. 우리 사회 대다수가 갖고 있는 생산과 소비에 믿음은 어떤 것일까? 생산(노동)은 장려되어야 할 선한 것이라 믿고, 소비(낭비·사치)하는 것은 기피하거나 악한 것이라는 믿는 경향이 남아 있다. 싫은 일도 묵묵히 참고 견디는 것은 미덕이요, 흥청망청 돈을 써대는 것은 나쁜 행동이라는 믿음은 지금까지도 여전히 유효하다. 그러니 자본주의가 소비가 아니라 생산에 의해서 발전했다는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도리가 없다. 하지만 베버는 헛다리를 짚은 것이 분명하다. 막스 베버 이론의 맹점은 단 하나의 질문으로 단박에 알 수 있다. ‘생산한 제품은 어떻게 할 것인가?’
그렇다. 다들 근면하게 생산만 하고 금욕적으로 소비하지 않는다면, 정작 생산된 그 많은 상품은 누가 소비한단 말인가? 베버는 이 질문에 답할 수 없을 것이다. 자본주의는 상품의 흐름과 그 흐름에 역행하는 화폐(돈)의 흐름이 원활할 때 유지되는 체제인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TV를 근면하게 하루에 100개 생산하면 뭐하겠는가? 그 100개 중 하나도 소비되지 않는다면, 그 TV를 만드는 회사는 망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당연히 그 회사의 노동자는 더 이상 근면하게 생산조차 할 수 없게 되는 것 아닌가?
생산이 소비에 선행한다는 이야기는 옳다. 하지만 생산이 소비보다 중요하고 더 나아가 자본주의를 이끄는 동력이 생산에 있다는 베버의 이야기는 순진하게 들리기까지 한다. 다들 생산만 하고 누구도 소비하지 않는다면, 잉여이윤 자체가 생기지 않을 테니까. 결국 생산은 소비를 전제로 할 때에만 가능하다. 상품을 생산하고 다시 상품을 생산하려면, 그 사이에 생산한 상품이 소비되어야 가능하다. 쉽게 말해, TV를 100개 생산하고 다시 100개를 더 생산하려면 먼저 생산된 100개를 팔아 잉여 이윤을 남겨야 가능한 일이라는 말이다.
‘생산적 소비’라는 역설
논의가 여기까지 진행되면 자본주의의 놀라운 진실에 직면하게 된다. 그것은 ‘소비가 생산적이다!’라는 역설이다. 정말 놀랍지 않은가? 소비가 생산적이라니. 그렇다. 지금은 소비가 생산적인 시대다. 소비가 없다면 생산도 의미가 없다. 아니 생산 자체를 하지 못한다. 자본주의는 누군가 끊임없이 소비를 해야만 그 잉여이윤으로 다시 생산을 할 수 있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미 세계 역사가 고스란히 입증해주는 사실이기도 하다.
19세기 즈음부터 포르투갈, 프랑스, 영국, 일본 등 세계열강들은 너도 나도 식민지를 가지려고 했다. 그 결과로 많은 전쟁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이미 잘 알고 있다. 대표적으로 영국은 인도와 파키스탄을, 프랑스는 베트남과 알제리를, 일본은 한국을 식민지로 삼았다. 당시 세계열강들은 왜 식민지를 가지위해 전쟁까지 불사할 정도로 혈안이 되었던 것일까? 대체로 학창시절에는 열강들이 식민지를 구축하려고 했던 원인을 노동력과 자원의 필요 때문이라고 배웠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다른 이유가 더 있다. 그 이유 중에서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인 이유는 새로운 소비시장의 구축에서 찾을 수 있다. 열강들은 값싼 노동력과 자원의 수탈뿐만 아니라 새로운 소비시장을 찾기 위해서 식민지 개척에 사활을 걸었던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세계열강들은 ‘미개한 너희들을 우리가 개화시켜주마!’라는 그럴듯한 제국주의 논리를 앞세워 너도 나도 식민지를 가지려고 했던 것이다.
멀리 갈 것 조선의 일제 강점기를 생각해보자. 일본이 정말 조선의 생산력과 자원 수탈만을 목적으로 했다면, 당시 조선의 가장 번화가인 경성을 중심으로 미쓰고시 백화점(현, 신세계 백화점), 미나카이 백화점등 다수의 백화점을 세우는 쓸데없는 짓은 하지 않았을 테다. 당시 일본은 노동력과 자원 수탈뿐만 아니라 새로운 소비시장 구축에도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 이렇듯 세계열강들은 소비가 없다면 생산도 의미 없다는 사실을 간파했기에 식민지 건설에 사활을 걸었던 것이다.
자본주의를 굴리는 힘, 소비
그렇다면 제국주의도, 식민지도 없는 지금, 소비는 더 이상 자본주의를 움직이는 힘이 아닌 것일까? 전혀 아니다. 여전히 소비는 자본주의를 이끄는 핵심 동력이다. 지금 우리네 삶에서 직접 확인할 수 있다. 막스 베버의 말처럼 생산이 소비보다 중요한 것이라면, 왜 그 많은 기업들이 광고와 마케팅에 사활을 거는 것일까? 주위를 둘러보자. 길거리, TV, 스마트 폰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라면, 어디 하나 광고 아닌 것이 없다. 집요하게 소비를 유혹하고 자극하는 것들로 넘쳐 난다.
나는 공작기계를 만드는 회사에서 오래 근무했다. 공작기계는 쉽게 말해 기계를 만드는 기계다. 공작기계로 자동차도 만들고, 휴대폰도 만든다. 한 번은 업무 차 공작기계로 휴대폰을 만드는 중국의 어느 공장을 간 적이 있다. 하루에만도 엄청난 양의 휴대폰이 만들어 지고 있었다. 이것은 자동차도 마찬가지다. 그 때 그런 생각을 했다. ‘도대체 이 많은 휴대폰과 자동차를 누가 다 사는 것일까?’ 궁금해서 그 공장 직원에게 물었다. ‘이게 다 팔려요?’ 그 담당자의 대답은 ‘팔아야죠, 이거 일주일 동안 못 팔면 우리 회사 망해요’였다.
그렇다. 생산은 자본주의를 이끌지 못한다. 핵심은 소비다. 소비야말로 생산적이다. 소비되지 않으면 더 이상 생산조차 할 수 없는 체제가 바로 지금의 자본주의다. 이제 거의 모든 기업들이 광고, 마케팅에 사활을 거는 이유 역시 알 수 있다. 원활한 소비가 없다면 잉여 이윤도 없고, 잉여 이윤이 없다면 재생산은 물론이고 기업의 존속 자체가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물건을 만드는 것만으로 자본주의는 굴러가지 않는다. 생산한 상품이 소비되어야 한다. 아니 수단과 방법을 가리 않고 소비시켜야 한다. 그래야 기업이 존속하고 자본주의 역시 돌아가니까.
일과 돈 사이에는 언제나 소비의 문제가 있다.
제국주의 시대나 지금이나 소비할 대상을 집요하게 찾고 있다는 측면에서는 정확히 같다. 제국주의 시대가 소비 시장을 찾기 위해 총, 칼을 앞세워 물리적으로 침탈하는 형식이었다면, 지금은 수많은 자극적인 광고와 홍보를 앞세워 자발적으로 소비하도록 만드는 형식이다. 집요하게 소비할 대상을 찾고 있는 자본주의적 속성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문제는 광고와 홍보가 너무나도 집요해서 이제는 소비를 ‘자발적’이라고 볼 수도 없을 정도라는 점이다. 그것은 차라리 강제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다. 우리는 그렇게 그 ‘강제된 자발적’ 소비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다.
조금 비약해서 말하자면, 소비에 관해서 우리는 대부분 자발적으로 식민지 생활을 하는 것이다. 광고와 마케팅은 소비를 하라고 유혹할 뿐 총, 칼을 앞세워 결코 강제하지는 않으니 분명 ‘자발적’이기는 하다. 하지만 과연 그것을 정말 ‘자발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것이 진짜 자발적이라면, 꼭 사야 할 그 수많은 ‘필수 아이템’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필수 아이템’은 없으면 안 되는, 꼭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건 자발적인 것이 아니라 강제적인 것에 가깝지 않을까?
소비의 자유가 분명 존재한다는 측면에서 소비는 ‘자발적’이다. 하지만 동시에 여러 가지 이유로 소위 말하는 ‘필수 아이템’을 거부할 내적 능력이 없다는 측면에서 소비는 분명 ‘강제적’이기도 하다. 소비가 없다면 자본주의는 유지될 수 없기에, 자본주의는 우리에게 ‘소비하라!’고 집요하게 유혹하는 것이다. 그 유혹이 너무나 집요해져서 강요처럼 느껴질 지경이다. 하긴 자본의 입장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우리가 소비하지 않는다면, 자본은 이윤 축적은 고사하고 증발해버릴지도 모를 일이니까.
‘일과 돈의 생활철학’을 이야기하면서 ‘소비’의 문제는 결코 우회할 수 없다. 일과 돈 사이에는 언제나 소비의 문제가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돈에 관한 대부분의 문제는 소비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고, 지긋지긋한 직장으로 다시 돌아가 일해야 하는 것도 소비의 문제와 깊이 연관되어 있다. 자본주의는 소비에 사활을 걸고 있다. 그렇기에 소비의 문제에 대해서 깊이 고민해보지 않는다면, 필연적으로 일과 돈의 문제로 불행해질 게다. 일과 돈에 관한 대부분의 문제가 결국 소비의 문제와 깊게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