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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오늘 회사그만둡니다.

들뢰즈라는 번개가 일었다. 

"들뢰즈라는 번개가 일었다. 아마도 어느 날 20세기는 들뢰즈의 시대로 불릴 것이다." 미셸 푸코


‘질 들뢰즈’라는 철학자가 있다. 삶을 긍정하는 생성의 철학자다. 1995년 11월의 어느 날, 신문은 들뢰즈의 죽음을 알렸다. 당혹스러웠던 것은 투신자살로 생을 마감했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들뢰즈를 이해할 수 없었다. 어떤 경우에도 삶을 긍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들뢰즈 아닌가? 그런 그가, 투신자살이라니. 들뢰즈를 좋아했던, 그래서 믿었던, 나는 당혹스러움을 너머 일종의 배신감마저 들었다. 그는 그럴듯한 말만 떠는 삼류 철학자였을까요? 그래서 ‘삶의 긍정성과 생성’은 내던져버리고 삶을 부정하며 자살해버렸던 것일까?


 들뢰즈를 이해하고 싶었다. 아니 배신감을 떨치고 싶었던 거였는지도 모르겠다. 들뢰즈의 철학과 삶을 쫒았다. 그 추적 끝에 알게 되었다. 들뢰즈는 삼류 쌈마이 철학자가 아니라 진정한 철학자였다. 그는 진정으로 삶을 긍정했기에, ‘살아 있는 채로 죽은 것’이다. 들뢰즈는 몸이 쇠약해진 이후 죽기 얼마 전까지 사지를 잘 움직이지 못해 아파트 침대에만 누워있었다. 들뢰즈는 직감 했던 것이다. 이대로 시간이 더 지나면 내 육체를 내 의지로 움직이지 못하게 된다는 것을.


 눈을 떠보니 몸이 조금 움직여지는 어느 날, 들뢰즈는 마지막 힘을 짜내 육체를 베란다로 끌고가 투신했던 것이다. 꿈에서 들뢰즈를 만난 적이 있다. 그는 옅은 하지만 평안하고 온화한 미소을 지으며 아파트 베란다에서 떨어졌다. 아마 들뢰즈는 정말 그랬을 것이다. 나는 들뢰즈를 이해했고, 배신감은 더 깊은 애정과 존경심이 되었다.


 들뢰즈는 삶의 마지막인 죽음마저도 자신이 직접 선택한 것이다. 사지를 움직이지도 못해 삶을 부정해야 하는 상황을 긍정적으로 거부한 것이다. 그렇다. 그는 살아 있는 채로 죽었다. 자살에 관한 세상 사람들의 윤리적 예단은 그에게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 들뢰즈는 마지막까지 자신의 삶으로 자신의 철학을 관철해냈다.


 들뢰즈의 철학과 삶을 쫒으며, 이제 그만 회사를 나서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들뢰즈는 내게 물었다. “너는 살아 있는 채로 살아가고 있느냐?” 내가 사랑한 철학자는 죽는 것조차 살아 있는 채로 죽는데 나는 어떤가? 직장 속의 나는 죽은 채로 살아가고 있었다. 않을까? 매일 도살장에 끌려오는 표정으로 사무실에 들어서서 어제와 같은 업무, 어제와 같은 사무실, 어제와 같은 시간에 커피 마시고 담배를 피며 살고 있지 않았나.

 나른한 오후 2시, 문득 자리 일어서서 동료들의 표정을 살핀다. 다들 즐거움도, 화남도 그 어떤 감정 없는 표정이다. 마치 죽은 것처럼 컴퓨터 자판만을 두들기고 있다. 저녁이면 소주 한잔하며 자신의 삶에 불평불만을 늘어놓지만 아무런 변화도 모색하지 않는다. 그렇게 오늘 같은 내일로 또 그냥 그렇게 살아간다. 정말 나는 살아 있는 채로 삶을 살아가고 있긴 한 걸까?

 늙는다는 것, 그래서 죽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더 이상 경험하지 못하는 것’일 테다. 나는 늙고 싶지 않다. 살고 싶다. 몸이 살아 움직이는 한 많은 것들을 만지고, 부딪히고, 감동하고, 울고, 웃는 경험을 멈추고 싶지 않다. 매일을 같은 일상을 반복하는 좀비 같은 삶을 끝내고 싶다. 나는 이제 안다. 한 사람이 늙는다는 것은 물리적으로 시간이 지나가는 과정이 아니라는 걸. 더 이상 아무것도 느끼고 경험하고 감동하지 못할 때 늙어 가는 것이다.


 낯섦과 새로움이 두려워 안전한 유리박스 안에서 삶을 관망하고 싶지 않다. 그렇게 죽음을 앞둔 무기력한 노인이 되고 싶지 않다. 이제 유리박스 밖으로 나가 진짜 삶을 느끼고 경험하려 한다. 앞으로 그리 살 작정이다. 피부를 보호하느라 사하라 사막을 횡단할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다. 진짜 늙는다는 것은 피부가 상하는 것이 아니라 사하라 사막을 경험할 용기가 없을 때 일어나는 현상이니까. 나는 늙음도 죽음도 살아있는 채로 받아들이고 싶다.

 나는 희망한다. 내 삶에 들뢰즈라는 섬광이 번뜩이기를. 나는 희망한다. 살아있는 채로 오늘을 온전히 살아낼 수 있기를. 나이가 들어도 뜨거운 청년으로 늙어갈 수 있기를. 그리고 마침내는 살아 있는 채로, 청년으로 죽을 수 있기를. 지금은 아주 먼, 그래서 좀처럼 다가설 수 없는 꿈이지만, 나는 그렇게 살고 싶다. 나는 살아있는 채로 살아가고 싶고, 살아있는 채로 죽고 싶다. 근사한 청년, ‘질 들뢰즈’처럼. 나는 이제 그리 살고 싶다. 그래서 나는 오늘 회사를 그만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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