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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을 끝낸 학생을 떠나 보내며

성숙은 '삶이 좆같다'는 걸 안다는 것. 단, 염세나 냉소 없이.

이 글은 9주 간의 글쓰기 수업을 끝낸 학생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입니다.




“성숙은 '삶이 좆같다'는 걸 안다는 것. 단, 염세나 냉소 없이.” 신도림 스피노자.


00씨에게 해줄 마지막 이야기는 ‘성숙’이에요. 지금까지 잘 해왔지만, 조금 더 힘을 내서 더 성숙한 사람이 되었으면 바라기 때문이에요. 삶은 좆같죠. 내 마음대로 되는 것도 없고, 그렇다고 휩쓸려 살기엔 이미 너무 많이 알아버렸으니까요.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두 가지 전략을 선택하죠.


 첫째는 ‘삶은 아름다운 것’이라고 믿는 전략이죠. 보이는 것을 믿는 대신, 믿고 싶은 것을 보는 거죠. 종종 이런 삶은 긍정성이란 말로 포장되죠. 하지만 실제로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을 안고 사는 거예요. 삶은 근본적으로 좆같은 것이기에, 언제까지나 믿고 싶은 것만 보고 살 순 없어요. 어느 순간, 자신이 외면했던 좆같은 현실이 덮쳐오게 마련이죠. 그때 그렇게도 ‘긍정’적이었던 사람은 모든 것을 ‘부정’하며 주저 앉아버리곤 하죠.


 두 번째 전략은 ‘삶은 의미 없는 것’이라고 믿는 전략이죠. 이 전략은 조금 더 영민한 사람들이 사용하죠. 영민한 사람들은 알아요. 삶은 근본적으로 좆같다는 걸. 하지만 많은 영민한 이들은 좆같은, 그래서 두려운 삶을 그 자체로 긍정할 순 없어요. 그들은 그 두려운 삶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염세적이 되거나 냉소적이 되죠. ‘삶은 원래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거야!’라는 삶의 진실에 겁을 먹어, 삶을 비관하거나 조롱하게 되죠. 다른 누구의 삶이 아닌 바로 자신의 삶을.


 두 부류 모두 성숙하지 못해요. 성숙하고 싶다면, 삶이 원래 좆같다는 걸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해요. 술만 먹으면 패는 아버지, 돈이 없다고 매일 같이 악다구니를 하는 어머니는 그 아이가 선택한 게 아니죠. 촌지를 주지 않는다고 뺨을 후려갈긴 선생도 그 아이가 선택한 게 아니에요. 변기를 핥으라고 했던 고참도 그 아이가 선택한 게 아니죠. 하지만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그를 덮쳐왔던 모든 삶이 바로 그 사람이에요. 그 아이를 지배하는 뒤틀린 욕망과 심연의 분노는 그 아이의 탓이 아니죠. 삶은 이리도 좆같아요. 이걸 받아들여야 해요.


 그 모든 삶의 진실을 받아들이되, 염세나 냉소 없이 받아들여야 해요. 그래 ‘나는 뒤틀린 욕망과 심연의 분노를 가진 인간이야’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되, ‘하지만 그건 내 탓이 아니야. 나에게 남은 선택들을 찾아 새로운 나를 만나고 싶어’라고 생각할 수 있어야 되요.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성숙한 사람이고, 그런 태도가 성숙한 사람의 태도예요. 그렇게 어제보다 조금 더 성숙한 사람이 되길 바라요. 좆같은 현실을 직시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염세와 냉소 없이 다시 오늘을 시작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이게 제가 00씨에게 주는 마지막 수업이에요.


 언젠가, 변함으로써 같음을 유지하는 두 강물이 다시 만나게 되길 바랍니다. 또 봅시다. 그리고 이 글은 아직 남은 세상의 수많은 ‘00’을 위해 세상에 풀어 놓을 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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