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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매번 과제를 드리는 이유

철학흥신소는 매 수업마다 과제가 있어요.

싫어하는 분도 있어요. 수업이 끝날 때마다 뭘 자꾸 적으라고 하니까요. 저는 수업이 끝나면 형식과 내용에 관계없이 글 한 편을 올리라고 말씀드려요. 물론 하고 싶은 분들만 하는 과제이긴 하지만요. 이건 제가 처음 수업을 시작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변하지 않는 방식이에요. 저는 왜 매번 과제를 드릴까요?     


 첫째는 철학이 ‘앎’에만 머물지 않고 ‘삶’ 나아가길 바라기 때문이에요. 철학은 ‘앎’과 ‘삶’에 관계된 것이죠. 철학을 통해 특정한 개념과 지식을 알게 되죠. 철학을 공부하는 많은 이들이 이런 ‘앎’에 만족하고 거기에 머물죠. 저는 그런 문화가 싫어서 '앎으로서의 철학'에 천착하는 이들과 멀어진 것이고요. ‘앎’이 ‘삶’으로 옮겨 오지 못한다면, 철학이 무슨 소용일까요? 

     

 사랑이 무엇인지 철학적으로 ‘아는’ 것이 뭐 그리 중요할까요? 누군가와 제대로 된 사랑을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죠. 뭔가를 '알아'야 하는 이유는 제대로 '하기' 위해서죠. '앎'은 '삶'을 위해 필요한 거죠. 제가 떠드는 것은 저의 ‘철학’이죠. 수업을 듣는 분들은 그 ‘철학’을 알게 되는 것일 뿐이고요. 언제 ‘앎’은 ‘삶’이 되어, 각자만의 ‘철학’이 될까요? 그 시작은 배운 ‘앎’을 각자만의 언어로 표현해보는 것이에요. 그래서 이야기하고 써야 되요.

     

 두 번째는 상처가 치유되기를 바라기 때문이에요. “이야기된 불행은 더 이상 불행이 아니다.” 이성복 시인이 했던 말이에요. 그렇죠. 이야기된 불행과 상처는 더 이상 불행도 상처도 아니죠. 우리가 불행과 상처에 지배당하는 건 그걸 이야기하지 못해서죠. 하지만 사람을 만나고, 글을 짓고, 철학을 하며 알게 되었어요. 이성복 시인의 말은 반만 옳다는 걸요. 이야기된 불행은 분명 더 이상 불행이 아니죠. 하지만 그만큼 아니 그보다 더 중요한 건 그 불행을 이야기할 대상이에요.


 불행을 이야기해야 되요. 하지만 그 대상은 사랑받고 사랑할 준비가 된 사람이어야 해요. 만약 우리를 수단이나 도구로 여기는 이들에게 우리의 불행을 이야기한다면 더 큰 불행이 찾아올지도 몰라요. 이야기된 불행은 언제나 우리의 어둠과 관계 되어 있기에, 야수(같은 인간)들은 그 어둠을 약점 삼아 우리를 더 큰 불행으로 몰아 넣곤 하죠. 어쩌면 그래서 우리는 불행을 이야기하지 않게 된 것이지도 모르겠어요. 우리를 수단, 도구로 여기는 이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자신을 보호하려다 불행해진 것이죠.      


 철학흥신소 수업을 듣는 분들은 대체로 상처받은 분들이에요. 상처받은 것은 자부심이에요. 섬세한 감수성을 가졌기에 상처받을 수 있는 것이니까요. 야수(같은 인간)들은 상처받지 않아요. 야수들은 타인의 어둠(불행, 약점)을 본능적으로 찾아내서 상처를 주려고 하죠. 오직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이들만 상처받죠. 함께 수업을 듣는 분들은 상처받았기에 사랑받고 사랑할 준비가 되어있는 분들이죠. 바로 여기가, ‘이야기된 불행이 더 이상 불행이 아닌’ 게 되는 공간이에요. 조금씩 용기를 내어 여기서라도 아니 여기서부터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으세요. 여기에 야수는 없으니까요. (생각해보니 제가 제일 야수처럼 생겼네요)       


과제,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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