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쿠버다이빙과 철학
“저 좀 내보내주세요!”
한 중년 남성이 바다에 뛰어들자마자 소리쳤다. 처음으로 스쿠버다이빙을 체험해보려 바다에 뛰어들어지만 그가 빠진 곳은 공포였다. 옆에 붙은 강사는 타이르듯 말했다. “안전하니깐 2분만 견뎌보세요. 2분만 견디시면 익숙해져서 물속에 들어가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들리지 않는듯했다. 나는 그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어려서부터 키보다 낮은 수심에서만 놀아본 것이 전부이기 때문에 발이 닿지 않는 깊은 바닷물은 공포였다. 게다가 처음 스쿠버다이빙을 배우다 다쳤었던 기억 때문에 그 공포는 더욱 크게 다가왔다. 그래선지 이제 제법 익숙해졌음에도 불구하고 바닷물에 뛰어들기 전이면 늘 이런 생각이 든다. “내가 이걸 꼭 해야 되나?”
우리는 익숙하지 않은 것에서 두려움을 느끼곤 한다. 그 두려움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이질감이다. 우리는 육지에서 나고 자랐다. 육지에서 느꼈던 온도, 중력, 대기에 익숙하다. 그 익숙함으로, 의식하지 않아도 코로 숨을 쉬고, 몸을 움직이고, 대화한다. 하지만 바다 속은 어떠한가? 육지의 익숙함은 온데간데 없다. 모든 것이 낯설다. 물은 차갑고, 시야는 어둡고, 코로 숨을 쉴 수 없고, 강해진 중력 때문에 귀는 아프고, 몸은 내 맘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 더욱 무서운 것이 있다. 그 낯설고 이질적인 공간에서 주변 사람과 대화를 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이처럼 물속은 이질적인 세계이다. 그 낯선 이질감은 너무나도 쉽게 두려움으로 변해버리고 만다.
육지의 감각보다 더 익숙한 것이 있다. 가치관이다. 익숙해진 자신의 가치관은 당연히 옳은 것이기에 결코 의심하지 않는다. 자신의 가치관에 어긋나는 사람은 옳지 못한 존재로 여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제 누군가를 지적하고 비난하고 따돌리며 적으로 돌려세우는 것은 정당한 일이 된다. 그들은 옳지 못한 존재니까. 고백컨데, 나도 그랬다. 익숙한 가치관에 사롭잡혀 얼마나 많은 이들을 적으로 돌려세웠던가. “어휴... 병신 같은 새끼들...”, “어휴... 미성숙한 새끼들...”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런 비수같은 말들은 모두 결국 이것이다. “어휴... 내 가치관에 부합하지 않는 새끼들...” 슬프지만 그 ‘새끼’들에는 많은 소수자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나는 항상 불만이 많았다. 어딜가나 그 '새끼'들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나는 그 '새끼'들의 가치관을 뜯고 고치고 싶었다. 나의 가치관에 맞게. 나의 가치관에 '!'를 달고, 그 '새끼'들의 가치관에 '?'달고 싶었던 셈이다. 하지만 나의 가치관에 ‘!’를 달면 달수록 나의 삶도, 너의 삶도 그리고 더 나아가 우리의 삶도 괴로워졌다. 자신의 가치관에 '!'을, 타인의 가치관에 '?'을 달려는 이들은 익숙함을 벗어난 가치관에 관심조차 없다. 사람은 대게 자신이 본 것만 믿는 법이다. 설령 다른 세계(가치관)를 접하게 되어도 화를 내거나 귀를 막으며 피하려 한다. 자신이 여태껏 살아온 방식이 편협하고 잘못된 것일 수도 있다는 두려움을 무의식이 가로막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 자신의 가치관에 ‘?’를 달고 태어난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는 ‘!’로 변하게 된다. 그때가 괴물이 되는 지점이다. 서글프게도, 그 괴물은 자식에게 대물림되기도 한다. 한 번 가치관에 ‘!’가 달리게 되면 그 뒤에 똑같은 ‘!’는 붙기 쉽지만, 좀처럼 ‘?’는 붙기 어렵다. 하지만 ‘?’야 말로 삶을 확장시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그 길은 오직 이질감이라는 문을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 문을 두드려 삶을 확장했다. 육지에만 익숙했던 내가 바다 속에서도 어느 정도 편안함을 느낄 수 있게 되었다. 바닷속의 신비로운 것들이 주는 낯선 이질감은 불편함, 두려움이 아니라 설렘과 즐거움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육체의 이질감을 스쿠버다이빙으로 극복했다면, 정신의 이질감은 철학 덕분이다. 철학을 공부하며, 그 전까지만 해도 나와는 어울릴 수 없을 것만 같았던 여러 가치관들을 횡단할 수 있게 되었다. 동시에 그만큼 보다 많은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이것들에 또 ‘!’를 찍고 제자리에 머물러 버린다면 이전과 크게 다를 바가 없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또 다시 ‘!’ 끝에 ‘!’가 아닌 ‘?’를 달기 위해 노력해야 하며 살 것이다. 하지만 알다시피 낯선 이질감이란 쉽게 받아드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스쿠버다이빙의 2분이 중요하다. 낯선 이질감 앞에서도 조금만 버티다보면 ‘?’의 불편함과 두려움이 아닌 설렘과 즐거움을 느낄 수 있게 될 것이다.
스쿠버다이빙에 실패한 중년의 남성처럼 ‘!’로 너무나도 오랜 시간을 살았다면 그것이 한 번에 될 수 없을 수도 있다. 그럴 땐 내가 여러 번의 시도 끝에 스쿠버다이빙을 즐기게 된 것처럼, 지속적인 시도가 필요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그 시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주변 누군가의 도움이다. 사실 스쿠버다이빙도 철학도, 나 혼자의 노력을 가능했던 것은 아니다. 낯선 이질감의 불편함과 두려움을 설렘과 즐거움으로 전환시킬 수 있었던 것은 사람들 덕분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 스쿠버다이빙을 시작하고 즐기게 된 것도, 철학을 시작하고 즐기게 된 것도 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덕분이었다.
나의 ‘!’에 ‘?’가 붙는 삶의 확장에는 늘 사랑이 함께 했던 것 같다. 반대로 ‘!’에 ‘!’이 붙는 삶의 안주에는 늘 사랑과는 반대되는 감정이 함께 했던 것 같다. 이런 이유로 나는 보다 많은 사람들이 서로가 서로의 삶에 ‘!’가 아닌 ‘?’를 달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아니, 그보다 먼저 나부터 사랑하는 사람에게 달아줄 수 있는 ‘?’를 찾는 것이 우선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종혁 (MC 들뢰즈)
- 철학흥신소 소속 작가. (라고 본인은 한테 설득 중)
- 우울증 핑계대고 퇴사해서, 놀고 먹고 있음
- 놀고 먹다 지쳐, 랩을 만들고 주짓수하고, 스쿠버다이빙 하고 있음.
- 창의적인 인간임(창의성은 놀 때 발현된다는 것을 삶으로 입증 중)
- 아직은 방황하고 있지만, 계속 그럴 같음. (다행히 아버지가 돈이 좀 있음)
- 철학을 삶으로 받아들인다고 쌩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