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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의 '외로움'과 '답답함'

명절은 놀랍도록 잔인하구나.

명절이다. 명절은 놀라운 경험을 선물한다. 나의 고민을 나보다 더 걱정해주는 사람이 이리도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성적이 잘 나오니?” “살 좀 빼야 하지 않겠어?” “취업은 언제 할 거니?” “결혼은 때 놓치면 못하는 거야” “아이는 언제 낳을 거니?” “애들 그렇게 키우는 거 아니야?” 아, 이리도 내 걱정을 많이 해주는 사람이 있었다니. 명절은 정말 놀라운 경험을 준다. 민족의 대명절 만세.     


 우리는 안다. 그 놀라움은 답답함이란 걸. 평소에 그다지 관심도 없던 사람들이,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함께 모여 의미 없는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서로에게 상처만 남기는 의미 없는 이야기들 말이다. 이보다 더 답답한 일도 없다. 의아한 일이다. 그 지긋지긋한 답답함이 싫다면 고향에 가지 않으면 되는 것 아닌가? 그 숨 막힐듯한 답답함을 알면서도 우리는 그곳으로 꾸역꾸역 간다. 왜 이런 의아한 일이 벌어지는 걸까? 그래도 가족이니까? 최소한의 도리는 해야 하니까?      


 다 거짓말이다. 우리가 ‘답답함’을 견디는 이유는 ‘외로움’을 감당할 수 없어서다. 결혼을 하고 명절에 고향에 가지 않기로 했다. 제 발로 답답한 곳으로 기어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명절 연휴를 집에서 보내고서야 알았다. 사람들이 불평불만을 늘어놓으면서도 명절이면 왜 다시 고향으로 가는지. 다들 고향으로 가고 텅 빈 거리에 혼자 남아 있을 때 찾아오는 '외로움'은 보통 일이 아니다. 세상에 혼자 되어버렸다는 그 ‘고립감’을 ‘외로움’이란 문학적 수사로 바꾸는 것은 기만적이라고 느낄 지경이었다. 지독히도 외로웠다.      


 답답함의 관계를 단절하고 혼자가 된 사람을 안다. “연휴에 뭐 할 거예요?”라는 내 질문에 “일할 거예요. 명절에 시급이 더 쎄거든요.”라고 답했다. 그깟 돈 때문에 명절에 일하려는 것이 아닌 것을 안다. ‘답답함’을 벗어나기 위해 선택했던 ‘외로움’을 그렇게 감당해보려는 것이다. 명절의 답답함의 원인을 사회적 관계와 부조리한 전통에서 찾는 것도 훌륭한 일이다. 그것은 엄연한 사실이니까. 하지만 그 훌륭한 일은 우리네 삶에 그다지 큰 도움이 되지 못할 테다. '외로움'을 감당할 수 없다면, 근원적으로 '답답함'의 해소는 불가능한 까닭이다.     


 명절이 답답하다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투덜거림이 아니다. 답답함의 관계를 단절하고 혼자 된 그 사람처럼, 모두 떠난 텅 빈 거리에 혼자 서 있어 보는 것이다. 그렇게 절절한 외로움을 감당해보는 일이다. 그때 알게 될 테다. 나는 외로움을 선택해야 할 사람인지, 답답함을 선택해야 할 사람인지. '답답함'을 감당함으로 '외로움'으로부터 벗어날 것인지, '외로움'을 '감당함'으로 답답함으로부터 벗어날 것인지를 선택해야 한다. 우리네 삶은 이리도 잔인하다. 명절은 이리도 잔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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