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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란 '위해' 쓰는 사람이 아니라 '대신하여' 쓰는 사람.
“작가는 무엇인가? 분명 작가는 독자를 위해 글을 쓰는 사람이지. 하지만 독자를 ‘위해’ 쓴다는 것이 무슨 뜻이란 말인가? 그것은 정말로 독자를 위해 글을 쓰는 거야. 하지만 작가들이란 읽지 않는 사람을 위해서도 글을 쓰거든, 이 경우 작가는 그들을 ‘위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대신하여’ 글을 쓰는 것이 되지. 그러므로 독자를 ‘위해’ 글을 쓴다는 것은 그들을 ‘위해’와 그들을 ‘대신하여’의 두 가지를 의미한다네.” 질 들뢰즈
나는 글쓰는 것을 직업하고 있다. 작가다. 직업적 정체성 때문인지, 가끔 스스로에게 묻는다. “작가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들뢰즈는 이리 답한다. “작가는 독자를 위해 글을 쓰는 사람이지” 그렇다. 작가는 독자를 위해 글을 쓰는 사람이다. 나는 그의 생각에 동의한다. 글을 쓰는 동시에 철학을 공부하는 나이지만,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철학적인 글은 쓰고 싶지 않았다. 그런 글들은 너무 현학적이고 난해해서 독자를 위해 쓴 글이 아니라고 느꼈던 까닭이다.
나는 저자거리의 감성과 언어로 철학적인 글을 쓰고 싶었다. 어떤 철학 선생은 ‘그것은 불가능하다’고 단언했다. 상관없다. 가능한 삶만을 좇았다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 테다. 나는 불가능한 삶을 좇아 여기까지 왔다. 과거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불가능성의 가능성을 쫒아 살아 갈 테다. 그렇게 글을 써왔다. 나름 독자를 위해 쓰는 글을 써왔다고 자부한다. 하지만 10권이 넘는 단행본을 내고서 내게 남겨진 헛헛함이 있다. 그 헛헛함은 어디서 온 것일까?
들뢰즈는 다시 작가에 대해 이리 말한다. “작가들이란 읽지 않는 사람을 위해서도 글을 쓰거든. 이 경우 작가는 그들을 ‘위해’ 쓰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대신하여’ 글을 쓰는 것이 되지” 아, 씨바! 들뢰즈 형님의 통찰력이란. 겨우 깨달았다. 내가 싫어했던 현학적인 글과 저자거리의 언어로 쓴 내 글은 본질적으로 같은 글이었다. 두 글은 같은 글이다. 다만 누구를 ‘위해’ 쓴 글인지가 달랐을 뿐. 어떤 작가는 현학적이고 난해한 글을 읽고 싶어 하는 이를 ‘위해’ 글을 쓴 것이고, 나는 저자거리의 언어로 된 글을 읽고 싶어 하는 이들을 ‘위해’ 글을 쓴 것일 뿐이다.
그래서 헛헛했던 게다. 들뢰즈의 말처럼, “독자를 ‘위해’ 글을 쓴다는 것은 그들을 ‘위해’와 그들을 ‘대신하여’의 두 가지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놓치고 있었던 게다. 나는 누군가를 ‘위해’ 써왔다. 하지만 누군가를 ‘위해’ 쓴다는 것은, 누군가 ‘읽는다’ 혹은 ‘읽을 수 있다’는 가정 하에서의 글쓰기일 뿐이다. 나는 누군가를 ‘대신하여’ 글을 쓴 적이 없다. ‘읽지 않는’, ‘읽을 수 없는’ 존재들을 대신하여 글을 쓴 적이 있을까? 나의 글쓰기는 누군가를 ‘위해’ 쓰는 글이었지, 누군가를 ‘대신하여’ 쓰는 글쓰기는 아니었다.
나는 그리도 편협한 글을 써오고 있었던 게다. 나는 겨우, 내가 위할 수 있는 존재들에 대한 글을 써오고 있었을 뿐이다. 최소한 중학교는 졸업하고, 철학에 조금 관심이 있으며, 삶의 의미에 대한 최소한의 의미를 찾고자 하는 자들을 ‘위해’ 쓰고 있었다. 나는 ‘대신하여’ 쓴 적이 없다. “독자를 ‘위해’ 글을 쓴다는 것은 그들을 ‘위해’와 그들을 ‘대신하여’의 두 가지를 의미한다네.”라는 들뢰즈의 말을 나는 감히 조금 바꾸고 싶다. “‘대신하여’ 쓰지 못한다면, ‘위해’ 쓸 수 없다” 고.
나는 왜 바위를 '위해' 글을 쓰지 못했는가? 나는 왜 식물을 '위해' 글을 쓰지 못했는가? 나는 왜 동물을 '위해' 글을 쓰지 못했는가? 나는 왜 성소수자를 '위해' 글을 쓰지 못했는가? 나는 왜 '여성'을 위해 글을 쓰지 못했는가? 그들을 '대신하여' 글을 쓸 생각을 하지 못했던 까닭이다. 그래서 나는 진정으로 그들을 '위해' 쓸 수도 없었던 것이다. 더 늦기 전에 누군가를 ‘위해’ 쓰는 글이 아닌, 누군가를 ‘대신하여’ 쓰는 작가가 되려 한다. 나는 기어이 그런 작가가 되려 한다. 그래서 나는 지금 아프게 묻는다. "나는 어떤 존재를 대신하여 존재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