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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시 도망친 '예술가'에게

예술로 뛰어든 예술가와 예술로 도망친 예술가.

1.

예술가를 좋아한다. 아니 동경한다. 예술가는 누구인가? 작품을 만드는 사람? 창조하는 사람? 다 옳은 정의다. 하지만 나는 예술가를 이렇게 정의한다. 언어 너머에 있는 사람. 예술가는 언어 너머 있는 사람이다. 예술가들은 그림을 보고 그리며, 음악을 듣고 만들며, 조각품을 감상하고 만들며, 사진을 보고 찍고, 영상을 보고 만든다. 왜 이런 번거로운 짓을 할까?      


 언어로 다 표현될 수 없는 어떤 것들을 표현하고 싶어서다. 내가 느낀 감정들, 예컨대 사랑, 증오, 고마움, 서글픔의 감정들을 언어로는 도저히 표현해낼 길이 없어서, 그림을 그리고, 음악을 만들고, 연주를 하고, 조각을 하고, 사진을 찍고, 영상을 만드는 것이다. 예술가는 그렇게 언어 너머에 있는 것들을 보고 또 보여주고 싶은 사람들이다. 이 얼마나 매혹적인가?      


 언어는 여백이 없다. 그래서 모든 것이 전달될 수 있을 거라 믿는다. 하지만 이보다 더 큰 오해도 없다. 언어는 여백이 없기에 오해투성이다. 언어의 ‘여백 없음’은 타인의 ‘여백 없음’이 아니라, 오직 나의 ‘여백 없음’인 까닭이다. 반대로 예술은 온통 여백이다. 그래서 모호하고 경계가 없다. 하지만 그래서 오해가 없다. 온통 여백이기에, 서로의 이야기를 써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정해진 이야기가 없기에 오해가 없다. 그래서 예술은 매혹적이다. 그래서 나는 예술가 혹은 예술가적인 사람을 좋아한다.      


2.

하지만 모든 예술가(혹은 예술가적인 사람)에 매혹되는 것은 아니다. 두 종류의 예술가가 있다. 모든 예술가는 언어 너머에 있다. 하지만 거기에는 두 종류의 예술가가 있다. ‘예술로 뛰어든 예술가’와 ‘예술로 도망친 예술가' 먼저 ‘예술로 뛰어든 예술가’는 어떤 사람일까? 이들은 언어 세계에서 온몸을 베였던 적이 있는 이들이다. 자신에 대해서 정직하게 쓰고 읽고, 말하고 듣는 과정을 온 몸으로 겪어냈던 이들이다. 그 너덜더널해지는 과정에 끝에서 이들은 깨닫는다. “아, 언어로는 결국 나의 감정과 욕망을 다 이야기할 수 없구나!” 


 이들은 자신에 대해 쓰고, 말할 수 없어서 예술을 하는 게 아니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언어로 표현할 수 없기에 예술로 뛰어든 이들이다. 나는 이런 예술가가 좋다. 있는 그대로 자신을 드러내느라 상처받았던 예술가. 득실거리는 타자와 마주쳤던 상흔을 가진 예술가. 그 상처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상흔을 예술로 승화시켜 다시 자신을 드러내는 예술가. 그렇게 과감하게 예술로 뛰어든 이들이 좋다. 이들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나는 ‘예술로 뛰어든 예술가’들에게 매혹된다. 

       

 그렇다면, ‘예술로 도망친 예술가’는 어떤 이들일까? 이들 역시 분명 언어 너머에 있다. 구구절절 쓰고 말하는 것보다, 그림, 사진, 음악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것에 익숙하다. 이들은 분명 예술가다. 하지만 이들은 언어로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드러낸 적이 적거나 없다. 이유는 간명하다. 여백 없는 언어로 자신을 드러낼 때 받아야 할 상처가 두려워서다. 언어가 남기는 그 오해를 감당할 수 없어서다. 그래서 이들은 언어를 버리고 예술 뒤로 숨어 버렸다. 득실거리는 타자가 두려워 예술의 여백 뒤로 도망친 셈이다.      


 그때 “너 형편없는 사람이구나!”라는 타자의 비난은 두렵지 않다. 언어를 버리고 예술 뒤로 숨어 버렸기에 늘 이렇게 말할 수 있으니까. “내가 말하려는 건 그런 게 아니야!” 나는 이런 예술가들이 안쓰럽다. 언제까지 예술 뒤로 숨으며 살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 숨음 때문에 자신이 그리도 사랑하는 예술마저 제대로 향유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모든 고귀한 예술은 지독한 상처를 입었던 영혼으로부터 나왔다는 사실을 그들은 애써 외면하고 있다. 또 상처 입은 영혼만이 예술의 깊은 매혹에 다다를 수 있다는 사실도 애써 외면하고 있다. 그러니 어찌 그네들이 안쓰럽지 않을 수 있을까. 

       

3. 

‘예술로 도망친 예술가’를 한 명 알고 있다. 그녀는 또 다시 도망쳤다. 진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낼 수 없어서. 삶의 진실을 감당할 수 없어서. 상처 받고 싶지 않아서. 이 글은 예술로 도망친 그녀를 위한 글이다. 그리고 예술로 도망친, 혹은 도망치려는 모든 예술가들을 위한 글이다. 그네들이 너무 늦지 않게 득실거리는 타자들 앞에 자신을 드러냈으면 좋겠다. 그 상처들을 감당하며 앞으로 나갔으면 좋겠다. 예술로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예술로 뛰어들었으면 좋겠다. 


 때로는 고통스러울 그 과정을 통해, 자신 안에 있는 반짝거리는 원석을 발견할 수 있으면 좋겠다. 타자가 남기는 상처로 그 원석이 세공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그네들이 그렇게 찬란하게 빛나는 '예술로 뛰어든 예술가'가 되었으면 좋겠다. 도망친 그녀에게 긴 글의 행간에 담긴 나의 마지막 애정이 잘 전달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어긋난 인연은 되돌 수 없지만, 그녀의 삶은 계속될 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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