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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다른 사람을 긍정하는 법

스피노자가 바라 본 '인간'

스피노자의 ‘목적원인’


“나와 다른 사람들이 왜 싫을까?” 스피노자는 이 질문에 어떻게 답해줄까? 먼저, 스피노자가 ‘인간’이란 존재를 어떻게 파악하고 있는지부터 알아보자.      


“인간은 항상 목적을 위해서, 즉 자신들이 추구하는 이익을 위해서 행동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런고로, 그들은 언제나 이루어진 것의 목적원인만을 알려고 하며, 그것을 들었을 경우에 만족한다.” (에티카, 제 1부, 부록)


 스피노자는 인간은 항상 어떠한 목적을 위해서 행동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어떤 사물이나 성취가 있을 때 그것이 형성된 원인, 즉 목적원인을 알려고 한다. 인간은 그 목적원인을 들었을 때에만 만족하는 존재다. 스피노자는 그 목적은 ‘자신(인간)들이 추구하는 이익’이라고 진단하고 있다. 놀랍도록 정확한 진단이다. 17세기 스피노자의 논의를 현재에도 정확하게 적용할 수 있다.


 지금은 자본주의의 시대다. 지금 시대의 거의 유일한 목적이 무엇인가? 돈이다. 대부분의 인간은 돈이라는 목적을 위해서 행동한다. 어떤 행동을 하던 그것이 목적(돈)에 부합하는지 그렇지 않은지에 따라 행동한다. 즉, 돈이 되는지, 그렇지 않은지에 따라 행동한다. 그리고 돈을 보면 그것의 목적원인(어떻게 돈을 벌었는가?)만을 알려고 한다. 동시에 돈을 벌 수 있었던 원인(목적원인)을 들었을 경우에만 만족한다.


 다른 경우도 마찬가지다. 여행을 떠나도, 사람을 만나도 항상 어떤 목적을 위해서다. 그러니 사람들은 왜 여행을 떠나는지, 왜 그 사람을 만나는지, 목적원인만을 알려고 한다. 그리고 그 목적원인을 들었을 때만 만족한다. 인간의 목적원인에 대한 집착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스피노자는, 인간은 자신뿐만 아니라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대상에게서 목적원인을 발견하려 한다고 말하고 있다.


사람들은 흔히모든 자연물이자신들처럼어떤 목적을 가지고 움직인다고 생각한다.” (에티카제 1부록)    



‘관념’의 기원


스피노자의 말처럼, 모든 자연물이 어떤 목적을 갖고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라 생각했을까? 인간은 집요하게 이 질문을 물었을 테다. 인간은 목적원인을 들었을 때만 만족하는 존재니까.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스피노자 말하는 자연물이란, 개, 고양이, 새, 바위, 나무, 물 같은 ‘자연’만을 말하는 게 아니다. 선/악, 질서/혼란, 아름다움/추함 같은 관념들도 자연물이다. 물질적인 것이든, 비물질적인 것이든 세상에 존재하고 있다면 자연물이다. 이런 자연물들의 목적은 어떻게 규정되었을까?

     

사람들은 존재하는 모든 것이 자기들을 위하여 만들어졌다고 믿은 다음에는각각의 사물에 대하여 자신들에게 가장 유용한 것을 핵심이라고 판단하고자신들을 가장 많이 만족시키는 온갖 것을 가장 탁월한 것으로 평가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그리하여 그들은 사물의 본성을 설명하기 위해서 선질서혼란따뜻함추움아름다움추함 등의 개념들을 형성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에티카제 1부록)     


 스피노자는, 인간은 자연물의 목적, 즉 존재이유(사물의 본성)가 바로 인간 자신으로 여기고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인간은 자신을 가장 많이 만족시키는 것들을 가장 탁월한 것으로 평가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선/악’, ‘질서/무질서’, ‘따뜻함/추움’, ‘아름다움/추함’ 같은 개념들은 객관적이거나 명백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물의 본성은 인간을 중심에 두고 설명하기 위해서 생겨난 오류들일 뿐이다.

      

건강과 신의 경배에 도움이 되는 모든 것을 사람들은 선이라고 하고그 반대를 악이라고 했다.” (에티카제 1부록 

    

 스피노자의 통찰은 옳다. 인간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것(건강과 신의 경배)을 선이라고 하고, 그 반대를 악이라고 규정했을 뿐이다. 선과 악은 분명치 않다. 살인은 악인가? 아니다. 그 살인이 특정한 인간을 이롭게 하면 그것은 선이 된다. 역사가 그것을 말해준다. ‘이토 히로부미’는 우리에게는 악이지만 일본에서 선이다. 마찬가지로 ‘안중근’은 우리에게는 선이지만 일본에서는 악이다. ‘질서/무질서’라는 개념도 마찬가지다.

      

사물이 우리의 감각을 통해서 쉽게 표상되며 따라서 쉽게 상기할 수 있게끔 되어 있으면우리는 그것을 훌륭하게 질서 지어져 있다고 말하며 그 반대의 경우는 나쁘게 질서 지어져 있다 또는 혼란스럽다고 말한다.” (에티카제 1부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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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서/무질서’를 객관적이고 가치중립적인 개념이라 여긴다. 이는 명백한 오류다. 스피노자는 우리의 감각을 통해 쉽게 기억될 수 있는 것을 ‘질서’로, 그 반대를 ‘무질서’로 여긴다고 말한다. 사실이다. 글자 나열과 숫자의 나열이 있다고 해보자. 글자에 익숙한 사람은 글자의 나열을 ‘질서’로, 숫자의 나열을 ‘무질서’로 느낀다. 마찬가지로 숫자에 익숙한 그 반대로 느낀다. 스피노자는 인간이 얼마나 오만하며 자기중심적인지를 날카롭게 드러내고 있다.

     


불편한 진실, 타인

      

이제 질문으로 돌아가자. 우리는 왜 나와 다른 사람이 싫을까? 한 사람의 개성과 다양성을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게 잘 안 된다. 그 이유는 인간이란 존재 자체가 모든 자연물을 자기중심적으로 보기 때문이다. 모든 자연물에는 타인도 포함된다. 하지만 타인은 다른 자연물과 다르다. 물은 내가 마시기 위해, 돼지는 내게 먹히기 위해, 새는 내게 노래를 들려주기 위해 존재한다고 여길 수 있다. 하지만 타인은 그렇지 않다. 타인은 자신을 위해 존재한다고 여길 수 없다. 타인은 나와 동등한 인격체니까. 

     

 그래서 타인이 더욱 불편하고 불쾌하다. 나와 동등하기 때문에 자신 중심으로 환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왜 신념적 병역거부자가 싫었을까? 그들은 내게는 ‘무질서’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신념적 병역거부자는 정말 무질서한 존재일까? 아니다. 그들은 종교적, 이념적으로 누구보다 ‘질서’ 있는 삶을 산다. 그 질서를 지키기 위해 병역을 거부하는 것이다. 다만 그들의 질서가 나의 질서로 환원될 수 없어서 그들이 불편하고 불쾌하고 싫었던 게다.

      

 나는 왜 예술가들이 싫었던 걸까? 그들의 무책임과 게으름 때문이었다. 그들은 정말 무책임하고 게으른 존재였을까? 아니다. 그들은 자신의 작품에 책임감을 갖고 있으며, 그 책임감만큼 성실하게 작품에 임한다. 예술가의 책임감과 성실함이 나의 책임감과 성실함으로 환원될 수 없어서 그들이 불편하고 불쾌하고 싫었던 게다. 그렇다. 인간은 자신과 다른 사람이 싫을 수밖에 없다. 동성애자, 난민, 장애인, 이주노동자가 내심 불편하고 불쾌한 것도 같은 이유일 테다. 



나와 다른 사람이 싫은 이유, 과잉된 자의식


존재의 이유를 자신으로 환원 시킬 수 있는 존재들은 불편하거나 불쾌하지 않다. 그것들은 모두 자신의 이익(편함, 익숙함)에 부합하니까. 하지만 타인만은 그렇지 않다. 타인은 자신을 위해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다. 타인은 그 자체로 단독적으로 존재한다. 그래서 타인은 나의 이익에 부합하지 않는다. 이것이 나와 다른 타인이 불편하고 불쾌한, 그래서 싫은 이유다. 타인의 단독성과 다양성을 존중해야 한다고 말하는 이들조차 이 불편함과 불쾌함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다기 묻자. ‘나’와 다른 타인이 불편하고 불편한 이유가 ‘나’의 이익에 부합하지 않아서인가? 표면적으로는 그렇다. 하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아니다. 근본적인 이유는 인간의 과잉된 자의식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인간은 자의식이 과잉된 존재다. 스피노자의 말처럼, “사람들은 존재하는 모든 것이 자기들을 위하여 만들어졌다”고 믿을 만큼 과잉된 자의식을 갖고 있다. 물, 돼지, 산이 인간이 마시고, 먹고, 오르기 위해 존재하는 것으로 볼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인간의 과잉된 자의식으로 인해 그리 보는 것일 뿐이다.   

   

 타인의 단독성과 그 단독성이 만들어내는 다양성을 진정으로 체화하고 싶다면 그 타인에게서 눈을 떼야 한다. 그리고 자신의 과잉된 자의식을 정면으로 응시해야한다. 세상의 모든 자연물이 인간이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임을 되돌아보아야 한다. 그렇게 과잉된 자의식을 조금씩 덜어갈 때, 타인 역시 있는 그대도 긍정할 수 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는 사실 깨닫게 되었을 때, 우리는 나와 다른 사람들을 위선 없이, 오롯이 받아들일 수 있다. 생각과 언어 그리고 감성 차원 모두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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