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39.당당한 궁상을 긍정하자!

궁상, 소비, 상상력 그리고 꿈

궁상을 긍정할 수 없다면, 소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당당한 궁상’을 긍정할 수 없다면, ‘강요된 궁상’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당연하다. 당당하게 궁상을 선택할 수 없다면, 우리는 시도 때도 없이 스스로가 처량해지는 ‘자기연민’과 자신보다 부유한 사람들을 의식해서 발생하는 ‘피해의식’에서 벗어날 수 없을 테니까. 지금 시대의 대부분은 이런 ‘자기연민’과 ‘피해의식’이 뒤엉킨 강요된 궁상에 시달리고 있다. 진짜 문제는 자기연민에 피해의식이 더해져 발생한 강요된 궁상은 여지없이 우리를 끝없는 소비로 내몬다는 사실이다.


 어린 시절 유독 돈을 잘 쓰는 친구가 있었다. 함께 떡볶이를 먹거나 아이스크림을 먹을 때면 항상 그 친구가 계산을 했다. 나는 그 친구 집이 정말 잘 살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친구의 집에 놀러 갔을 때 흠칫 놀랐다. 화려하고 넓은 집에 살 거라는 나의 기대와는 달리 친구의 집은 좁고 허름했기 때문이었다. 어린 마음에 의아했다. “이렇게 못 사는 데 얘는 어떻게 항상 용돈이 많은 거지?”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 친구의 어머니는 음식점에서 밤늦게까지 일을 하시는 분이었다. 어머니는 아들이 친구들에게 기죽지 않기를 바라셔서 늘 많은 용돈을 주었던 게다. 어머니는 음식점에서 늦게 까지 일하는 자신의 처지가 종종 처량하게 느껴졌을 테다. 그래서 자식만은 돈이 없어 느끼는 그 궁상스러움을 느끼지 않기를 바랐던 것이다. 자기연민은 이런 식으로 우리를 과도한 소비로 내몬다.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자기연민을 느꼈을 때, 그 자기연민을 소비로 보상받으려는 경향이 있다. 이건 지금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주변 사람들이 최신 유행의 신상품을 살 때, 우리 역시 그 신상을 갖고 싶을 때가 있다. 하지만 만약 그때 돈이 없다면, 너무 쉽게 ‘나는 저 정도 물건도 사지 못하는 건가’라는 자기연민에 빠지곤 한다. 그리고 그 자기연민이 점점 커지면 24개월 할부를 해서라도 그 신상을 살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적어도 그 소비를 할 때만큼은 자신 역시 그 정도는 소비할 수 있는 괜찮은 사람처럼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피해의식 또한 마찬가지다. 지인 중에 늦은 취업 때문에 서른이 훌쩍 넘어 돈을 벌게 된 사람이 있다. 그는 형편이 안 되었지만 중형 자동차를 샀다. 그것도 매달 40~50만 원을 내야 하는 할부로. 소비는 각자 취향의 문제이니 그에게 아무 말하지 않았지만, 한 번은 “너무 일찍 큰 차를 산 거 아니야?”라고 조심스레 물은 적이 있다. 그가 내게 돌린 답은 “졸업하자마자 대기업에 취업한 애들은 그랜저도 타는데, 나는 소타나도 못 타냐?”였다. 대체로 이런 식이다. 알게 모르게 내면화된 피해의식 때문에 과도한 소비로 내몰린다. 이처럼 강요된 궁상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면, 소비의 문제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당당한 궁상을 선택하자.


당당한 궁상을 선택하는 것이야말로 소비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한 첫걸음이다. 집요하게 소비하게 만드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자유롭기 위해서는 자발적으로 당당한 궁상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어떤 이는 그 강요된 궁상을 체면이라 부르기도 한다. 그 이름을 궁상으로 하던, 체면으로 하던 그 결핍을 채우기 위한 소비는 필연적으로 우리를 더욱 불행하게 만들 것이다. 강요된 궁상은 과도한 소비를 유발하며, 이는 결국 불행 가득한 직장에서 더 많은 일을 해야 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강요된 궁상의 치명적 함정이다.


 누가 ‘왜 그리 구질구질하게 궁상스럽게 사냐?’라고 면박 준다면, 당당하게 이리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나는 적게 일하기 위해 궁상스럽게 사는 거야!’라고. 이렇게 답할 수 있는 사람은 당당하게 소비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 잊지 말자. 진짜 자유는 ‘자유롭게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소비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타인의 시선을 의식해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소비 철학에 기반해서 돈을 쓰면 우리는 지금 보다는 훨씬 소비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


 구체적으로 말해보자. 34평 아파트가 아니라 24평 빌라에 사는 궁상을 긍정할 수 있다면, 삶을 소모시키는 지금의 일 대신 나름 즐겁고 의미 있는 일을 찾아볼 수 있을 게다. 그랜저가 아니라 마티즈를 타는 궁상을 긍정할 수 있다면, 일 년에 한 번 원하는 곳으로 여행을 갈 수 있을 게다. 최신 유행의 옷과 스마트폰 대신 낡고 허름한 옷과 스마트 폰을 사용하는 궁상을 선택할 수 있다면, 자신이 원하는 일을 조금 더 할 수 있게 된다. 누가 뭐라던 당당한 궁상을 긍정할 수 있다면, 하고 싶지 않은 일을 적게 할 수 있고 하고 싶은 일은 더 많이 할 수 있게 된다. 그게 바로 행복 아닌가? 


우리가 현실에 갇히는 이유는 상상력의 부재 때문이다.


당당한 궁상을 선택해야 할 이유가 또 있다. 강요된 궁상에 갇혀있다면 우리의 상상력은 현저히 낮아지게 마련이다. 상상력이 없는 사람은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살 가능성이 거의 없다. 햇수로 7년 동안 직장을 다니면서 ‘가슴에 깊은 곳에 담아 둔 꿈 하나 없는 직장인은 없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내가 만났던 그 많은 직장인 중 거의 대부분이 하나 같이 그 꿈을 그냥 꿈으로만 남겨 둔 채 먹고사는 문제에만 목을 매고 살아가고 있었다. 화가, 소설가를 꿈꾸는 직장인들 중 자신의 꿈을 이루는 것은 고사하고, 심지어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노력을 하는 사람마저 거의 없었다.


 그들은 왜 그랬던 것일까? 너무 쉽게 ‘먹고사는 문제 때문이지!’라고 답하기 전에 철학자 이진경「삶을 위한 철학수업」이란 책을 한 번 들여다보자. 

 인류학자 데이비드 그레이버는 ‘이타주의자들의 군대’라는 글에서 “왜 미국 대중은 그들의 이익에 반하여 공화당에 투표할까? 왜 가난한 지방 출신의 청년들은 그렇게 부도덕한 전쟁에 굳이 참가할까?”라는 질문에 해명코자 한 적이 있다. 그에 따르면, 미국의 가난한 청년들이 자신의 미래를 꿈꿀 때, 자동차 판매나 부동산업으로 성공하는 것은 상상할 수 있지만, 예술가가 되거나 철학을 가르치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아이비리그로 대표되는 교육기관의 계급적 독점이, 그에 따른 지성과 문화로부터의 제도적 ‘소외’가, 그들의 꿈마저 어딘가에 가두고 있는 것이다. 꿈마저 ‘현실적인 성공’에 갇힌 대중이 ‘비즈니스’를 대표하는 공화당 쪽에 친근함을 느끼는 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핵심은 가난한 사람들이 부유한 사람들의 권익을 대표하는 정당에 투표를 하는 이유가 바로 상상력의 결핍 때문이라는 것이다. 가난한 청년들이 자신의 미래에 대해서 더 넓고 다양하게 상상할 수 없기 때문에 결국 자신의 이익에 반하는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체제에 순응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예리한 통찰이다. 이것은 비단 미국의 이야기만이 아니다. 한국에 사는 우리에게도 의미하는 바가 크다.


 예를 들어보자. 직장인들 중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은 드물다. ‘데이비드 그레이버’라면 그 이유를 상상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답할 것이다. 평범한 월급쟁이들은 자신이 화가, 소설가, 철학가가 되는 모습을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그러니 늘 지금의 자리에서 충분히 상상 가능한 임원이나 주식 대박만을 꿈꾸는 것일 테다. 그들에게는 이제 꿈마저 ‘현실적인 성공’에 갇혀 버린 것이다. 맞다. 평범한 직장인이 꿈을 이루지 못하는 본질적인 이유는 ‘먹고사는 문제’ 때문이 아니라, 그 꿈으로 먹고살 수 있는 미래를 그려볼 수 있는 '상상력의 부재’ 때문인 셈이다.


당당한 궁상은 상상력의 원천이다.


그렇다면 이제 ‘그 상상력을 어떻게 확보할 수 있느냐?’의 문제만 남는다. 우선 내 이야기를 해보자. 나는 지방대 공돌이로 졸업해서 직장에서 7년 간 엔지니어로 근무했다. 그런데 지금 나는 글을 쓰는 것으로 먹고 산다. (딱히 잘 먹고 살진 못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20대 후반까지 단 한 번도 글을 써서 먹고살 수 있을 거란 상상을 해본 적이 없다. 나 역시 대기업에 취업하는 길이 유일한 목표이자 성공이라 믿는 인생을 살았다. 그런 내가 어떻게 '글을 써서  밥벌이를 하는 것은 어떨까?'라는 발칙한 상상을 하게 되었을까?


 바로 당당한 궁상을 선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돈? 좀 없으면 어때, 없으면 적게 쓰면 되지 뭐!’라고 생각하게 되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직장의 일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일로 밥벌이를 할 수 있는 더 많은 방법과 수단을 상상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그 발칙한 상상력 때문에 나름 작가로서 책을 몇 권 내고 글로 밥벌이를 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만약 공상에 가까웠던 그 상상력이 없었다면, 나는 여전히 답답한 직장생활에 불평불만만 되풀하는 평범한 월급쟁이였을 것이 분명하다.

      

 당당한 궁상을 능동적으로 선택하지 못한다면, 강요된 궁상에 갇혀 버릴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이 강요된 궁상은 여지없이 우리의 상상력을 집요하게 공격할 테고, 이내 그것을 고사시켜버릴 것이다. 지금의 밥벌이에서 확실하고 안전하게 연계된 삶 이외의 그 어떤 삶의 방식도 감히 상상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이것이 월급쟁이에서 화가로, 소설가로, 영화감독으로 직업을 전환하는 사람이 왜 그리 드문지를 설명해준다. 우리는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상상력이 없어서 현실에 갇혀 꿈을 이루지 못하는 게다.


  철학자 이진경은 상상력의 중요성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현실의 중압감이 아니라 공상하는 능력이다. 지배적인 삶의 방식, 강요되는 삶의 방식에서 벗어난 다른 삶의 가능성이란 언제나 공상과 함께 온다. 공상은 현실감 없는 무능력에서 생겨나는 게 아니라, 이 무거운 현실에서 벗어날 길을 상상할 수 있는 여유와 능력에서 생겨난다

 결국 우리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은 지금 척박한 현실에 압도당해서 느끼게 되는 불안감이 아니라, 지금의 현실에서 벗어나 행복할 수 있는 새로운 삶의 방식을 꿈꿀 수 있는 상상력에 있다는 말이다.


 지긋지긋한 소비의 유혹에서 벗어나고 싶은가? 삶의 소소한 행복을 느끼고 싶은가? 자신의 가슴속 깊이 담아둔 자신만의 꿈을 이루고 싶은가? 그렇다면 이제 당당한 궁상을 긍정하자. 자기연민과 피해의식으로 점철된 강요된 궁상의 흔적을 과감하게 벗어던지자. 지금 보다 조금 더 자발적으로 가난해지자. 없으면 없는 대로 적게 쓰고, 너무 없으면 일을 해서 돈을 벌면 된다. 그렇게 삶을 향유하자. 그렇게 우리의 진짜 삶을 살아가자. 나는 그것이 정말 행복한 삶이라고 믿고 있다. 당당한 궁상, 그것은 우리가 행복한 밥벌이를 할 수 있는 마지막 희망일지도 모른다. 이제 누가 뭐래도 당당한 궁상을 선택하자!

매거진의 이전글 38.강요된 궁상 VS 당당한 궁상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